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헌의 ‘선사, 애물단지를 깨다’]
27. 원지, 손님을 맞다
空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보배
무엇인가를 얻지 못해 안달이고
가진것을 자랑못해 안달난 세상
원지 스님은 가풍 묻는 이에게
두손 털며 “가진게 없다” 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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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말다를 반복하던 장맛비가 그치자 매미소리가 시끄럽다. 답답한 땅속에서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한바탕 환골탈태의 산고까지 치렀으니, 환희의 찬가를 부르며 동네방네 유난을 떨 만도 하다.
그 사정이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마감을 코앞에 둔 내 사정이 급하니, 매미의 기쁨도 나에겐 또 하나의 짜증거리일 뿐이다. 게으름 떨지 말자며 스스로를 다그치고 책상에 앉아 ‘송고승전’과 ‘전등록’을 뒤졌다.
석원지(釋圓智), 그의 속성은 장(張)씨이고, 예장(豫章) 해혼(海昏) 사람이다. 머리를 땋은 어린나이에 출가하여 열반(涅槃)화상께 참례하고 몸소 시중을 들었다. 이윽고 계를 받게 되자 선문(禪門)을 두드리겠노라 맹세하였고, 약산(藥山)을 뵙고는 마음 속 의심을 해결하였다. 이후 장사(長沙)의 도오산(道吾山)에 주석하자 여왕벌을 의지하는 벌 떼처럼 무수한 대중들이 그를 따랐다.
어느 날 약산이 물었다.
“너는 어디를 갔다 오느냐?”
“산을 노닐다 왔습니다.”
“이 방을 떠나지 말거라. 앞으로 뭘 할 건지 빨리 말해 보거라.”
그러자 원지 스님이 말하였다.
“산 위의 까마귀는 눈처럼 하얀데 개울바닥에서 노는 물고기는 정신없이 설치기만 할뿐 꿰뚫지를 못합니다.”
까마귀[烏兒]는 뭘 의미하는 걸까? 천하를 걸림 없이 주유하는 태양을 비유한 걸까? 다음 구절에서 눈처럼 하얗다고 역설적으로 표현했으니, 객진 번뇌의 때가 꼬질꼬질한 중생을 비유한 걸까? 중생 그대로가 본래 부처라며, 수행과 업무는 안중에도 없이 선선히 산으로 놀러나 다니는 자신을 변명한 말일까?
그럼, 개울 바닥에서 분주한 물고기는 언구와 사량 속에서 헤매는 수행자들을 비유한 말인가? 그런 공부는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소란스럽기만 하지 끝내 부처와 조사의 뜻을 꿰뚫지 못하고,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일까?
도무지 속모를 얘기뿐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후끈한 열기 탓으로 돌리고, 뱅뱅거리는 눈알을 요란한 매미 탓으로 돌리면서 공연히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화장실로 달려가 찬 물을 끼얹고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선풍기를 끌어안아도 좀체 더위는 가시질 않는다. 그렇게 오뉴월 대청아래 개처럼 혀를 쭉 뽑아 물고서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문구를 오후 내내 멍하니 바라보던 차였다.
그때 선산 도리사 묘관 스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바람 쐬러 오세요.”
작년 여름 결제 들어갈 무렵에 잠깐 얼굴을 보았으니, 1년만이다. 조롱에 갇힌 새처럼 문자 속에서 퍼드덕거리던 차에 탈출구가 생긴 격이니, 얼씨구나 할 일이다. 간만에 지인을 보는 일인데 만사를 제쳐야지 하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쥐어주고는 당장에 책을 덮고 도리사로 나섰다.
해거름에 닿아 풋고추와 씨레기 무침으로 밥을 두 그릇이나 비우고, 드리운 발 너머로 태조선원(太祖禪院)을 바라보며 녹차에 보이차를 맛보고, 희끗한 달빛을 밟아 어슬렁어슬렁 서대로 나서 어둠으로 더욱 선명해진 산자락과 너른 해평 뜰과 낙동강을 바라보고, 산산이 불어오는 솔바람 맞으며 강바닥 파헤친 이야기, 들뜬 마음 삭이지 못한 철부지시절 이야기, 고흥에서 농사짓는 원진 스님 이야기, 속초에 토굴 마련한 응진 스님 이야기, 영광에서 노가다 하는 세명이 이야기,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인 이야기들을 주섬주섬 풀어놓았다.
그렇게 한참을 노닐다가 산을 내려오자 한결 맑아진 가슴과 머리에 남모를 기쁨이 잔잔히 스며들었다. 참 오랜 만이다. 그리 한가하게 밥 먹고, 차 마시고, 이야기하고, 오솔길을 걸은 지도 말이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일상의 행복, 아마 사찰과 숲이 베푸는 가장 큰 깨우침인 듯싶다.
‘경덕전등록’에 다음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원지 스님을 찾아와 물었다.
“무엇이 화상의 가풍입니까?”
장사꾼이건 수행자건 온갖 신고 마다않고 먼 길을 나설 땐 나름 속셈이 있다. 그것이 돈이 되었건 진리가 되었건 나름 목적을 가지고 어딘가로 가고, 누군가를 만난다. 그런 이들이 어딘가에 도착하고 누군가를 만났을 때, 가장 시급한 일은 내가 목적했던 바가 거기에 그 사람에게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해서 그 학인도 원지 스님의 창고에 어떤 보물이 들어있는지, 자신이 가진 것보다 나은지 못한지 염탐을 한 격이다.
그러자 원지 스님이 선상에서 내려오더니 여인처럼 공손하게 절을 올리며 말씀하셨다.
“고맙게도 멀리서 찾아주셨는데 대접할 게 아무 것도 없군요.”
뼛골까지 시린 석간수만큼이나 맑고 투명하며, 선선한 솔바람만큼이나 상큼하고 깊은 여운이 감도는 말씀이다. 다들 무언가를 얻지 못해 안달인 세상에서, 가진 무언가를 자랑하지 못해 안달인 세상에서, 공(空)이라는 무가보(無價寶)의 가치를 알아볼 자 몇이나 될까?
“저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두 손 탈탈 털어 보이는 자의 미소에 앞뒤로 껴입었던 갑옷을 훌러덩 벗고 품속에서 주물럭거리던 저울과 자를 부러트릴 자 몇이나 될까? 그 아득한 향기에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악취로 찌든 자신을 돌아볼 자 몇이나 될까?
공(空), 복잡한 인과관계로 얽힌 광대한 은하를 몽땅 빨아들이는 한 점의 블랙홀처럼 비밀스러운 문이다. 그 문으로 들어서면 나와 너,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마저 그림자처럼 흩어져버리는 참으로 신비로운 문이다. 그 공의 문[空門]은 어디에 있을까? 그 문으로 성큼 들어서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어느 날 한 스님이 도오 원지(道吾圓智) 스님에게 물었다.
“만 리에 구름 한 점 없다 해도 본래의 하늘은 아닙니다. 어떤 것이 본래의 하늘입니까?”
원지 스님은 멀리 시선을 던지며 말씀하셨다.
“오늘은 보리 말리기에 딱 좋구나.”
볕 좋고 바람좋은 날 다시 도리사를 찾아야겠다. 그날이 밥 먹고, 차 마시고, 불전에 예배하고, 늘어진 낙동강을 바라보며 파삭한 솔바람을 맞기에 딱 좋은 날이길 고대할 뿐이다.
[출처 : 법보신문 2012.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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