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어록 강설

[성재헌의 '선사, 애물단지를 깨다'] 25. 혜랑, 부처가 되길 포기하다

쪽빛마루 2014. 2. 17. 05:33

[성재헌의 ‘선사, 애물단지를 깨다’]


 

25. 혜랑, 부처가 되길 포기하다

진실을 수긍하지 않으면 불성도 없어


 

혜랑, 지견 얻으러 제방 참문
마조, “지견이 마귀들의 세계”

 

 

 

 

“당신, 용돈 줄여야겠어.”
“왜?”
“씀씀이가 너무 헤퍼!”
“그럼,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났는데 소주 한잔도 하지 말란 말이야.”
“이번 달 아이 과외비도 부족한데 친구는 무슨 친구야.”
“뭐 그리 특별하게 키우겠다고 거금을 들여 과외를 시키니?”
“당신 같은 사람 되지 않으려면 조기교육을 철저히 해야 돼.”
“뭐? 내가 어때서?”
“당신이 돈을 잘 벌어, 명예가 있어. 얘는 당신처럼 초라하게 살지 말아야지.”
“도대체 뭐가 그리 불만이야?”
“다지, 당신이 제대로 하는 게 뭐가 있어? 이 나이에 남들처럼 번듯한 집이 있어 자랑할 만한 직위가 있어. 마이너스통장만 바라보며 사는 내가 불쌍하지.”
“일찌감치 재벌 아들과 결혼하지 그랬어.”

“그러게 난 당신이 이런 남자인 줄 몰랐지.”
“어떤 남자?”
“이렇게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남자.”
“뭐, 무책임하다고? 이나마 가정을 꾸려가려고 온갖 수모 감내하며 직장생활 하는 내 입장은 생각 안 해?”
“쥐꼬리만큼 벌어오면서 생색은?”
“생색? 그럼 당신은 나한테 뭘 그리 잘했는데?
“내가 못한 건 또 뭐야.”
“지치고 힘들 때 따끈한 안주에 소주 한잔이라도 권하며 진심으로 날 위로한 적 있어?”
“내가 술집 마담이야? 차라리, 술집 마담하고 결혼하지 그랬어.”

“그러게 난 당신이 이런 여자인 줄 몰랐지.”
“어떤 여자?”
“살가운 애교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허영심만 그득한 여자.”


이 대화가 드라마 속 이야기로 끝나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나와 내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다. 대화의 결론은 서로가 못난 남편 못난 아내이고, 그런 사람과 사는 초라한 아내 초라한 남편이란 것이다. 이 결론이 동반하는 자괴감과 불쾌함은 오래토록 아내와 남편을 괴롭힐 것이며, 서로는 자신의 자괴감과 불쾌함을 털어버리기 위해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준비할 것이다. 스스로 불행하고, 상대를 불행하게 만들고, 서로를 더 깊은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이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전등록’에 다음 이야기가 전한다.


담주(潭州) 초제사(招提寺)에 혜랑(慧朗)선사라는 분이 계셨다. 13세 어린 나이에 출가한 그는 17세에 남악(南嶽)으로 찾아가 20세에 그곳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당시 남악에서는 석두 희천(石頭希遷)선사가 선법을 펼치고 있었다. 허나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법이다. 혜랑은 마조(馬祖)의 명성을 듣고 굳이 건주(虔州)의 공공산(公山)으로 마조선사를 찾아갔다. 그러자 마조가 물었다.


“그대는 무엇 하러 왔는가?”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얻으러 왔습니다.”
“부처님은 지견이 없으신 분이다.”


혜랑은 깜짝 놀랐다. 온갖 번민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부처님처럼 명석한 지혜를 갖춰야 한다고 경전에서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 지혜를 얻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부처님이 되어 안온하고 쾌락한 열반의 즐거움을 만끽하리라고 뜻을 세웠던 혜랑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이었다. 남들도 권하고, 스스로도 당연하다고 여겼던 바를 단칼에 부정했으니, 아마 충격이었을 게다. 이런 속내를 알아차린 마조께서 친절하게 한 마디 덧붙여주셨다.


“지견이 바로 마귀들의 세계이다. 너는 남악에서 왔으면서도 석두가 전한 조계(曹谿)의 심요(心要)는 보지 못했구나. 빨리 석두로 돌아가거라.”


곧장 남악으로 돌아온 혜랑이 석두를 찾아가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그러자 석두 스님은 한심한 놈을 봤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답하셨다.
“자네는 불성이 없어.”
 

석두의 ‘넌 불성 없다’에 충격
말 끝에 이미 불성 있음 믿어


불성이 없다는 건 부처될 가망이 없다는 뜻이다. 싹수가 노란 놈이라며 고개를 돌린 격이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게다. 게다가 ‘열반경’에서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혜랑은 따지듯 석두에게 물었다.


“그럼, 저 꿈틀거리는 벌레들은 어떻습니까?”
“꿈지럭거리는 벌레들에게는 오히려 불성이 있지.”


그럼, 벌레만도 못한 놈이란 말인가? 혜랑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저는 왜 없다고 하십니까?”


석두는 돌렸던 고개를 바로하고, 눈빛을 반짝이며 말씀하셨다.
“자네가 수긍하려고 들질 않기 때문이지.”


혜랑은 이 말끝에 큰 믿음을 일으켰다고 한다. 참된 믿음,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얼마 전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위지안이라는 중국의 여교수가 3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면서 남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삶의 끝에 와서야 알게 된 것, 그건 지금 이 순간 자체가 기적이고 행복이란 사실이다.” 부족하고 초라하게 여겨지는 지금 이 순간 자체가 기적이고 행복이라는 것 믿을 자가 몇이나 될까? 불만과 불평으로 서로를 들볶던 부부가 석두 스님을 찾아갔다고 상상해 보자.


“스님, 저희 부부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요?”


석두는 콧방귀를 뀔 것이다.
“자네들은 행복해질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야.”


“아니 왜 저희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까?”


석두 스님은 눈빛을 반짝이며 말씀하실 것이다.
“이미 행복하다는 사실을 자네 부부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지.”


이런 말끝에 당장 배우자의 손을 잡고 “고마워”라고 말할 자가 몇이나 될까? 진실에 대한 믿음, 참 쉽지 않다. 그래서 일까? 석두의 말씀에 큰 믿음을 일으킨 혜랑은 이후 30여년을 초제사(招提寺) 문밖을 나서지 않으며 부처가 되기 위해 찾아오는 학인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가라, 가. 자네에게는 불성이 없어.”

 

 

[출처 : 법보신문 2012.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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