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임간록林間錄

43. 인연을 알고 잘 쓴 스님/ 혜명(慧明)스님

쪽빛마루 2015. 1. 12. 09:06

43. 인연을 알고 잘 쓴 스님/ 혜명(慧明)스님

 

 법안(法眼)스님의 법제자 가운데 혜명(慧明)스님이란 분이 있었는데 지견(知見)이 몹시 고고하여 많은 총림을 하잘것없이 여겼다. 처음 대매산(大梅山)의 암자에 있을 무렵, 어느 스님이 찾아오자 그에게 물었다.

 “요사이 어디에서 이곳으로 왔소?”

 “성도(城都)에서 왔읍니다.”

 “스님은 성도를 떠나 이 산에 왔으니, 성도에는 스님 한 사람이 부족하고 이 곳에는 스님 한 사람이 남게 되었다. 남으면 마음 밖에 법이 있고, 부족하면 심법이 두루하지 못하니 이 도리를 말할 수 있거든 이 곳에 머물고 모르겠거든 당장 떠나가라!”

 그 스님은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

 또 천태산(天台山)으로 옮겨 살 때, 그 곳에는 언명(彦明)스님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뛰어난 기변을 자부했던 인물이다. 그가 스님을 찾아오자 스님은 그에게 물었다.

 “이 곳에 덕 있는 옛분 중에 깨친 스님이 있었는가?”

 “있습니다.”

 “한 사림이 진리를 깨쳐 근원으로 돌아가면 시방 허공이 모두 없어진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어 천태산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지금 천태산이 저렇게 우뚝한데 어떻게 저것을 없앨 수 있겠는가?”

 언명스님은 눈이 휘둥그래져 멍하니 스님을 바라보다가 도망가 버렸다.

 또한 여러 노스님에게 물었다.

 “설봉(雪峯)스님의 탑명(塔銘)에 ‘인연따라 생겨난 것[有]은 처음과 끝이 있어 마침내 부서지지만 인연따라 생긴 것이 아니면 영겁토록 단단하다’고 하였는데, 단단하고 부서지고는 그만두고 설봉스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나의 생각으로는 선종(禪宗)에서는 ‘대기대용(大機大用)’을 존중하지, 알음알이[知解]를 존중하지는 않는다. 운암(雲庵)스님께서 항상 “그대들은 모두 ‘유’를 알고 있지만 그것을 쓰지는 못한다”고 하셨는데, 혜명스님 같은 분은 이를 잘 썼던 분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