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장 3.
8월 3일에 호주를 떠나 10월 16일에 연도(燕都)에 닿으니, 정신은 대방(大方)에
놀고 이름은 중원(中原)에 퍼졌다. 때에 영녕사 장로 여철강(如鐵舡)과 공덕주(功德主) 원사(院使) 곽목적립(郭木的立)은 스님을 본사(本寺 : 영녕사)에 거처하도록 하였다. 그 뒤에 남북 양성(兩城)의 여러 절 장로들이 여기저기 글을 올려 두루 알렸고 우승상 독아적(右丞相 禿兒的)*과 선정원사 활활사(宣政阮使闊闊思) 등이 천자에게 아뢰었다.
마침 태자의 생일을 맞아 자정원사 강금강길(資政院使 姜金剛吉)이 어향(御香)을
받들고, 태의원사 곽목적립(太醫院使 郭木的立) · 선정원동지 열자독(宣政院同知
列刺禿) · 자정원동지 정주겁설(資政院同知 定住怯薛) · 관인 답자해(官人 答刺海)
등은 삼가 성지(聖旨)를 받들어 묵고 있는 절을 개당하였다. 제사(帝師)와 정궁황
후(正宮皇后) · 이궁황후(二宮皇后)와 태자는 모두 향과 선물을 내렸다. 스님은 이궁황후가 바친 금란가사를 입고 우뢰소리를 크게 떨쳤다. 현릉(玄陵 : 공민왕)은
그때 세자로 있었는데 더욱 감탄한 뒤에 "소자(小子)가 만일 새로 고려의 왕이 되면 스님을 나의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하였다.
무자년(1348) 봄에 스님은 본국으로 돌아와 중흥사에 머무시면서 여름 안거를 지내고, 자취를 숨기기 위해 미원장(迷原莊)을 지나는데, 선대(善大)라는 늙은 아전이 꿇어앉아 울면서 만류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그와 함께 흐르는 물을 따라 용문산(龍門山)북쪽 기슭에 이르렀다. 푸른 숲은 깊고도 빼어났으며 꽃다운 노을은 은은하였다. 터를 잡아 암자를 짓고 소설산(小雪山)이라 이름하고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거기서 종신토록 살겠다 하며 '산중자락가(山中自樂歌)' 한 편을 지으셨다.
임진년(1352)봄에 현릉이 대호군 손습(大護軍 孫襲)을 보내 불렀으나 가지 않으셨는데 다시 손습을 보내 굳이 청하므로 부득이 일어나셨다. 현릉은 궁중에 맞이하여 설법을 청하였다. 맑은 법음이 마음에 흘러들자 왕은 기쁜 얼굴로 "경룡사(敬龍寺)에 머무십시오" 하므로 스님은 명을 따랐다.
현릉은 "장하다. 미원장의 아전은 스승의 귀하심을 알아보고 공경히 받들었구나"
하고, 그 장(莊)을 현(懸)으로 고치고 어진 이에게 명령하여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
그 때 서울의 남녀들은 스님의 법음을 들으려고 모두 달려와 예배하였고, 스님은
거기서 한 여름을 머무셨다. 스님은 나라에 변란(變亂)이 있을 줄 알고 경룡사를 떠
나 소설산에 들어가셨는데, 과연 얼마 뒤에 일신(日新)의 변란이 일어났다.
병신년(1356) 2월에 왕은 문하평이 한가귀(門下評理 韓可貴)를 보내 스님을 청하였으나 스님의 뜻은 더욱 굳었다. 다시 판전교 이정(判典校 李挺)을 보내 청하였으므로 스님은 구름의 자취를 숨기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3월 6일에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온갖 보배로 사자좌를 장엄하고 스님을 청하여 봉은사(奉恩寺)에서 개당하니 선 · 교의 스님네들이 모두 모였다.
현릉은 태후(太后)를 모시고 권속을 거느리고 친히 왕림하여, 만수가사(滿繡袈裟)와 금실로 수놓은 좌구[金縷尼師壇] · 수정염주(水精念珠) · 침향불자(沈香拂子) 및 그 밖의 온갖 옷과 도구 등을 바쳤다. 스님은 사자좌에 올라가 크게 사자후를 여셨다. 왕은 손수 보시하셨다. 이보다 먼저 이 소문이 천자에게까지 들어가 여러가지 빛깔의 단필(段匹)가사 3백 벌을 내리셨는데, 이 날 스님네[福田]에게 나누어 주니 법회는 유래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현릉이 금자(金字) 대장경을 원하였으므로 스님은 그 마음을 돕기 위하여 왕에게서 받은 금을 개인 재산으로 쌓아 두지 않고 그 경비로 쓰셨다. 그 뒤에 고향의 자연으로 돌아갈 뜻이 있어서 왕에게 글을 올려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현릉은 “나는 일찍부터 화상의 도풍(道風)을 사모하였소. 스승은 내 뜻을 저버리지 마시오. 스승이 머무르지 않으면 나는 도를 스승에게 도로 돌려드리겠소” 하고, 4월 24일에 왕사(王師)로 봉하였는데, 오래 가물다가 이날 비가 내렸다. 현릉은 매우 기뻐하며 ‘왕사의 비’라 하고, 한림(翰林)들은 모두 축하하는 글을 바쳤으나 스님은 그 경사의 덕을 임금에게 돌리셨다.
