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치문숭행록緇門崇行錄

제 2장 엄숙하고 바른 행(嚴正之行)

쪽빛마루 2014. 12. 7. 14:38

제 2장 엄숙하고 바른 행[嚴正之行]

 

 

엄숙하고 바른 행[嚴正之行]

 

 

1. 비구니를 상대하지 않다[禁拒女尼]

 

 수(隋)나라 영유(靈裕 :518~605) 스님은 정주(定州)사람이었다.

 대중에게는 편히 두 채(堂)를 쓰도록 하였으나 자신은 검소히 하여 살림살이를 갖추어 놓지 않았으며, 언행이 방자한 자는 물리쳐 버렸다. 특히 비구니에게는 결코 계(戒)를 주지 않고 설법 할 때에만 들어와 듣게 하였는데, 그 때에도 뒤에 들어오고 먼저 나가게 하였으며 자기 방에는 문턱에도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사미니가 비구니 구족계를 받를 경우에도 반드시 다른 스님을 증명법사로 세우고 오직 그 때에만 계단(戒檀)에 서게 하였다.

 평생 베옷 한 벌로 살았는데 긴 겉옷은 무릎까지 올라갔으며 옷소매와 바지통은 다 떨어져 겨우 몸을 가릴 정도였다. 그리고 분수에 맞지 않게 입는 자를 보면 대중 앞에서 찢어버렸다.

 

 

2. 어려서부터 실없이 노는 일을 끊다(幼絶戱棹)

 

 당(唐)나라 현장(玄奬 :602~664)스님의 성은 진씨(陳氏)로 한(漢)나라 태구공(太丘公)의 후손이며, 형 진소(陳素)를 따라 출가하였다. 나이 11살에 「유마경(維摩經)」, 「법화경(法華經)」을 외웠으며, 탁월하게 굳세고 방정하여 당시 무리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사미(沙彌)들이 심한 말로 떠들며 노는 것을 보고서,

 "경전에서 말씀하지 않았던가? 무릇 출가한 사람은 무위법(無爲法)을 닦아야 한다고. 어찌 이제 어린아이의 장난을 하랴. 인생 백년을 부질없이 보낸다 하겠다."

하셨다. 식견 있는 사람들은 스님의 도량이 평범하지 않음을 알았다.

 

  찬탄하노라.

 

  어린 나이에 성대한 덕을 갖춤은

  하늘에서 그에게만 내린 훌륭함이 아니라

  생각컨대 숙세(宿世)의 수행을 잊지 않음이니

  이것을 안다면

  바로 내생을 준비할 수 있으리라.

 

 

3. 시자를 엄중하게 훈계하다[嚴訓侍者]

 

 당(唐)나라 지정(智正 :559~639)스님은 정주(定州) 안희현(安喜縣) 사람이다. 개황(開皇) 10년에 칙명을 받들어 승광산 (勝光山) 인수사(仁壽寺)에 머물렀었다. 다시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로 들어가 연법사(淵法師)와 도반이 되어 28년간을 일체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스님에게는 지현(智現)이라는 제자가 있어서 항상 법과 가르침을 받들었다. 스님이 저작할 것이 있어 단정히 앉아서 생각을 하면, 지현스님은 종이와 붓을 잡고 서서 시중을 들며 말씀하시는 대로 써나갔다. 몇 년 동안 처음부처 자리에 앉기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하루는 발이 굳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땅에 엎어져버렸다. 그러자 스님은 꾸짖으며 말하였다.

 "옛 사람은 한 발만 딛고 칠일 동안 서서 정진하였다는데 지금 네가 서자마자 자빠진 것은 의지가 굳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엄격함이 이러하였다.

 

  찬탄하노라.

 

  땅에 엎어져도 오히려 꾸짖음을 더하니

  너무 심하다 하지 않겠는가.

  아아!

  옛사람들이 몸을 잊고 법을 위함이여.

  혜가대사는 허리까지 눈이 쌓이도록 서 있었고

  정자(程子)의 제자들은 눈이 석 자나 쌓이도록 서 있었으나

  이보다 더하지는 못하리라.

  요즈음 앉아서 도(道)를 논의 하면서도

  여전히 게으르고 싫증내는 이가 있다.

  스승이 엄해야 도가 높아진다는 말이 폐지된 지 오래이구나

  슬프다.

