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청정하고 소박한 행[淸素之行]
청정하고 소박한 행[淸素之行]
1. 재회를 열지 않다[不作齋會]
송(宋)나라 때 승민(僧旻)스님은 7살에 출가하여「성실론(成實論」, 「반야경(般若經)」, 「승만경(勝鬘經)」, 「십지경(十地經)」 등의 이치에 밝아 나라에서 으뜸이었으므로, 세상에서는 그를 민법사(旻法師)라 부르며 존경하였다. 또한 절을 보수하고 경전과 불상을 조성하며, 방생과 보시를 베풀음에 게으름이 없이 정성스럽게 행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이제껏 닦으신 공덕이 많습니다만 많은 대중을 청하여 음식을 베푸는 대재회(大齋會)를 여신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복 짓는 일이 원만하지 못할까 염려스럽습니다."
스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대재(大齋)로는 불법을 다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우선 쌀, 채소, 소금, 초, 땔감, 끓는 물, 숯을 소비해야 하는데,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밟고 씻고 지지느라 작은 벌레를 죽이기도 하고 상하게도 하기 때문에 열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것을 준비하느라 왕궁 · 관청이나 세력 있는 집안에 의지하려 할 경우에는 그 본래의 뜻을 다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그만두느니만 못합니다."
이에 찬탄하노라.
요즈음 사람들 복 하나 지으려면
으례껏 재회열고 원만한 복 닦는다 하네.
빗장문 걸어닫고 참선하는 납자조차
반결제 지나면 밤낮없이 돌아다니며
재회준비 거드느라 다시는 정념(正念)이 없네.
법사의 말씀은 참으로 만세의 귀감이로다.
2. 시주를 받는대로 나누어 주다[受施隨散]
양(梁)나라 때 혜개(慧開 : 469~507)스님은 오군(吳郡) 해염(海鹽) 사람이다. 일찌기 장(藏)법사와 민(旻)법사 두 분에게서 경론을 차례로 듣고서 강연(講演) 잘하기로 당대에 명성을 날렸다.
예장(豫章) 군수 사혜(謝譿)가 스님께 경전을 강설해 주시기를 청하면서 예물로 사례금을 후하게 드렸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예장군 읍에 도착하지도 않아서 이미 다 나누어주고 말았다. 어느 때 진안(晉安) 군수 유엄(劉業)이 시주금 만(萬) 냥을 보내주었는데 스님은 즉시 가난하고 측은한 사람을 위해 하루도 못 되어 다 보시하였다. 또한 스님의 성품(性品)은 소탈하고 너그러워서 외형적인 모양 꾸미기를 싫어하였는데 의복에 때가 절었어도 빨래할 생각을 낸 적이 없었다.
찬탄하노라.
법을 강론하면서
돈을 보내도 자기가 갖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법시(法施)로다.
아! 어찌하면 사람 사람이
법보시를 스님처럼 할 수 있을까!
3. 벌레 울고 티끌 쌓이다[蟲嗚塵積]
양(梁)나라의 도초(道超 :467~502)스님은 영기사(靈基寺) 민법사를 따라 수학하였다. 스님은 방에 홀로 살면서 손님은 물론 도반까지도 물리쳤다. 청소를 하지 않아서 티끌은 방안에 가득하고 귀뚜라미는 벽에서 울었다.
중서랑(中書郞) 장솔(張率)이 찾아 와 말하기를,
"벌레 우는 소리는 귀가 따갑고 먼지는 쌓여 무릎이 묻힐 지경입니다. 어찌 이것을 마주하고도 마음에 거슬림이 없읍니까?"
하니, 스님이 답하였다.
"때로 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면 피리소리를 듣는 듯하고 티끌이 바람 따라 날아와도 아직 청소할 겨를이 없었소. 다만 그대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였다니 부끄러울 뿐이오."
이에 장솔이 크게 탄복하였다.
4. 좌계에 은둔하다[左溪遁跡]
당(唐)나라 현랑(玄郞 :674~754)스님은 부대사(傅大士)의 6대 법손이다. 항상 두타(頭陀)행 닦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시냇가 굴속에 편안히 살았으므로 좌계존자(左溪尊者)라고 불렸다. 한 간 굴에서 편안히 살면서 그 곳을 스스로는 넓은 법계라 여겼으며, 법복 한 벌로 40여 년을 입었고 좌복 하나로 평생토록 바꾸지 않았다. 경전을 볼 때가 아니면 초 한 자루도 가벼이 켜지 않았으며, 부처님께 예불하지 않을 때면 한 걸음도 망령되게 걷지 않았다. 발우를 씻으면 뭇 원숭이들이 다투면서 발우를 받들었고, 경을 소리내어 읽으면 뭇 새들이 날아와 그 소리를 들었다.
