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장(行狀)
행 장* 1.
문인 유창(文人維昌) 지음
현겁 제 4존 대각 능인(賢劫第四尊大覺能仁)의 57대 손이시며 인천의 스승이신 삼한 양조 국사 이웅존자(三韓兩朝國師利雄尊者)의 휘(諱)는 보우요, 원래 이름은 보허(步虛)이며, 호는 태고(太古)다. 성은 홍(洪)씨로서 홍주(洪洲) 사람이다. 아버지[考]의 휘는 연(延)으로서 대대로 양근(陽根 : 현재 경기도 남양주군)에 살았는데, 스님의 아버지를 높인다는 뜻에서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문하시중 판리병부사 홍양공(開府儀同三司上柱國門下侍中判吏兵部事洪陽公)’이라는 벼슬을 받았고, 어머니[妣]는 정(鄭)씨로서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부인은 해가 품에 드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대덕(大德) 5년 신축(1301) 9월 21일에 스님을 낳았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기골이 준수하여 상(相)을 보는 이들은 법왕이 되리라고 하였다.
13세에 회암사(檜岩寺) 광지(廣智)선사에게 귀의하여 머리를 깎고, 얼마 안되어 가지산(迦智山) 총림으로 가서 수행하셨다. 19세에는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를
참구하였으나 대중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구속을 싫어하는 셩격인데다 말소리는 우렁찼기 때문에 도반들이 꺼리므로 스님은 그들을 버리고 떠나 소요자재(逍搖自在)하셨다. 26세에는 화엄선에 합격하고 경전을 두루 연구하여 그 깊은 뜻을 알았다. 그러나 하루는 “이것도 방편[荃蹄 : 고기잡는 통발, 토끼 덫]일 뿐이다. 옛날의 대장부들은 높은 뜻을 세워 치밀하게 공부하지 않았던가. 어찌 나만 대장부가 못 되겠는가”라고 탄식하시고는 모든 인연을 끊고 뜻한 바를 향해 힘써 정진하였으므로 공부가 날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천력(天曆) 3년(1330) 경오 봄에 용문산(龍門山) 상원암(上院庵)에 들어가 관음보살께 예배하고 열 두 가지 큰 서원을 세웠는데, 지극한 정성은 허파를 걸러 나왔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 뒤로는 칼같이 날카로운 지혜를 갖게 되었다.
원통(元統)으로 연호가 바뀐 계유(1333) 가을에는 성서(城西)의 감로사(甘露寺) 승당에 계시면서 분심을 내어 한탄하되 “성질이 나약하고 게을러 불법대사를 성취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고행(苦行)하다가 죽느니만 못하다” 하시고, 다시 결심하고는 단정히 앉으셨다. 그런지 이레 되는 날 저녁에, 어렴풋한 잠 속에 푸른 옷을 입은 두 아이가 나타나, 하나는 병을 들고 하나는 잔을 받들어 더운 물을 조금 따라 권하기에 받아 마셨는데 그것은 감로(甘露)맛이었다. 그리하여 갑자기 깨친 바 있어 게송 여덟 구절을 지으셨는데 “부처와 조사, 산하(山河)까지도 입이 없이 모두 삼켜버렸네” 하는 것이 그 마지막 구절이다.
하나도 얻을 것 없는 곳에서
집 안의 돌을 모두 밟았네
돌아보면 밟은 자취도 없고
보는 자도 이미 고요하여라
분명하고 둥글둥글하며
그윽하여 빛이 찬란한데
부처와 조사, 산하까지도
입이 없이 모두 삼켜버렸네
一亦不得處 踏破家中石
回看沒波跡 看子亦己寂
了了圓陀陀 玄玄光爍爍
佛祖與山河 無口悉呑郤
지원(至元) 정축(1337) 가을에 불각사(佛脚寺)에 계시면서 독방에서 「원
각경(圓覺經)」을 읽다가 “모두가 다 사라져버리면 그것을 부동(不動)이라 한다”는 데까지 읽고 모든 알음알이가 떨어져 게송을 지으셨다.
고요해도 천 가지로 나타나고
움직여도 한 물건 없네
없다, 없다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서리 온 뒤에는 국화가 무성하리.
