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운(碧雲)
동재 양공(東齋楊公)의 호는 벽운(碧雲)이요, 자는 자연(自然)이다. 지금 왕명을 받들어 그 자와 호에 대한 말을 구하러 특별히 성륜산(聖輪山)으로 나를 찾아왔는데, 청하는 마음이 매우 간절하기에 나는 부득이 붓을 든다.
세상에 누가 푸른 구름처럼 한가한가
언제나 맑은 허공과 함께 찬 달을 마주한다
사해(四海)를 내 집으로 삼아도 아무 일 없고
한 평생의 가고 머무는 것이 아무 이유 없네
만 리의 넓는 들과
곳곳의 푸른 산을
자재로이 소요하다가
혹은 샘물과 돌 사이로 중의 집을 찾는다
동재(東齋)
온갖 변화가 여기서 일어나고
원형이정(元亨利貞)*이 비로소 생겨나다
일양(一陽)의 덕이 천하에 두루하여
사람과 물건이 자연의 이치에 편안해 한다
근본은 고요하나
그 공용은 크고 넓다
꽃다운 풀, 지는 꽃에 봄비가 내리는데
그대와 술잔 드는 그 뜻이 어떠한가
----------------------------------------------
* 원형이정(元亨利貞) : 역(易)에서의 건(乾=하늘)의 네 가지 원리. 즉 사물의 근본 원리라는 말. 원은 만물의 시초로서 봄에 속하고, 형은 만물의 자람으로서 여름에 속하고, 이는 만물의 갖춤으로서 가을에 속하고, 정은 만물의 완성으로서 겨울에 속한다.
수암(壽菴)
공겁 이전에 이미 이루어졌나니
비바람에 갈수록 견고하다
주인 가운데의 주인이여, 얼굴이 옥 같은데
임금을 축원하는 한 향로의 연기, 아침 저녁 끊이지 않고
바위의 꽃은 몇 번이나 피고 또 졌던가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세상 인연을 씻는다
대송(對松)
솔이란 초목 가운데 군자요, 이것을 사랑하는 이는 사람 가운데 군자이다. 내시 이 부(李榑)가 임금의 명을 받들어, 이 소설산(小雪山)에 와서 호를 구하기에 대송(對松)이라 짓고, 이어서 게송으로 그 뜻을 밝힌다.
산과 물은 겹겹하고
구름과 솔은 높디 높은데
이것을 마주한 군자 있으니
성은 이(李)요, 이름은 부(榑)인 농서공(隴西公)이다.
그윽한 소리는 달을 띠어[帶] 귓가에 울리고
뼈에 사무치는 맑고 찬 기운은 마음의 어둠을 부순다
때로는 흰 구름이 찾아와 소식 전하니
시절이 맑아지면 푸른 용을 탈 수 있으리
명곡(明谷)
안개 사라진 가을
만 리에 구름 걷히고
해는 왼쪽에 걸려 언제고 꼼짝 않는데
달은 오른쪽에 걸려 항상 그 속을 비춘다
넓고 빛나 고금에 통하고
그윽하고 아득해 시종이 같다
여기다 조그만 암자를 지어
평생살이를 맡길 만하거니
백 년, 3만 6천 날에
날마다 더욱 이 이치 참구하라
무현(無顯) - 경문(景文)
밝고 신령한 한 물건이 천지를 덮었는데
안팎을 찾아봐도 잡을 곳 없네
생각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도 어쩔 수 없거니
그대가 꽃을 들어 보이려 하지 않음을 알겠네
하하하, 이것이 무엇인고
다급하고 자세히 참구하여 허송세월 하지 말아라*
-------------------------------------------
* 원문의 '母'는 '毋'의 오자인 듯하다.
무범(無範)
발가벗었으매 잡을 곳 없고
자유자재하매 법도가 없다
꽃다운 풀, 지는 꽃, 뿌연 빛 속인데
푸른 구름, 찬 대나무, 띠풀집에 누워 있다
누가 와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거든
삼삼은 구요, 그 나머지는 없다고 하라
죽암(竹菴)
한 물건도 그 속에 없어 본래 청청하니
그 뜰 안 엿볼 사람 세상에 없네
봉이 휘파람 불고 용이 읊조려 선정의 고요함을 깨뜨리나니
한 낚싯대, 밝은 달이 강성(江城)에 가득하네
반원(返源)
몇 해나 강회(江淮)로 떠돌아다녔던가
오늘에야 배를 돌려 본원(本源)에 돌아왔네
웃으며 만나는 손과 주인의 마음은
그저 기쁘고 좋아서 무어라 말할 수 없네
말할 수 없고 거리낌 없으매
맑고 고요하여 아무 맛 없네
자천(自天)
비록 땅에 서서 다니지만
본래 하늘을 찌를 뜻이 있나니
온갖 변화가 다르면서 같음을 사람들은 보지마는
다른 가운데의 다름은 성인도 알지 못하리
차문(此門)
눈앞의 한 가닥 길이 바로 그것을 가리키나
마음 먹고 달려가면 더욱 아득하리라
철저히 마음 없애고 모두 놓아버려야
비로소 여여한 본체를 알게 되리라
정암(珽菴)
신령스레 밝고 철저히 깨끗하여 그 문이 없는 곳
나그네는 부질없이 찾아 달리다 해가 저무나니
만일 별봉(別峰)에 이르러 덕운(德雲) 찾으려 하면
밟은 적 없는 길에는 여전히 없으리라
도암(道菴)
지극히 고요하고 단단하여 때려도 열리지 않건만
흰 구름 무더기 속에 어렴풋이 보이네
지금 사람으로 만일 가업을 전하려거든
모름지기 유마힐의 방장실로 돌아가야 하리라
철문(鐵門)
높아서 잡을 수 없고 가까워도 만질 수 없는데
구름은 날고 비는 흩어져 푸른 이끼에 잠겼다
온갖 생각 한꺼번에 버린다는 그것도 없으면
그제야 본래 활짝 열려 있었음을 믿겠구나
'선림고경총서 > 태고록太古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고록 下] 게송 5. (0) | 2015.07.02 |
---|---|
[태고록 下] 게송 4. (0) | 2015.07.02 |
[태고록 下] 게송 2. (0) | 2015.07.02 |
[태고록 下] 게송 1. (0) | 2015.07.02 |
[태고록 上] 4. 가음명 4~6. (0) | 2015.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