자사(刺史) 왕정용(王正容)이 누차 성에 들어오시기를 청하였으나 스님은 끝까지 병을 핑계하면서 사양하였다.
찬탄하노라.
요즈음 사람들은 영가스님의 답장만 읽고서
현랑스님을 멸시하여 치우친 태도라 몰아부치니,
그 답장이 집착을 떨어주려는
일시적인 비판임을 알지 못한 소치이다.
좌계존자가 남긴 모범은
참으로 납자들의 당면 문제니
눈 밝은 이는 살필 일이다.
5. 돈을 떨어뜨려도 돌아보지 않다[遺錢不顧]
수(隋)나라 부상(富上)스님은 익주(益州) 정덕사(淨德寺)에 머물고 있었다. 스님은 큰 삿갓을 길 옆에 걸어놓고 그 아래 앉아서 경전을 읽었다. 사람들이 왕래하여도 시주하라 고 권하지도 않았으며, 혹 시주자가 있다 해도 특별히 축원해 주지도 않았다. 길에 다니는 사람이 없어 조용하였으므로 여러 해 동안을 지나도 모아 놓은 것이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의 서북쪽에는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니 보시가 많을 것인데 어찌하여 여기에 계십니까?"
하니, 스님이 답하기를,
"한두 푼이면 한 몸 살아가기에 충분한데 많은 돈이 무엇에 필요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능주자사(陵州刺史) 조중서(趙仲舒)는 3대째나 내려오는 탐혹한 관리었다. 그는 신심이나 존경심이 없었기에 스님의 소문을 듣고 일부러 가서 시험하였다. 말을 타고 스님 앞을 지나면서 거짓으로 돈꾸러미를 떨어뜨렸으나 부상스님은 태연자약하게
독경을 하며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멀리 가 있다가 조중서가 사람을 보내 돈을 집어오게 할 때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조중서가 스님에게 다가와 묻기를,
"그대는 종일토록 얻는 것이 겨우 한 푼인데, 땅에 떨어진 돈 꾸러미를 남이 집어가는 것을 보고도 어찌 막지 않는가?"
하니,
"내 물건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망령된 욕심을 내겠는가?" 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조중서는 말에서 내려와 인사하고 탄복하며 물러갔다.
6. 의복과 양식을 쌓아두지 않다(不畜衣糧)
당(唐)나라 통혜(通慧)스님은 나이 30세 출가하여, 태백산으로 들어가 시주를 받지 않고 살았다. 배고프면 열매를 따먹고 목마르면 흘러가는 시냇물을 마셨으며, 피로하면 나무에 기대어 쉬었다. 그렇게 앉으나 서나 화두를 참구하여 5년을 지냈다. 하루는 나무토막으로 흙덩이를 쳤는데 흙덩이가 깨어져 형체가 흩어지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만년에도 옷 한 벌, 이불 한 채뿐이었으며, 삼[麻]으로 엮은 신을 20여 년이나 신었고, 베옷 누더기는 겹겹이 기웠으며 겨울이나 여름이나 바꿔 입지를 않았다.
7. 보시받은 것을 기억하지 않다[䞋施不憶]
당(唐)나라 정림(靜琳 : 583~640)스님은 경조군(京兆郡) 화원(華原) 사람이다. 도풍(道風)이 널리 알려져서 보시물이 매일 같이 들어오는데 이를 모두 시자에게 맡겨버리고는 두 번 다시 묻는 일이 없었다. 뒤에 불사를 하려 할 때에서야 재산이 없음을 한탄하자, 시자가 그 보시물을 내 놓았다. 정림스님은 놀라며,
"도대체 이것이 어디에서 생겼는가? 나에게는 기억조차 없는데" 라고 하였다.
스님은 평생토록 옷이 헤지면 종이로 꿰매 입는 철저한 두타행을 실천하셨다.
