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현사록玄沙錄

[현사록 下] 14. 방장록(方丈錄)

쪽빛마루 2015. 6. 18. 23:37

14. 방장록(方丈錄)

 

 옛 부처의 진실한 종지를 살펴보니 항상 사물에 맞게 나타난다. 당당하게 작용함에 응하면서 곳곳에 빛을 퍼뜨려 숨고 나타남에 평탄하고 높고 낮은 데를 모조리 비춘다.

 이것이 그대 문중의 상근기로서 도의 안목이 옛사람과 같고 본래 밝은 마음에 계합하여 비로소 일을 끝낸 사람이다.

 삼라만상이 한 바탕이며 동일한 근원이어서 확 트여 가이없는데 누구라서 테두리를 논하겠는가. 티끌 겁의 일이 모두가 목전에 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것과 떨어진 지 오래되어 마침내 변함없는 바탕에서 어긋나게 되었다. 마음을 미혹하고 사물을 오인하여 오랫동안 진실한 종지를 등진 채 훌륭한 도반을 만나지 못하고 사사로이 이해를 만들어 낼 뿐이다. 설사 헤아림이 있다 해도 온통 뒤섞여 알음알이를 이룬다.

 진리를 찾고 궁구하는 데 이르러서는 삿되고 바름을 분간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평소에 아직 건지지 못한 경우이랴. 선현고덕은 스스로 때를 알고 바위암자나 석실(石室)에서 자기를 극복하고 공부를 밀고 나갔다.

 옛 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에 성스럽다는 생각을 남겨 두면 오히려 법진(法塵)에 떨어진다"라고 하셨으니 자기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그것이 도로 번뇌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계(齋戒)를 지키고 장좌불와하면서 망념을 쉬고 공(空)을 관찰하여 정신을 모아 선정에 들어가야 한다라고 해서도 안된다. 그것이 도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서천의 외도는 팔만겁을 선정에 들어가 정신을 모아 고요하게 되었다. 눈을 감고 마음과 인식을 없앴으나 정해진 겁수(劫數)가 끝나자마자 윤회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출가한 자라면 그렇지 않으니 저 외도같

이 될 수는 없다. 그들은 진실로 훤히 통달하여 큰 지견(知見)을 갖추고 부처와 법

도를 같이하지 않음이 없다. 적조(寂照)로서 앎[知]을 잊어 텅 비어 만상을 머금으니 지금 어느 곳이 그대 자신이 아니며, 어느 곳이 분명하지 않으며, 어느 곳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어찌 이렇게 이해하지 못하는가. 이러한 경지가 없다면 언제든지 일어나는 망념을 어찌하겠는가. 모조리 허망하게 될 것이니 어떤 것이 평생에 힘을 얻은 곳인가. 실제로 밝혀낸 것이 없다면 급히 서둘러야 한다. 언제나 밥 먹고 잠 자는 것을 잊고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목숨을 잃을 듯이 해야 한다. 마음을 밝히고 이치를 참구하여 부질없는 인연을 놓아버리고 심식(心識)을 쉬어야만 가까워질 자격[分]가 있다. 그렇지 못하면 뒷날 모조리 식정(識情)에게 거느려질 것이니 무슨 자유로울 자격이 있겠는가.

 지금은 도리어 분명한 것을 제창하는 저 무정물만도 못하구나. 흙 · 나무 · 돌도 비상한 진실을 설법하는데 듣는 사람이 적을 뿐이다. 이 설법을 들어야만 비로소 상대할 만하다. 무정설법을 듣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상대하겠는가. 한번 말해 보아라. 언설이 없다 해서도 안되며, 묻는 이 없는데 스스로 설법하며 도 닦는 것을 칭찬한다 해서도 안된다.

 보지도 못했는가. 선재동자(善才童子)가 120분의 선지식을 참례하다가 마지막에 미륵보살을 뵙고 손가락 튕기는 사이에 그대로 문에 들어갔던 것을. 선재가 들어간 뒤에 그 문은 스스로 닫히고 그는 누각 속에서 백천의 모든 부처님을 보았다. 과거에 몸을 버리고 몸을 받으며, 참례했던 120 선지식의 허깨비 경계가 누각 속에서 나타났으며, 미륵보살이 그를 위해 증명하자 선재는 의심이 싹 가셨다.

 일반적으로 세 개의 써까래 아래[三條椽下 : 한 사람 앉을 만한 선당의 좁은 공간]서 이런 진실한 앎을 갖추어야만 상대해 줄 만하다. 그렇게 되면 4생6도 가운데서 모든 부처님의 정토와 같아질 것이니 다시 무슨 생사를 두려워하겠는가. 그리고 누구를 통해서 그 모든 설법이 아무 실체가 없음을 알겠는가. 영산회상에서 가섭이 직접 들었던 것까지도 그림 속의 달과 같은 것이다. 옛 분이 말씀하시기를, "선악 모두를 생각지 말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도 같다. 나아가 3승의 수행위와 해탈법신과 보리열반과 성인의 지혜, 성인의 과보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허공꽃이나 토끼 뿔과 같다"라고 하였다.

 듣지도 못했는가. "세간에 돌아와서 보았더니 마치 꿈속의 일과 같구나"라고 했던 말을.

 유위(有爲)의 심법(心法)은 기댈 것이 못되니 세월이 오래 가면 이익과는 완전히 멀어진다. 그것은 근본을 버리고 지말을 쫓았기 때문이다. 범부의 망정을 싫어해서 떠나고 성인의 도를 마음으로 기뻐하는 이런 지견을 지으면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여 5음을 버리려 해도 버리지 못한다. 듣지도 못했는가. "제행무상은 생멸법이다" 했으니, 그대가 눈앞을 헤아린다면 어떻게 밝힐 수 있겠는가. 그 가운데 알았다 해도 도달하지 못했다면 모조리 사기꾼의 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큰 근기를 갖추어야만 분명하게 통달할 수 있으며 금생에 확실히 깨쳐야 백천만겁에도 그러하리라. 옛 분이 말씀하시기를, "노력해서 이번 생에 끝을 내야만 한다. 뉘라서 여러 겁 동안 남은 재앙을 받아내겠느냐"라고 하셨다.

 방장실에서 문득 써서 제자에게 준다. 몸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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