 

 

4. 술그릇을 깨뜨리다[破壞酒器]

 

 당(唐)나라 현감(玄鑑)스님은 택주(澤州) 고평현(高平縣) 사람이다. 성품이 온후하고 강직하여 잘못된 일을 보면 반드시 면전에서 잘못이라 지적하며 어떠한 압력에도 피하지 아니하였다. 절을 수리하고 짓는 일이 자주 있어 기술자들이 많았으므로, 혹 그들에게 술을 보내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 때마다 말리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절은 반드시 법답게 지을 것이다. 차라리 절을 짓지 않을지언정 술 마시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다."

 한때 청화사(淸化寺)에서 불전(佛殿)을 수리하였다. 그 주(州)의 호족(豪族)인 손의(孫義)란 사람이 술 두 수레를 보내 오자 스님은 즉시 술독을 깨뜨려버리니 술이 흘러 땅 위에 질퍽하였다. 손의가 크게 성내어 다음날 그에게 괴로움을 주리라 생각 하였으나 그날밤 꿈에 어떤 사람이 칼로 찌르려 덤비는 것을 보고, 이에 잘못을 깨닫고서 몸소 나아가 참회하였다.

 

  찬탄하노라

 

  요즈음 일꾼을 먹이는 데 술뿐만 아니라 고기까지 준다.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안치하는 상량식에는

  귀신에게 푸닥거리하고 손님들에게 잔치까지 하며

  또 다시 정원(丁垣: 유명한 도살장이) 의 칼날을 붉게 한다.

  천당을 가기 전에 지옥부터 이룬다는 말이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

  절 짓고 수리하는 이는

  뼈아픈 훈계로 삼아야 하리라.

 

 

5. 여자와 대면하지 않다[不面女人]

 

 당(唐)나라 도림(道琳)스님은 동주(同州) 합양(郃陽) 사람이었다. 35세에 출가하여 태백산 깊은 바위굴로 들어가 살았다. 그 후 나라의 명으로 대흥국사(大興國寺)에 머물렀으나 잠시 있다가 양산(梁山) 남쪽으로 도망가벼렸다. 평생토록 검소한 생활을 본분으로 삼았으며 여자는 마음을 더럽히는 근본이라 여겨서 일생 동안 만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설법을 하지도 않고 음식을 받지도 않았으며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돌아가실 때조차도 병문안 오는 사람이 있으면 장막 너머로 보아 미리 알고는 멀리서 막아 대면하지 못하게 하였다.

 

  찬탄하노라.

 

  부처님의 율장(律藏) 중에도

  설법이라면 여인에게도 허락하셨으나

  다만 이빨을 보이지 말 것이며

  많은 말을 하지 말라 경계하셨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설법조차 안하셨으니

  잘못된 일 바로잡음이 지나치다 하겠다.

  그러나 경박해진 말세 풍조에서는

  여인에게 설법 안함이 걱정거리가 아니라

  설법하느라 물드는 일이 걱정일 뿐이다.

  이러한 스님이라면 진실로

  뒷사람의 모범되기 충분하리라.

 

 

6. 법당을 힘써 호위하다[力衛殿堂]

 

 당(唐)나라 혜주(惠主)스님은 시주(始州) 영귀현(永歸縣) 사람으로 오로지 율학(律學)에 정진하며 청림사(靑林寺)에서 살았다. 그 때 능양공(陵陽公)이 익주에 부임하였는데 처음부터 신심이 적었다. 100여 마리의 짐 실은 말을 끌고 절로 들어와서 불전 · 강당 · 승방에 매어 두었으나 감히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혜주스님이 채소밭에서 돌아와 그 더러운 꼴을 보고는 방에 들어가 석장(錫杖)과 옷 3벌을 가지고 나오면서 탄식하였다.

 "죽든 살든 오늘은 결판을 내겠다."

 그리고는 석장으로 노새를 가리키니 모두 시체처럼 자빠졌다. 스님이 손을 높이 들어 노새를 구덩이 속으로 던져버리니 고을의 관리들이 크게 놀랐다. 관리들이 혜주스님을 잡아놓고 상황을 보고하니 능양공은 기뻐하며 말하였다.

 "율사(律師) 덕분에 나의 간탐(慳貪)을 부수었으니 매우 큰 이익이로다."