靜也千般現 動也一物無
無無是什麼 霜後菊花稠
그 뒤에 홀연히 조주(趙州)의 ‘무(無)’자 화두를 들었으나, 한마디도 말할 수 없기가 쇠뭉치를 씹는 것 같았다. 그 쇠뭉치 속에서 계속 정진해 가다가 그 해 10월에 채중암(蔡中庵)이 그의 집 북쪽에 있는 전단원(栴檀園)은 신령하고 기이한 기운을 간직하였으므로 도를 닦을 만한 곳이라고 하면서 겨울 안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거기서 자나깨나 한결 같은[寤寐一如] 경지에 이르렀으나, '무'자
화두에 대한 의심은 깨뜨릴 수가 없어 완전히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러다가 무인(1338) 정월 7일 오경(五更)에 활연히 크게 깨쳐 게송을 지으셨다.
조주 옛부처가
천성(千聖)의 길에 눌러앉았네
취모검을 들이댔으나
온몸에 빈틈이 없네
여우와 토끼는 자치도 없고
몸을 뒤집어 시자가 나타났네
튼튼한 관문을 쳐부순 뒤에
맑은 바람이 태고에게 불어오네.
趙州古佛老 坐斷千聖路
吹毛覿面提 通身無孔竅
狐兎絶潜蹤 翻身師子露
打破牢關后 淸風吹太古
그리고 우연히 중암을 만나 몇 마디 하자 중암은 감격하면서 "불법의 영험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중암은 물었다.
“어디서 조주스님을 보았습니까?”
“물결 앞이요, 물의 뒤이니라.”
스님은 다시 게송을 읊으셨다.*(* 원문의 '中'은 다른 본을 참고하여 '申'의 의미로 번역했다.)
옛 시내의 찬 샘물을
한 입 마셨다가 곧 토하니
저 흐르는 물결 위에
조주의 면목이 드러났네.
古澗寒泉水 一口飮即吐
却流波波上 趙州眉目露
그리고 중암은 계속해 여러 가지를 묻다가 갑자기“설산(雪山)에서 소 먹이는 일은 어떻습니까?”고 물었다. 스님은 곧 다음 여덟 글귀로 해답하셨는데 “습득(拾得)은 하하하 웃고, 한산(寒山)은 큰 입 벌리네” 하는 것이 그 마지막 구절이다.
비니(肥膩) 풀이 잎마다 부드러워
한번 씹으면 단지 쓴지 안다네
한여름에도 눈이 어는데
찬 겨울에도 봄은 늙지 않았네
엎어지려면 엎어지고
거꾸러지려면 거꾸러지네
습득(拾得)은 하하하 웃고
한산(寒山)은 큰 입 벌리네.
肥膩葉葉軟 一嚼辨甘苦
盛夏雪猶凝 寒冬春不老
要傾則便傾 要倒則便倒
拾得笑呵呵 寒山張大口
그리고 서로 이야기 하다가 스님은 인사하고 돌아갔다. 스님은 인연 닿는대로 산수 사이에 놀면서 '운산(雲山)', '청춘(靑春)'이라는 시 두 수를 지으셨다.
3월에 양근(楊根)의 초당으로 돌아와 어버이를 모시고 계셨다. 일찍이 1천7백
공안을 들다가 '암두밀계처(巖頭密啓處)'에서 막혀 지나가지 못하였다. 한참 묵묵히 있다가 갑자기 그 뜻을 깨치고는 냉소를 머금고 한마디 하였다.
"암두스님이 활을 잘 쏘기는 하지만*(* 원문의 '財'는 '射'의 오자인 듯하다) 이슬에 옷 젖는 줄은 몰랐구나."
그리고 또 “말후구(末後句)를 아는 이가 천하에 몇 사람이나 있는가”라고 하셨다. 20년 동안 고심했던 것이 여기서 끝났으니, 그때 스님의 나이는 38세였다.
기묘년(1339) 봄에 부모를 하직하고 소요산(逍遙山) 백운암(白雲庵)으로 가시어, 한가하고 자유로이 자연의 이치를 즐기면서 백운가(白雲歌) 한 편을 지으셨다.
무극(無極)이라고 하는 당나라 스님이 있었다. 항해(抗海)에서 왔는데, 뛰어난 재주와 능숙한 논변으로 많은 선지식들을 다 간파한 사람이었다. 하루는 마침 스승과 이야기하다가 숙연히 마음으로 항복하고 말하였다.
