선어록 강설

[성재헌의 ‘선사, 애물단지를 깨다’] 23. 자호, 개를 키우다

쪽빛마루 2014. 2. 17. 05:32

[성재헌의 ‘선사, 애물단지를 깨다’]


 

23. 자호, 개를 키우다.
부처님이 설한 행복 밖에서 구하지 마라

 

 

자호, 법당서 으르렁대며 개노릇
머리, 심장, 발 뜯는 개조심 경책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나는 개를 키우지 않는다. 아픈 추억 때문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장에 갔다 오며 갓 눈을 뜬 강아지 한 마리를 사다주셨다. 손뼉을 쳐서 불러도 뒤뚱뒤뚱 엉뚱한 방향으로 헤매다 연신 코를 박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띨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낑낑거리며 품으로 기어드는 그 보들보들한 촉감이 좋아 몰래 이불속에서 재우기도 했다. 아침이면 영락없이 엄마의 빗자루 몽둥이가 날아왔지만 띨띨이의 옹알이 한번이면 그깟 시련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주물러서 키운 띨띨이는 어느새 산이고 들이고 따라오지 않는 곳이 없는 단짝이 되었다. 그런데 띨띨이에게 호의적이 않은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할아버지는 띨띨이만 보면 “저 놈은 똥개도 못되는 땅개여, 저 짧달 막한 다리 좀 봐” 하고 혀를 차셨다.


할아버지의 못마땅함이 못마땅했지만 크게 신경 쓸 건 못됐다. 내 눈엔 떡 벌어진 어깨에 늘씬한 허리가 멋지기만 했고, 띨띨이와 함께 있으면 낯선 곳도 낯선 사람도 두렵지 않았고, 띨띨이가 졸졸 잘도 따라다니는 걸 옆집 동철이가 무척이나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헌데 초복이 다가오는 이맘 때였다. 학교를 마치고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온 난 한참을 멍하니 서있어야 했다. 대문간에 목줄만 덜렁거리고 띨띨이가 보이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를 쫓아 부엌으로 달려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띨띨이 어디 갔어?”
“응…, 띨띨이가 없어?”


설거지를 하던 손길을 멈추지도 않았다. 수상했다.


“엄마, 띨띨이 어디 갔어.”
“그걸 엄마가 어떻게 알아….”


띨띨이를 좋아했던 건 아니지만 띨띨이의 실종에 이리 덤덤할 엄마가 아니었다. 의심은 점점 불안으로 바뀌었다.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띨띨이 어디 갔냐고.”
물이 줄줄 흐르는 고무장갑으로 엉덩이를 철썩 내리치며 엄마도 소리쳤다.


“저리 안가, 엄마도 몰라.”


엉엉 울며 밖으로 나섰다. 정미소 앞 공터, 도립병원 뒤 쓰레기장, 뒷산 용바위, 감천냇가, 함께 자주 갔던 곳이면 빠지지 않고 샅샅이 뒤졌지만 예상대로 띨띨이는 보이지 않았다. 골목어귀에 쭈그려 앉아 해가 지고도 한참을 울다가 퉁퉁 부은 눈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저녁도 먹지 않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또 한참을 엉엉거리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를 잠결에 듣고 또 엉엉 울었다. 할아버지가 띨띨이를 윗집 영감에게 복날 보신거리로 팔았던 것이다.

 

자기마음 파괴 주범은 바로 육근
도적으로부터 행복 지킬것 당부


그날 이후 난 이별이 두려워 개를 키우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전등록’을 읽다가 다시 개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주(衢州) 자호암(子湖巖)에 이종(利 ) 선사라는 분이 계셨다. 남전(南泉) 스님 회상에서 붓다의 평온한 마음, 참되고 진실한 마음, 소중히 보호하고 간직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스님은 곧바로 구주(衢州)의 마제산(馬蹄山)으로 들어가 움막을 짓고 조용히 살았다. 그러다 당나라 개성(開成) 2년에 옹천귀(翁遷貴)라는 사람이 그 산 아래의 자호(子湖)를 보시하여 절을 지었다. 그리고 함통(咸通) 2년에 나라에서 안국선원(安國禪院)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어느 날, 스님이 상당하여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자호(子湖)에 개 한 마리가 있는데, 위로는 사람의 머리를 물어뜯고, 가운데로는 사람의 심장을 물어뜯고, 아래로는 사람의 발을 물어뜯는다. 건드렸다가는 곧바로 몸과 목숨을 잃을 것이니, 조심하라.”
그러자 어떤 스님이 물었다.
“그런 개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스님이 으르렁거리는 시늉을 하다가 크게 짖었다.
“왈~ 왈~”


자호 스님은 왜 스스로 개 노릇을 하셨을까?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엔 개를 키우는 가장 큰 목적이 도둑으로부터 소중한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럼, 자호 스님은 어떤 도둑으로부터 무엇을 보호하려고 저렇게 사나운 개 노릇을 했을까?


설두 중현(雪竇重顯, 980~1052)선사의 ‘송고백칙(頌古百則)’에 이런 게송이 있다.

쇠 부처는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지
누군가 자호 스님을 찾아왔더니
팻말에 적힌 글자, 개 조심
맑은 바람이야 어딘들 없으랴.


조주 스님께서 대중에게 자주 하신 법문이 있다.


“진흙 부처는 물을 건너지 못하고,

쇠 부처는 용광로를 건너지 못하고,

나무 부처는 불을 건너지 못한다.

진짜 부처는 집안에 앉아 있다.”


부처는 참되고 영원한 행복과 평안을 얻은 존재이다. 부처가 안에 있다는 말은 곧 붓다가 말씀하신 평안행복은 밖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다. 헌데도 우리는 행복을 찾아 끊임없이 밖을 두리번거린다. “이것이 좋을까, 저것이 좋을까?” 좋은 것을 찾아 두 눈을 번쩍이고, 두 귀를 쫑긋하고,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군침을 흘리며 입맛을 다시고, 이것저것 만져보고, 이리저리 따지고 또 따져본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행복들은 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덧없고, 결론이 좋지 못하다. 이런 행위들은 공연히 고통을 초래하는 바보 같은 짓이고, 소중히 보호해야할 붓다의 마음을 파괴하는 짓이고, 붓다의 행복을 향유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해버리는 짓이다.


그 주범이 누구일까? 바로 육근(六根)이다. 눈·귀·코·혀·몸·뜻은 붓다의 생명을 손상하는 짓인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빛깔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이론의 먼지구덩이를 헤집으며 집었다 놓았다 하는 짓을 멈추지 않는다. 게다가 가지려 애쓰는 그것들은 몽땅 본래 남의 것들이다. 그러니 육근이 바로 도적이요, 자호 스님은 이 여섯 도적으로부터 붓다의 행복을 지키는 개인 것이다.


나도 다시 개를 키워야겠다. 자호 스님처럼 도둑놈 심보가 슬쩍 기미만 비쳐도 냅다 이빨을 드러내 으르렁거릴 사나운 개 한 마리 키워야겠다. 산으로 들로 졸졸 따라다닌 띨띨이처럼 늘 곁에 두고서 붓다께서 일러주신 행복과 평안을 소중히 보호해야겠다. 언제 어디서나 불어오는 저 맑은 바람과 같은 행복을 말이다.

 

 

[출처 : 법보신문 2012.07.020]


 

☞'선사, 애물단지를 깨다' 목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