8. 문을 닫지 않다[門不掩閉]
당(唐)나라 지측(智則)스님은 옹주(雍州) 장안(長安) 사람이다. 성품이 소탈하여 얽매이지 않았으며 항상 헤진 누더기를 입었는데, 아래 옷은 무릎 위까지 올라와 있었다. 거처하는 방에는 겨우 침상 하나와 흙발우, 나무수저 이외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다. 방에 거처하면서 문을 닫지 않았으니 대중들은 그를 미치광이라고 하였다.
스님은 이렇게 탄식하였다.
"남을 미치광이라고 하는 사람은 자기가 미치광이임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출가하여 세속을 떠났음에도 의복과 음식 등 일상생활에서 가리고 막을 것이 있어, 문에는 자물쇠를 채우고 상자는 단단히 봉함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고 어지러이 업(業)을 짓는다. 또한 갖가지를 거두어 모으는 수고로움으로 편안하지 못하다. 이를 두고 미치광이라 하지 않는다면 미치광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으리라,"
9. 시종으로 의심받다[人疑僕從]
당(唐)나라 승원(承遠)스님은 처음 성도(成都)에서 수학하였고, 그 후에는 형산(衡山)의 서남쪽 바위굴에서 거처하였다. 사람들이 음식을 보내주면 먹고 보내주지 않으면 풀이나 나무열매를 먹을 뿐이었다.
그의 높은 도를 흠모하는 사람이 하루는 벼랑의 골짜기로 찾아갔다. 깡마른 몸, 때낀 얼굴로 땔감을 짊어진 사람을 만났는데 시종하는 사람이라고 여겨 소홀히 대하고 그 사람이 바로 승원스님인 줄을 몰랐다. 대종(代宗)황제가 그의 명성을 듣고 , 그 고을을 반주도량(般舟道場)이라고 이름지어 하사하였다. 세상에서는 그를 염불종의 3조(三祖)라 부른다.
찬탄하여 한 마디 붙인다.
띠풀을 얽어 지은 요임금의 궁궐을 촌집인가 의심하였고
의복이 남루했던 우임금의 모습을 촌사람인가 의심하였네
하물며 발우와 누더기로 몸을 지탱하는 불제자에 있어서랴
요즈음 사람들은 사치스런 복식에 물건까지 쌓아두고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까 염려하며
의기양양하게 마을을 지나가는 이가 있으니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해야 하리라.
10. 연잎 옷을 입고 솔잎을 먹다[荷衣松食]
당(唐)나라의 대매 법상(大梅法常 :752~839)스님은 마조스님께서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깨달았다. 그리고는 깊은 산에 은거하였으므로 그를 아는 이가 없었다.
하루는 그의 도를 존경하던 염관(鹽官)스님이 편지로 초청하니, 사양하고 가지 않으면서 게송을 부쳐 이렇게 말하였다.
못 가득한 연잎에 옷 걱정 없고
몇 그루의 솔잎 음식 넉넉했었네.
이제는 내 사는 곳 알려졌으니
이 띠집도 버리고 더 들어가 살아야겠네.
11. 사슴과 새를 벗으로 하다[鹿鳥爲侶]
후주(後周)시대 행인(行因)스님은 여산(廬山) 불수암(佛手巖)에 은거하여 살았는데
밤이 깊어질 때마다 한 마리의 사슴과 꿩이 돌집 곁에서 깃들어 쉬었다. 그렇게 오래됨에 자연히 친구처럼 길들여졌으므로 의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스님은 평생제자를 받지 않았고 이웃 암자의 스님이 보살펴드렸다.
하루는 말하기를,
"발을 걷어 올려라. 내가 떠나련다."
고 하였다. 그래서 발을 걷어 갈고리에 걸자, 침상을 내려와서 몇 걸음을 걸어가다가 우뚝 선 채로 돌아가셨다.
이에 찬탄하노라
욕심 많은 사람은 죽으려 하면
욕심은 더욱더 간절해진다.
심하면 향도 팔고 짚신도 팔면서
전전긍긍 애착을 놓지 못한다.
단순히 세상 사람뿐만 아니라
부처님 제자도 이런 사람이 있도다.
스님은 일생동안 맑은 기상이
사람을 감동시켰고
노니시듯 돌아가시니
과연 이래야 하지 않겠는가
12. 욕심을 적게 하여 만족할 줄 알다[少欲知足]
송(宋)나라 굉각(宏覺):1240~1132)스님이 대중에게 훈계하셨다.