"내가 본 바는 이것뿐입니다. 어찌 다른 뜻에서이겠습니까. 남조(南朝)는 임제(臨濟)의 정통종맥이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 가서 인가를 받으십시오. 아무 아무는 창도사(唱道師)라 하고, 아무 아무는 본분의 작가(作家)라 하여 아무 산에 있으면서 사람을 기다린 지 오래입니다. 그 작가란 이른바 임제의 직계요, 설암(雪巖)의 적손(嫡孫)으로서 석옥 청공(石屋淸珙) 등 몇 사람입니다."
스님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다음해 지정 원년(1341) 신사에 남방으로 가려 하셨다.
그때 채후 하충(蔡侯河沖)과 김후 문귀(金侯文貴)가 스님의 풍도(風度)를 사모하여,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로 모시니 학인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그러나 절은 거의 쓰러져 가고 있었다. 스님은 대중을 거느리고 위의 두 사람과 의논하여 풍부한 재목으로 절을 장엄하니, 앞에는 시내가 흐르고 뒤에는 산이 솟아 울창한
총림을 이루었다. 땅을 더 개간하고 황폐한 것을 모두 다 일으키니, 이른바 스님을 ‘중신조(重新祖)’라 한 것은 이 때문이리라.
거기서 조금 동쪽으로 소나무 언덕에 터를 잡아 암자를 짓고 '태고암'이라 현판을 붙이니, 경내가 뛰어나게 산뜻하였다. 긴 노래를 부르면 차가운 그 곡조가 매우 아름답고 고상하여 아는 이가 적었고, 때때로 솔바람이 스스로 화답할 뿐이었다. 이렇게 하여 거기서 5년을 지내셨다.
병술년(1346) 봄에 연도(燕都)에 들어가 대관사(大觀寺)에 머무셨는데, 도가 높다는 소문이 천자에게까지 들렸다. 그 해 겨울 11월 24일은 태자의 생일인데, 천자는 스승을 청해 「반야경(般若經)」을 강설하게 하였다.
정해년(1347) 4월에 축원성(竺源盛) 선사가 남소(南巢)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으나 선사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 문인 홍아종(弘我宗) · 월동백(月東白) 등이 축원성 선사의 세 마디 법문[三轉語]을 가지고 스님에게 물었다.
즉 첫째는, "출가하여 도를 공부하는 것은 다만 성품을 보기 위해서인데, 그 성품은 어디 있는가?" 둘째는, "3천리 밖에서는 필시 그릇된 말을 할 수 있겠지마는 마주보면서도 왜 모르는가?" 셋째는, 두 손을 펴 보이면서 "이것은 둘째 마디[第二句]이니 첫 째마디[第一句]를 내게 보여라" 하면서 하어(下語)*(* 하어(下語) : 고칙(古則) 공안(公案) 등에 대하여 자기의 의견을 드러내는 말.)를 청하였다. 스님은 바로 보는 듯 곁눈질하고 곁눈질하는 듯 바로 대하여, 다음 한 게송으로 세 관문을 꿰뚫었다.
고불(古佛)의 길에 눌러 앉아서
사자의 외침을 크게 열었다기에
저 늙은 남소(南巢)를 찾아왔더니
솜씨를 전혀 드러내지 않네
드러내지 않으나 해같이 밝고
숨기지 않으나 옻칠같이 검은데
내가 오자 마침 서쪽으로 돌아갔나니
남은 독기가 꿀처럼 쓰구나.
坐斷古佛路 大開獅子吼
還他老南巢 手脚俱不露
不露也明如日 不隱也黑似漆
我來適西歸 餘毒苦如蜜
두 사람은 함께 나와 인사하고 말하였다.
"이 땅의 납자가 몇 천만 명이나 되지만 이 세 가지 관문에 이르러서는 모두 어찌하지 못하였는데, 장로께서 비로소 우리 노화상(老和尙)과 서로 통하였습니다. 이곳에 머무시기를 바랍니다.”
스님은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먼 길을 찾아온 것은 어떤 사람을 보려 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두 사람은 말하였다.
"스승[先師]께서 언젠가 '강호(江湖)의 눈[眼]은 오직 석옥(石屋)에게 있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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