 그리고 침향 10근과 명주10단(十段)을 보냈으며, 후에 서울로 돌아가서는 보살계를 받았다.

 

 

7. 무례한 비구니를 쫒아내다[檳黜豪尼]

 

 당(唐)나라 혜만(慧滿)스님은 옹주(雍州) 사람으로 7세에 출가 하였다. 뒤에 나라의 명으로 홍제사(弘濟寺)에 머물렀는데, 그 때 증과사(證果寺) 비구니 하나가 대궐에 드나들면서 비구절을 빼앗아 자기 암자로 만들어버렸다. 혜만스님은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그 비구니를 쫓아내었다. 그러자 비구니는 동궁(東宮: 왕자궁)에 호소하였고, 끝내 첨사(詹事) 두정륜(杜正倫) 등이 파견되어, 쫓아낸 일을 해명하라 하였다. 혜만스님이 법도를 고집하며 따르지 않자 대중들은 화가 미까 두려워하여 드디어는 억지로 해명하였다. 스님은 탄식하며 불쾌한 나날을 보냈다. 뒤에 그 비구니가 스님께 와서 사과하였으나 끝내 쳐다보지도 않았다.

 

 

8. 선서(仙書)를 받지 않다[不受仙書]

 

 당(唐)나라 법상(法常)스님은 양양(襄陽) 사람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영민하며,

납의(衲衣)와 바랑과 발우만으로 살았으며, 아침공양만을 하였다.

 정원(貞元) 연간에 천태산에서 매산(梅山)으로 갔는데, 매산은 매복(梅福)이 옛날에

은거 곳으로, 스님은 그곳에 거처를 잡았다.

 하루는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 이 돌창고 속에는 성스러운책 이있으니 그것을 받는 사람은 세상의 주인이 되거나 제왕(帝王)의 스승이 될 것이다."

 법상스님이 말하였다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옛날 승조(僧稠)스님은 선경(仙經)을 돌아보지 않자 그 책이 스스로 없어졌다고 한다. 나는 오직 열반을 즐거움으로 삼을 뿐이다."

 이에 신인(神人)이 탄복하였다.

 

 

9. 문을 닫고 자식을 거절하다[闔門拒子]

 

 당(唐)나라 종간(從諫)스님은 남양(南陽) 사람으로 어른이 되어 출가하여 오묘한 도리를 담박에(頓) 깨쳤다. 회창법란(會昌法亂: 841~846) 때 황보씨(皇甫氏)의 별업사(別業寺)에 잠시 은거하였다가 대중 초년(大中初年:847)에 불교가 원상으로 복구되자, 이 때 옛날 살던 낙읍(洛邑)으로 돌아갔다.

 한번은 그의 아들이 광릉(廣陵)에서 아버지를 찾아왔다가 마침 원문(院門)에서 마주치게 되었는데, 자기 아버지인 줄을 알아보지 못하고는

 "종간 스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하고 물으니 그는 동쪽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아들이 떠난 뒤,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으니 애정을 끊음이 이러하였다.

 

 

10. 조서(詔書)에 항거하며 굴복하지 않다[抗章不屈]

 

 당(唐)나라 지실(智實)스님이 낙양 근처에 살 때였다. 태종이 낙양에 행차하여 도사(道士)들이 승려들의 앞에 자리하도록 조서를 내렸다. 서울과 시골의 사문(沙門)들이 항의하였으나 당국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실스님은 황제가 탄 가마를 따라가며 표문(表文)을 아뢰고 그 잘못된 점을 끝까지 주장하였다. 황제는 재상 잠문본(岑文本)으로 하여금 설득하여 돌려보내게 하였다. 지실스님이 고집하여 조서를 받들지 않자 황제가 진노하여 스님을 조당(朝堂)에서 매를 때리게 하고, 속복을 입혀 밖으로 유배케 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가 진퇴(進退)를 헤아리지 못하였다고 나무라자, 스님은

 "나도 처음부터 형세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끝까지 다투었던 까닭은 후세에 대당(大唐)에 스님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함 때문이었다."

하니, 이말을 들은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11. 마음을 방비하여 허물을 떠나다[防心離過]

 

 송 (宋)나라 변경(汴京)땅 선본(善本 : 1035 ~1109)스님은 동씨(董氏)로 한(漢)나라 중서(仲舒)의 자손이다. 여러 분야의 학문에 박식 통달하였으며, 원조 종본(圓照宗本) 스님에게 출가하였다. 철종(哲宗) 때 법운사(法雲寺)에 머물렀으며 대통(大通) 이라는 법호를 하사받았다.

