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公)과 사(私)는 어떻게 다릅니까?
객승이 질문하였다 .
"공(公)과 사(私)는 서로 반대되는 것입니다. 사(私)는 알겠읍니다만, 공(公)의 의미는 어떤 것인지요?"
나는 말했다.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기에 감히 그것을 논하겠읍니까? 다만 옛 사람들에게 들은 바로는, 공(公)이란 말은 바로 불조성현(佛祖聖賢)의 본심입니다. 지극히 위대하고 지극히 맑아 늠름하게 흘로 서서 천지로도 그것을 가릴 수 없고, 귀신도 엿볼 수 없는 것입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공에는 지공(至公)이 있고, 대공(大公)이 있으며, 소공(小公)이 있습니다. 지공은 도(道)이고, 대공은 교(敎)이고, 소공은 행정을 잘하는 것때〔物務〕입니다.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새벽녘에 샛별을 보고 말씀하시기를,'기이하구나. 모든 중생들이 다같이 여래의 지혜와 덕상(德相)을 구비하였구나"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성인과 범부가 신령함을 동일하게 받았다는 점을 밝히시고, 무궁토록 전하게 하였읍니다. 바로 지공의 도는 여기에 근원한 것입니다. 이윽고 300여회 동안 상대의 근기와 그릇에 따라 여러 방법으로 가르쳤던 문자와 말씀은산과 바다와 같이 넓었는데, 바로 대공의 가르침이 여기에 근본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교화가 5천축국(五天竺國)을 덮고, 부처님의 광명이 증국 땅에 들어가고 나서는 절의 살림살이가 많아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공으로써 살림살이를 잘하는 것〔物務〕입니다. 도가 아니면 교(敎)를 드러낼 수 없고, 교가 아니면 살림살이를 잘할 수 없고, 또 살림살이를 잘못하고서는도를 널리 전할수 없습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의존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모두 불조성현의 본심에서 나온 공(公)인 것입니다. 하늘이 온 세상을 두루 덮어주고, 땅이 온 세상을 받쳐주며, 바닷가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고 봄이 모든 생물을 길러주는 것은 대단히 지극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조외 공(公)이 지극함과 두루한 것에는 비교가 되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불조의 도(道)로 말하자면, 원만함은 3계(三界)를 싸고도 남고, 훤출함은 10허 (十虛)를 관철합니다. 그리하여 한 생명체라도 그것을 증오(證悟)하지 못할 까닭이 없읍니다. 또 불조의 교(敎)로 말해보면, 3승(三承) 10지(十地) 및 6도 만행(六度萬行) 등의 수행 단계를 자세하고도 널리 설명해 놓았기 때문에 한 중생도 문호에 들어가는데서 빠지지 않았습니다. 살림살이 잘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높고 큰 전각을 만들어 강당과 실내를 꾸며놓고 한 그릇의 밥을 먹을 때에도 반드시 종과 북을 울려 저숭과. 이승의 중생들을 경책하여 은택을 고르게 베풀고 덮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불조성현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속에 공(公)을 간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실로 공(公)을간직하지 못하면 흔자 있을 때는 근심만 생기고, 하는 행동마다 재앙에 빠지고 맙니다. 그리하여 궁색해지면 더욱 어리석어지고 혹 영달하치라도 하면 죄악만을 짓게 됩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3악도(三惡道)와 6도에 윤회하여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끌내 스스로 풀려날 길이 없게 됩니다. 이것은 실로 마음에 공(公)을 간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루(離婁)처럼 눈밝은 사람이라도 잘못된 길에 빠지기만 하면, 천리 밖을 아는 빼어난 지혜가 있어도 한 치 앞을 못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현들께서는 차마 교화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안락한 삶을 바라면서도 참된 안락이 공(公)에서 나오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또 복과 지혜는 사람마다 숭상하는 것이지만 복과 지혜의 근본이 되는 것이 곧공(公)인 줄은 알지 못하는 듯 합니다. 또 성현은 사람들마다 우러러보는 바이면서도 스스로가 성현이 되려면 공(公)이 바로 지름길인 줄은 모르며, 모든 사람들이 불조는 공경할 줄 알면서도 불조가 되는 데에 필수적인 것이 공(公)인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공(公)은 바로 그대로 본심입니다. 그래서 성인께서는 지공(至公)의 도를 그대로 가리켜 중생의 마음을 밝히고, 대공(大公)의 교(敎)를 베풀어서 중생의 마음을 비췄으며, 소공(小公)에 해당하는 살림살이〔物務〕를 베풀어 증생의 마음을 바로잡으셨던 것입니다. 마음과 공(公)은 비록 그 명칭은 서로 다르지만 그 본체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공(公)의 이치는 일시적인 미봉책으로써 실현되는것도 아니며,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니며, 더구나 인위적인 조작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한결같이 그대로 바로 가리켜야만〔直指〕얻을 수 있는 도입니다. 아주 진실한 마음만이 이 도에 계합될 수 있으며, 조금이라도 사량분별하면 공(公)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현은 도를 수행할 때에 조금도 위의 사실을 어기지 않았읍니다. 수행할 때에 조금도 사량분별하지 않고, 오로지 분명하고도 공명(公明)해서 억지로 조장하여 깨달음이 나타나키를 바라지 않아도, 그것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곤 합니다.
