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사광록 서(玄沙廣錄序)
우사간으로 집현원을 맡았고, 복주군주사를 담당하였으며, 복건로병마검할고우에 충당된 손각은 짓는다.
(右司諫直集賢院知福州軍州事充福建路兵馬鈐轄高郵孫覺撰)
불법에는 가장 길이 많고, 그 중에서도 선(禪)에는 더욱 병통이 많다. 당나라가 한창 성하던 시기에는 남종(南宗)과 북종(北宗)이 서로를 헐뜯고 욕을 하더니 북종선은 점점 미약해졌다. 지금에 와서 볼 만한 분은 천여 명이 있는데, 모두 육조(六祖)로부터 나온 이들이다. 근세엔 선이 더욱 성하다 말하지만 운문(雲門)과 임제(臨濟)만이 전해질 뿐이다.
위로는 조정의 학사(學士) 대부(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자잘한 마을 사람까지 모든 선을 가지고 승부를 다투며 독실히 좋아하고 힘써 탐구하였지만 모두 근처까지만 갔을 뿐이다. 그러므로 필묵(筆墨) 사이에 나타난 납자들의 오묘한 말씀을 수집하고 찾았으나 거의 다하였던 것이다.
현사 사비스님은 명성이 온 나라에 자자하였으며 참선하는 사람들이 으뜸으로 여겼다.
내가 이 곳 태수를 지낸 지가 거의 2년이 되는데, 그 완전한 책은 구할 수가 없었고 늦게야 대여섯 군데 끊기고 빠진 불완전한 책을 얻어 한 스님에게 교정을 보게 하여 한 권의 책으로 합하였다. 비록 완전하진 못하나 십에 칠팔은 되었다. 이리하여 현사사(玄沙寺)의 스님에게 명하여 판에 새겨 세상에 퍼지게 하였다.
종일대사사비(宗一大師師備)스님을 살펴보면, 복주(福州) 민현(閩縣) 사람으로 속성은 사씨(謝氏)이다. 함통(咸通) 초에(860) 부용산(芙蓉山) 의통(義通)스님을 따라 홍조대사(弘照大師)를 섬기다가 오랜 뒤에 종릉(鐘陵) 개원사(開元寺) 도현율사(道玄律師)에게 가서 구족계를 받았다.
설봉(雪峰)스님이 한번은 "비두타(備頭陀)는 다시 온 사람[再來人]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어째서 제방으로 행각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스님은 "초조(初祖)도 동토(東土)에 오지 않았고 이조(二祖)도 서천(西天)으로 가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처음에는 현사원(玄沙院)에 안주하였는데, 광화(光化) 초에(898년) 왕심지(王審知)가 청하여 안국사(安國寺)에서 처음으로 산문을 여니 학인들이 그를 따라와서 항상 칠백여 명이나 되었다.
혜구(慧球 : 安國慧球)와 계침(桂琛 : 羅漢桂琛)은 모두 그의 뛰어난 제자다.
왕심지가 조정에 아뢰어 자색가사와 종일(宗一)이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개평(開平) 2년(908) 11월에 입멸하시니 나이는 74세였다.
원풍(元豊) 3년(1080) 윤월 27일에 서문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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