 평소 몸가짐은 앞만을 직시하고 눈을 깜박이지 않았으며, 30년을 대중과 함께 하면서 단 한번도 실없이 웃는 일이 없었다. 또한 자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불 · 보살님의 입상이 보이면 감히 앉지 않았다. 채소나 과일이라도 무슨 고기 무슨 생선의 이름자가 들어간 것이면 먹지 않았으니, 마음을 조심하여 잘못을 떠난 일들이 이러하였다.

 휘종(徽宗) 대관(大觀) 3년(1109) 12월 갑자(甲子)일, 홀연히 사람들에게 3일만 더 머무르겠다 하시더니, 이윽고 열반하는 자취를 보이셨다. 사람들은 종본(宗本)스님과 선본(善本)스님을 놓고 대본(大本), 소본(小本)이라 부른다.

 

  찬탄하노라.

 

  마음 방지하기를 이렇게나 하였으니

  옛날 같았으면 성현이라 하였겠지만

  지금은 그저 괴짜라고만 하는구나

  슬프다.

 

 

12. 밤새도록 참선하다[終夜拱手]

 

 송(宋)나라 원통 거눌(圓通居訥: 1010~1071)스님은 정(定)에 들 때마다, 처음에는 편안히 차수(叉手)하였다가 한밤중이 되면 점점 가슴까지 손이 올라갔다. 시자는 항상 새벽닭이 울때까지 그런 모습을 보곤 하였다.

 

 

13. 세속 일을 담론하지 않다[不談世事]

 

 송(宋)나라 광효 안(光孝安)스님이 청태사(淸泰寺)에 머물고 계실 때, 선정(禪定)에 들어간 상태에서 두 스님이 기둥에 기대어 서로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천신(天神)이 호위하고 경청하더니, 한참 있다가는 뿔뿔이 흩어져 가버렸다. 다음에는 악한 귀신이 침을 뱉고 욕을 하더니, 마침내는 두 스님의 발자취까지 쓸어버렸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두 스님이 처음에는 불법(佛法)을 의론하더니 다음에는 오랫만에 만난 안부를 물었으며. 끝으로 세속적인 살림살이에 대해 얘기했기 때문입니다."

 안스님은 이로부터 종신토록 세상일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찬탄하노라

 

  옛사람은 생사를 위해 행각하였다.

  스승과 도반을 만나기만 하면

  쉬지 않고 힘써 이 일을 의론하였다.

  어느 겨를에 다른 것을 논의하였겠는가?

  요즈음 사람들은 종일토록 잡담만 하니

  위 두 스님 정도도 만나보기 힘들다.

  귀신이 곁에 있다면 또 어떻게 해야 하리오.

  아아! 두렵구나.

 

 

총 평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6화(六和)* 를 출가자 (僧)라 하며, 그들은 인욕을 닦으므로 엄격함을 취할 필요는 없다."

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말하는 엄격함이 혹독한 엄격함이 아니라 바른 엄격함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엄격하고 바름으로써 마음을 다스린다면 심지(心地)가 단정해지고, 엄격하고 바름으로써 법을 지키면 불법이 서게 된다.

 만약 잘난 점을 나타내어 칭찬을 요구하고, 흉폭함을 드러내 위엄스러움을 보이는 경우는 내가 말하는 엄정함과는 실로 천지차이니 납자라면 분별해야 한다.

 

 

 

* 6화(六和) : 승(僧)이란 화합을 뜻하니 여섯 가지 행동을 같이 함으로써 성취한다. 이를 6화경(六和敬)이라고도 한다

1. 신화경(身和敬) : 예배 등의 신업(身業)을 같이한다.

2. 구화경(口和敬) : 찬불, 염불 등 구업(口業)을 같이한다.

3. 의화경(意和敬) : 신심 등의 의업(意業)을 같이한다.

4. 계화경(戒和敬) : 계법(戒法)을 같이한다.

5. 견화경(見和敬) : 불교 이론에 대해서 견해를 같이한다.

6. 이화경(利和敬) : 옷과 음식 등의 이익을 같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