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헌의 ‘선사, 애물단지를 깨다’]
26. 유관, 눈앞의 길을 가르쳐주다
‘我’ 집착하면 道는 십만팔천리 줄행랑
집착 버리란 가르침 늘 듣는 말
번뇌 못놓고 항상 실망 되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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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를 아십니까?”
종로 3가에서 불현듯 한 청년이 길을 막고 물었다. 그가 아무나 붙들고 도를 물을 만큼 궁금증이 턱까지 차오른 자도 아니고, 곪아터진 고뇌로 괴로워하며 “누구라도 날 좀 살려주시오” 라고 아우성치는 자도 아니란 건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익히 아는 바였다. 해서 가던 길이나 재촉하고 내쳐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무척이나 바쁜 사람처럼 바닥만 쳐다보고 서너 발짝 종종걸음을 치면 대부분 포기하고 돌아서기 마련인데, 이 사람이 또 물건이다. 범죄자를 쫓는 형사처럼 달려오더니 아예 두 팔을 벌리고 길을 막아서는 거였다.
“저기, 잠깐만요. 도를 아십니까?”
하고 싶은 말이 턱까지 찬 사정이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묻지도 않는 도를 가르쳐주겠다는 선생의 연설을 고분고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해서 돌아가려고 걸음을 왼쪽으로 옮겼더니 그가 왼쪽으로 막아서고, 오른쪽으로 걸음 옮겼더니 그가 오른쪽으로 막서는 게 아닌가. ‘별로 바쁜 일이 없는 놈이란 게 탄로가 났나보다’ 싶어 속으로 웃음이 터졌다. 관상이나 보자 싶어 고개를 들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웃음까지 비치는 선선한 낯빛에 번들번들한 입술이 쉽게 포기할 기세가 아니었다. 해서 선수를 쳤다.
“시골에서 오셨나보지요. 저도 촌놈이지만 도(道)를 조금은 압니다. 요쪽으로 가면 종로 2가고, 저쪽으로 가면 종로 4가입니다.”
당당한 선지자 모습을 하던 그가 갑자기 십자가의 예수님 표정을 짓는 틈을 노려 “그럼 이만.” 하고 쏜살같이 빠져나왔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날 저녁 TV에서 그 선지자가 전파하던 도를 얻기 위해 전 재산을 바쳐 제사를 지내고, 그것도 모자라 빚까지 내고, 그러고도 정성이 부족해 직장과 가정을 팽개친 채 합숙생활을 하는 장면을 보았다. 삶이 오죽 답답하고 불안했으면 저러겠나 싶어 한편으론 이해가 가지만 저리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불쾌하게 하고, 재산을 탕진하게 하고, 아프게 해서야 되겠나 싶다.
도(道)는 길, 방법이라는 뜻이고 길과 방법은 ‘목적’을 전제로 사용되는 말이다. 즉 ‘~로 가는 길’, ‘~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 목적지에 해당하는 말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행복’이다. 따라서 “도를 아십니까?”는 “행복으로 가는 길을 아십니까?”로 바꾸어도 큰 무리는 없지 싶다. 행복의 나라로 가는 길, 기왕이면 비용도 적게 들고 빠르고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방법이 좋지 않을까? 기왕이면 그 길을 걷는 사람도 그를 바라보는 주변사람도 편안하고 흐뭇한 길이면 좋지 않을까?
그런 길이 어디에 있을까? 마조 선사의 제자인 유관(惟寬) 선사께 물어보자.
어느 날 학인이 그에게 찾아와 진지하게 물었다.
“스님, 도(道)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눈앞에 있다.”
“저는 왜 보지 못합니까?”
“자네는 ‘나(我)’가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거야.”
“제가 ‘나(我)’가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한다면, 화상께서는 보십니까?”
“‘나’가 있는데다가 ‘너’까지 있으면 더욱 더 보지 못하지.”
“그럼,‘나’도 없고 ‘너’도 없으면 보입니까?”
“나도 없고 너도 없는데 도대체 누가 보려고 한단 말인가?”
삼척동자도 아는 쉬운 가르침
찬찬히 살필 침착함 있으면 돼
무아(無我), 부처님 가르침의 처음이자 끝이다. 주체가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버리고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은 불교에 입문한 사람이면 신물 나게 보고 들은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절절히 수긍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설핏 수긍한 듯 싶다가도 역순(逆順)의 경계에 맞닥뜨리면 금세 발동하는 게 호불호(好不好)의 감정이고, 시비(是非)의 분별이고, 무성한 생각의 숲을 헤매며 겪는 우울·슬픔·번민·두려움이다. 이를 몇 차례 반복하다보면 번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하며 푸념을 늘어놓게 된다.
“부처님과 역대 성현들, 수많은 선사들이 도를 깨달아 완전한 평안을 성취했다는데 나는 왜 노력해도 도를 깨닫지 못하는 걸까?”
이럴 때, 공연히 자책하며 스스로를 괴롭히거나 다른 길을 찾겠노라며 소란을 떨기가 쉽지, ‘깨닫지 못했다고 푸념하고 있는 그놈’을 직시하기는 쉽지 않다. 유관(惟寬) 선사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도는 항상 바로 눈앞에 있다.”
유관 선사와 학인의 대화에서 단어를 몇 개 바꾸면 이렇게 될 것이다.
“스님, 저는 왜 무아를 깨닫지 못하는 걸까요?”
“무아를 깨달으려는 게 자네이기 때문이지.”
“화상께서는 깨달으셨습니까?”
“‘나’만 있어도 깨달음과 거리가 먼데 거기다 ‘너’까지 있으면 십만팔천리지.”
“그럼,‘나’도 없고 ‘너’도 없으면 깨닫게 됩니까?”
“나도 없고 너도 없는데 도대체 누가 깨달으려 한단 말인가?”
붓다의 가르침은 단 한마디라도 뿌리부터 꼭지까지 제대로 씹어야만 참맛을 알 수 있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目前事)을 규명하라고 선사들은 누누이 말씀하셨다. 그러니 번민하고 있는 나, 번민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나, 무아를 깨달으려는 나, 무아를 깨닫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나, 무아를 깨달았다고 기뻐하는 그 ‘나’의 실상이 무엇인지 주목해야만 하리라. ‘나’의 실상은 무엇일까? ‘전등록’에 다음 이야기가 전한다.
한 학인이 유관 선사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있다.”
“화상께서도 있습니까?”
“나는 없다.”
“온갖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는데, 화상만 왜 없습니까?”
“나는 온갖 중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생이 아니면 부처입니까?”
“부처도 아니다.”
“궁극적으로 어떤 물건입니까?”
“물건도 아니다.”
“보거나 생각할 수 있습니까?”
“생각으로도 미치지 못하고, 논의로도 얻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법무아, 삼척동자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가르침이다. 제법무아, 그 속으로 뛰어들면 고뇌와 행복, 부처와 중생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불가사의한 가르침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길이니 배우고 물을 일 없고, 찬찬히 살필 침착함만 있으면 되니 돈들 일도 없고, 그것만 밝히면 되니 간단하고, 살피면 살필수록 말과 행동과 생각이 맑아지고 경쾌해지니 본인에게도 주변사람에게도 유익한 길이다. 기왕이면 이런 길이 낫지 않을까?
[출처 : 법보신문 2012.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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