세속에서 그 공(公)을 속이는 자들은, 그 공(公)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마음은 속여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면,공(公)은 저절로 확립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교(敎)와 도(道)를 통달하고, 나아가 살림살이를 하는 것까지도 모두 공(公)에 어긋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일생을 살아가면서도, 혹 공(公)을 잘 모르고 미혹 되는 것은 나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더러는 그 공을 알면서도 고의로 위배하며, 도리어 지공
(至公)외 도를 기만하여 명예를 얻으려고도 하며, 또 소공(小公)에 해당하는 살림살이를 횡령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너무 깊이 악의 구덩이에 빠져들어가, 남들이 자기를 본받는다는 사실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런 행위는 자기 자신을 속일 뿐만아니라 남까지도 속이는 일입니다.
옛날에 조정에서 어느 사찰을 개조하여 창고로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스님이 이것을 반대하여 따르지 않자, 이 사실이 왕에게 보고되었습니다. 왕은 해당 관리에게 칼을 내주면서 은밀히 말하기를, '지금 또 항거하면 목을 쳐라. 그러나 만일 죽기를 무릅쓰고 항거하면 절을 그대로 두거라'라고 했읍니다, 드디어 그 관리가 임금께서 이 절을 창고로 고쳐쓰라고한 명령을 전하자, 스님은 웃으면서 목을 쑥내밀고 말하기를, '불법을 지키다 죽는다면 실로 시퍼런 칼날을 혀로 핥으라고 해도 달게 받겠다'라고 했답니다. 스님은 목을 내믿고서도 끌내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구차하게 억지로 그렇게 할수가 있겠습니까. 모두가 진성(眞誠)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그 마음을 추측해 보건대 어찌 절간의 살림살이에 해당하는 소공(小公)만이겠읍니까. 교(敎)와 도(道)에도 깊은 깨달음이 있는 스님이 분명합니다.
수(隋)나라의 태수(太守)였던 요군소(堯君素)가 명령하기를, '모든 승려들은 성곽에 올하가서 부역을 하라. 감히 이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겠다'라고 했읍니다. 이 때에 도손(道遜)이라는 스님이 태수한테 가서 항어하자, 요군소가 도손스님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르기를, '스님께서는 담력과 기상이 대단히 씩씩하십니다'라고 말하며, 마침내 부역을 그만두게 했읍니다. 이것은 대공(大公)에 해당하는 교(敎)를 지키기 위하여 창칼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찌 구차하게 억지로 그랬겠읍니까.
동산 연조(東山演祖)스님의 편지를 대략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금년 여름에는 모든 들판에 가뭄이 들어 손해를 많이 보았읍니다만, 나는 그것을 조금도 근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 대중 스님들이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라는 화두를 들고 있는데, 하나도 깨치는 사람이 없을까봐 오히려 그것이 근심일 뿐입니다'라고 했읍니다. 연조스님께서는 지공(至公)의 도에 항상 뜻을 두어, 늘 그것을 걱정하며 잠시라도 그것을 잊지 않았었읍니다. 그러니, '모든 돌판에서 가뭄으로 손해본 것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한 까닭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소소한 살림살이야 지극한 도에 비교한다면, 그 근심이야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
절〔僧園〕의 살림살이는 교(敎)를 일으키고 도(道)를 전하는 데에 그 필요성이 있읍니다. 교가 널리 퍼지지 못하고도가 후대에 전수되지 않는다면, 나를듯한 누각이며 용솟음치는 듯한 전각이며 남아도는 황금과 곡식이 대천세계에 가득하다 해도 공(公)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교와 도의 허물만 늘어나게 할 뿐입니다. 공(公)이 제대로 드러나느냐 못드러나느냐는 오직 불법이 융성하느냐 아니면 침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조심하지 않겠으며, 어찌 삼가하지 않겠읍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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