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현사록玄沙錄

[현사록 下] 13.

쪽빛마루 2015. 6. 18. 23:34

13.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내 지금 여러분에게 묻겠다. 무슨 일을 이루어 어떤 세계에 있어야 안심입명(安心立命)하겠느냐. 알았느냐? 알지 못했다면 흡사 눈을 비벼 헛꽃이 생기듯 보는 일마다 어긋날 것이다. 알았느냐.

 지금 눈앞에 산하대지와 색공명암의 갖가지 모든 물건을 보는데, 이 모두가 헛된 헛꽃의 모습이니 그것을 전도된 지견(知見)이라고 부른다.

 출가한 사람은 마음을 알고 본래의 근원을 통달한 자이니 그러므로 사문이라 칭하는 것이다. 그대들은 지금 이미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어 사문의 모습이 되었다. 그렇다면 자신을 이롭게 하는 동시에 남을 이롭게 하는 본분을 지녀야 하는데도, 지금 살펴보았더니 모두 먹물같이 깜깜하구나. 자신도 완전히 구제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 위할 줄을 알겠는가.

 여러분이여, 불법 인연은 큰 일이다. 한가하게 머리를 맞대고 어지럽게 잡담이나 해서는 안된다. 흙덩이나 쫓으며 지낼 때, 시간은 잡기 어렵다.

 애석하다. 대장부가 무엇 때문에 '이것이 무엇일까' 하고 살펴보지 않는가. 옛부터 내려오는 종승은 모든 부처님의 정수인데 그대들이 이미 알아차리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방편으로 그대들에게 권하노니, 가섭의 문하를 이어 단박에 초탈하기만 하면 된다. 오직 이 방편문은 그대들을 범부 · 성인의 인과에서 뛰어넘게 하고, 바다 같은 비로자나의 한 장엄세계를 뛰어넘게 하며, 저 석가의 방편문을 뛰어넘게 하여 그 자리에서 영겁토록 그대에게 한 물건도 눈으로 보게 해 주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급하게 스스로 참구하지 않는가. '나는 우선 두어 생을 두고 오랫동안 깨끗한 업을 쌓겠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들이여, 종승이란 어떤 것이겠는가. 그대의 공부로 장엄한 것을 따르지 않고 그대로 체득해야 하며, 타심통과 숙명통을 하지 말고 그대로 체득해야만 한다. 알았는가. 석가가 나와서 많은 신통변화를 놀리면서 병에서 물을 쏟아붓듯 12분교를 설명하여 한 바탕 불사를 크게 짓는다 해도 이 문하에서는 하나도 쓸모가 없으며 털끝만큼의 재주도 부리지 못한다. 알았는가.

 이는 꿈속의 일과 같고, 잠꼬대와도 같다. 사문이라면 응당 이런 데 나와서는 안된다. 꿈속의 일과 같지 않다면 그것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알았는가? 알아차렸다면 크게 해탈한 사람이며, 크게 깨친 사람이다. 그러므로 범부와 성인을 초탈하고, 생사를 벗어나며 인과를 여의고 비로자나와 석가를 초월한다. 범부와 성인의 인과에 속지 않으니 그 어느 곳이든 그대를 알아볼 사람이 없다. 알겠는가.

 길이 생사의 애욕 그물을 그리워하고 선악업의 과보에 매여 계속 자유로움이 없으니 설사 그대가 심신을 허공만큼이나 연마하고 그대의 묘하고 정밀하고 밝은 마음이 담담하여 요동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식음(識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옛 사람은 이를 '급히 흐르는 물과 같다'하였으니 편안하고 고요하다고 한다. 이렇게 수행했다가는 모조리 윤회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다시 윤회를 당한다. 그러므로 수행이란 것도 무상하여 단지 3승의 공부일 뿐이니, 이처럼 두려운 것이다. 도를 보는 안목이 없다면 그것은 역시 구경처가 아니니 지금 온갖 번뇌에 매인 범부가 한 털끝만큼의 공부도 하지 않고 단박 초월하여 안목을 갖추는 것만이야 하겠는가.

 마음의 힘을 덜 줄 아는가. 안락하고자 하는가. 그대들에게 권하노라. 나는 이 자리에서 그대들이 얽어 갖춘 것 없애기를 기다릴 것이며, 다시는 그대들더러 더욱 공부를 하여 연마 수행하게 하지는 않겠다. 지금 이렇지 못한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려 긍정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