"그대들은 이미 출가하였으니 감옥에서 풀려 나온 죄수와 같다. 욕심을 적게 하여
만족할 줄 알아서 세상의 영화를 탐내지 말라. 배고픔과 목마름을 참고 무위도(無爲道)에 뜻을 두라. 불법을 만났으니 열 번 아홉 번 죽었다 깨어나도 포기 하지 말라."
13. 청정한 규약으로 대중을 가르치다[誨衆淸約]
송(宋)나라 자수 회심(慈受懷深 : 1077~1132)스님은 제자들과 문답을 나누는
소참(小參) 때에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명리를 잊고 담박(談薄)함을 달게 여기라. 세간의 마음이 적어지면 도의 마음[道念]은 자연히 농후해진다. 변담삼(匾擔山)스님은 일생을 도토리와 밤을 주어 먹고 살았으며, 영가(永嘉)스님은 호미로 가꾼 채소를 먹지 않았으며, 고승인 혜휴(惠休)스님은 신 한 켤레로 30년을 신었으며 그것도 부드러운 땅이면 맨발로 다녔다. 그대들은 지금 갖가지를 받아 쓰고 있으며, 배고프지도 않은데 먹고 춥지도 않은데 입으며, 더럽지도 않은데 씻고 잠이 오지도 않는데 잔다. 도안(道眼)이 아직 밝지 않고 번뇌가 아직 다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를 소화할 것인가?"
14. 누더기옷에 한 끼만 먹다[衲衣一食]
송(宋)나라 혜희(慧熙)스님은 혼자서 살 뿐, 시중 드는 사람을 두지 않았다. 날마다 한 끼만 먹고 다른 사람의 시주를 받지 않았으며, 방으로 가는 길엔 한 가닥 왕래하는 자국뿐이며 나머지는 모두가 이끼로 덮여 있었다. 걸상도 중심부에만 앉아서 양쪽은 오래 비워둔 것처럼 티끌이 쌓여 있었다.
의복은 헤지고 더러워서 바람과 한기를 겨우 면하였다. 겨울에는 떨어진 누더기를 입고 여름이면 들보 위에 높이 걸어 두었다. 어떤 사람이 스님의 명성을 듣고 방에 가서 참배하려면 며칠을 기다려야 뵐 수가 있었다.
15. 홀로 사관을 지키다[獨守死關]
원(元)나라의 고봉 원묘(高峯原妙 : 1238~1295)스님은 용수산(龍鬚山)에 9년간 살면서 싸리를 엮어 조그마한 암자를 만들고 겨울이나 여름이나 누더기 한 벌로 지냈다. 후에 천목산(天目山) 서암(西巖)의 바위 동굴 속에 배 모양의 조그마한 방을 꾸미고 현판[榜]에는 '사관(死關 : 죽음의 관문)'이라고 써 붙였다.
위에서는 빗물이 새고 바닥은 축축하며, 바람과 비가 몰아쳤다. 공양물과 시자를 끊고 의복과 쓸 것을 물리치며 몸을 씻지 않고 머리도 깎지 않았다. 깨진 항아리를 솥으로 하고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지내면서도 편안하게 여겼다. 동굴은 사다리가 없으면 오르지 못하므로 사다리를 치워버리고 인연을 끊었다. 비록 제자일지라도 스님을 우러러 뵌 사람이 드물었다.
찬탄하노라.
동굴은 하늘 높이 걸렸고
절벽은 만 길이나 솟았다.
희공(熙公)이 살더니
고봉스님이 머무셨구나.
참으로 멀리 티끌세계를 끊었네.
지난날 나는 천목산에 올라 장공동(張公洞)에 들어가보고 천길 바위 끝에 나아가 굽어보며 "사관(死關)'의 유적을 찾았다. 스님의 위엄스러운 모습이 황홀히 눈에 어렸다. 내 늦게 태어나 스님의 가르침을 친히 받지 못함을 슬퍼하니 눈물이 오랫동안 흘렀다.
총 평
비구란 중국말로 걸사(乞士)라고 한다. 청정하게 스스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러나 많은 물품을 구하여 모아 두고 많은 일을 벌리니, 사실은 그 이름과 반대되는 것이 아닌가. 승민(僧旻)스님 이하의 여러 스님들께서 수천년 동안에 남긴 자취가 없어지지 않았는데, 그 차취를 듣고도 분발하지 않으니 어찌 비구하고 할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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