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안록
4. 거 량
1.
옛날에 두 암주(菴主)가 암자에 살았는데, 열흘을 보지 않다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위의 암주가 아래 암주에게 물었다.
"오랫만이오. 어디 가셨었습니까?"
"암자에서 무봉탑(無縫塔)을 조성하였소."
"저도 하나 조성하고 싶은데 사형께 본을 빌렸으면 합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소. 다른 사람이 벌써 빌려가 버렸다오."
스님께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고는 말씀하셨다.
"말해보라. 본을 빌렸겠느냐, 빌리지 않았겠느냐?"
2.
옛날에 한 큰스님에게 한 스님이 "사자는 토끼를 잡는 데도 온 힘을 다하고 코끼리를 잡는 데도 온 힘을 다하는데, 온통 쏟는 그 힘이 무슨 힘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묻자 그 큰스님은 "속일 수 없는 힘이로다"라고 하였다.
스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고는 달리 말[別語]하였다.
"옛사람의 말씀을 모르는구나."
3.
옛날에 큰스님 한 분이 암자에 살면서 문에다가 '마음'이라 써 놓고 창에도 벽에도 다 '마음'이라 써 두었다.
스님께서 이를 들려주시며 말씀하셨다.
"문에다가는 다만 '문'이라 쓰고, 창에는 '창', 벽에는 '벽'이라고만 쓰면 될 것을."
현각(玄覺)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문에도 '문'이라 쓸 필요가 없고, 창에도 '창'이라 쓸 필요가 없으며, 벽에도 '벽'이라 쓸 필요가 없으니 글자가 뜻하는 것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4.
옛날에 한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한 뙈기 밭[田地 : 心]을 물려준 지가 오래 되었구나. 나는 그때부터 그대가 잘 개간해 주기를 기다렸다."
스님은 이를 들려주며 말씀하셨다.
"나도 앉은 자리에서 그대가 개간해 주기를 기다리겠다. 무슨 도리라도 있느냐. 무엇이 가깝고, 무엇이 멀더냐. 잘 재서 판단해 보아라."
5.
옛날에 한 큰스님이 동자 하나를 데리고 있었는데, 법도라고는 전혀 몰랐다. 하루는 행각승 하나가 찾아와 동자에게 예의를 가르쳤다. 느지막이 큰스님이 외출하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가서 문안을 드리자, 큰스님은 괴이하여 동자에게 물었다.
"누가 너에게 가르쳐 주더냐?"
"큰방 아무개 스님입니다."
큰스님은 그 스님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그대는 남의 집에 행각하면서 이 무슨 망상이오. 이 동자를 2, 3년 데리고 있으면서 행여라도 제 스스로 가련한 놈이 될까 하였는데 누가 그대더러 동자를 망가뜨리라 하였소. 속히 짐을 싸고 떠나시오."
그리하여 비가 축축하게 내리는 저녁무렵에 쫓겨나게 되었다.
스님께서는 이를 들려주시고는 이렇게 따져 물었다[徵].
"옛사람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보여주신 가풍이 정말 이상하구나. 말해보라. 그 속셈이 무엇이었겠는가?"
6.
어떤 사람이 한 스님에게 물었다.
"어느 등에 불이 켜졌습니까?"
"장명등(長明燈)에 켜졌다."
"언제 켰습니까?"
"작년에 켰다."
"장명등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스님은 대꾸가 없었다.
장경(長慶)스님께서 대신 말씀하셨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그대가 남에게 속지 않는 줄 알았을 텐데."
스님께서는 달리 말씀하셨다.
"영리한 사람이로군."
7.
사주(泗州)에 있는 탑을 지키는 스님이 시간이 되어 탑문을 잠그자 어떤 사람이 묻기를, "3계의 큰 스승이 무엇 때문에 제자에게 갇힐까요?" 하니 그 스님은 대꾸가 없었다.
스님께서 대신 말씀하셨다.
"제자도 갇혔고, 큰 스승도 갇혔구나."
8.
사주의 탑 앞에서 한 스님이 절을 올리자, 어떤 사람이 물었다.
"스님께선 매일같이 예불을 하시는데, 부처님을 보십니까?"
스님께서 대신 말씀하셨다.
"그대는 부처님이라는 말을 무슨 의미로 썼는가?"
9.
옛날 한 부인이 시주하러 절에 들어와 대중의 나이에 따라 돈을 보시하자, 한 스님이 "저 불상 앞에도 한 푼 놓으시오" 하였다.
그러자 부인이 "저 불상은 나이가 얼마나 됩니까?" 하자 그 스님은 대꾸가 없었다.
스님께서 대신 말씀하셨다.
"마음 찰 만큼 하면 알 것이오."
10.
옛날에 도산(道士 : 老莊의 도를 닦는 사람) 하나가 법당 앞에서 부처님을 등지고 앉자 한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도사께선 부처를 등지지 마시오."
그러자 도사가 "스님이여, 경전에 '부처님의 몸은 법계에 가득 차 있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어디에 앉아야 하겠소?" 하자 그 스님이 대꾸가 없었다.
스님께서 대신 말씀하셨다.
"그대를 알겠다."
11.
복주(福州) 홍당교(洪塘橋) 위에 스님네들이 쭉 앉아 있는데 한 관리가 "여기에도 부처가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 스님들은 대꾸가 없었다.
스님께서 대신 말씀하셨다.
"그대는 누구요?"
12.
한 스님이 광남(廣南) 어느 암자에 살았는데, 임금이 사냥을 나왔다. 옆 사람들이 "대왕이 오십니다. 일어나십시오" 하였더니, 스님이 "임금이 아니라 부처님이 온다 해도 일어나지 않겠다" 하였다.
왕이 물었다.
"부처님은 그대의 스승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스승이 왔는데 어째서 일어나지 않는가?"
스님께서 대신 말씀하셨다.
"은혜 갚을 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13.
관리가 한 스님에게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무간(無揀 : 이것 저것 가림이 없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관리가 말하였다.
"모래 한 사발을 불쑥 스님께 드린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대의 공양에 감사드립니다."
스님께서는 달리 말씀하셨다.
"그래도 이것 저것 가리는 짓이다."
14.
옛날 고려(高麗)에서 전당(錢塘)에 찾아와 관음보살을 조성하고서 배에 실으려고 들어올렸는데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명주(明州) 개원사(開元寺)에 봉안하기를 청하였다.
그 뒤에 어떤 사람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어디든지 다 몸을 나타낸다 하였는데, 관음상이 어찌하여 고려에 가지 않았겠는가?"
장경 혜릉(長慶慧稜)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디에나 몸을 나투시나 모습을 보는 데서 치우침이 나왔다."
스님께서는 달리 말씀하셨다.
"관음을 알았군."
15.
세존께서 태어나시자마자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사방을 둘러보더니 "하늘 땅을 통틀어 내가 가장 높구나" 하셨는데, 이에 대해 운문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때 보았더라면 한 방에 쳐죽여 개밥으로 주어, 천하의 태평을 도모했으리라."
스님께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말씀하셨다.
"운문의 기개가 대단하긴 하나 요컨대 불법 도리는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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