며칠 뒤에 왕의 명령으로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세우고, 거기에 관리를 두니 장관은 정3품(正三品)이었으며, 금옥으로 된 그릇에다가 온갖 생활용구를 모두 갖추었다. 그리고 고향인 홍주(洪州)를 목(牧)으로 승격시키니, 그 도덕을 표창하는 지극한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스님의 마음은 담담하여 그것을 뜬구름처럼 생각하셨다. 현릉은 스님을 맞이하여 청하였다.
"세속의 이치가 법왕(法王)의 거울을 더럽힐까 두렵소. 그러나 상대를 따라 친절히 응해 주는 것이 성자(聖者)의 할 일일 것이오. 물을 일이 있소?"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현릉이 물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어떻소?"
"왕의 거룩하고 인자한 그 마음이 바로 모든 교화의 근본이자 다스림의 근원이니, 빛을 돌이켜 마음을 비추어 보소서. 그리고 시절의 폐단과 운수의 변화를 살피지 않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옛날 조상 임금께서 3국을 통일하여 한 나라를 만들어 후손을 복되게 한 것은 진실로 불법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5백의 선찰(禪刹)을 지어 조사의 도를 넓히고 드날리매, 용천이 도왔고 불조가 보호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서울은 3양(三陽)의 땅인데 선(禪)은 하나의 근본이 된다. 그것이 양(陽)의 덕에 배합하면 9가 3양의 수가 되기 때문에 9조(九祖)의 도로써 도울 수 있다. 9산(九山)의 참학(參學)들이 각각 무리를 지어 규칙적으로 모여 복을 넓히는 명당(明堂)자리에 모두 모여 큰 뜻을 널리 펴면 하늘에서 상서가 내리고 땅에서 복이 생기리라' 하였는데, 뒤에 그 말처럼 번성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 9산의 선객들은 각각 그 문중을 등에 업고 피차의 우열을 따지며 심히 싸우다가, 요즈음에는 도문(道門)으로써 더하여 창과 방패를 쥐고 울타리를 만들어, 그로 말미암아 화합을 해치고 정도를 깨뜨립니다. 아아, 선(禪)이란 원래 한 문이건만 사람들이 많은 문을 만들었으니, 저 부처님의 평등하여 ‘나’가 없다는 도리와 여러 조사님네의 격식을 벗어나 맑게 드날리는 가풍과 선왕(先王)의 법을 보호하고 나라를 편하게 하려는 뜻을 어디서 찾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시대의 폐단이라는 것입니다.
또 9는 노양(老陽)이요, 1은 초양(初陽)이라 하는데, 늙으면 쇠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또 도읍을 세울 때부터 9산으로 내려온 지가 오래되었으니,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신양(新陽)을 만든다면 좀 나을 것입니다. 이것이 운수의 변화라는 것입니다.
정작 이 때 1문으로 통합하여 저 9산을 인아(人我)의 산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산도 명예롭고 도도 있어서 모두 한 부처의 마음에서 나와 물과 젖이 섞이듯 한 가지로 평등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백장 대지(百丈大智)선사의 선원청규(禪苑淸規)로써 푹 젖도록 훈도하여 평상시의 위의는 엄숙하고 진실하며, 부지런히 법을 묻고 때를 맞추어 종과 목어를 치면서, 조사의 풍모를 다시 일으키고 5교(五敎)가 각각 그 법을 널리 펴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복을 받들게 하면 국운은 뻗어나고 불일(佛日)은 밝아질 것이니, 어찌 빛나지 않겠습니까.
그러하옵고 일찍이 관찰하오매 왕기(王氣)가 이 도읍에 있기는 하지만 처음 전성하던 때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만일 남쪽 한양(漢陽)으로 옮겨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행하오면, 자연히 교화는 천하에 빛나고 은혜는 만 중생에게 입혀질 것입니다.”
현릉은 "매우 훌륭한 말씀입니다" 하고 좌우에 명령하여 그대로 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간사한 말이 방해를 놓아 스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승도들은 그저 답답해할 뿐이었다. 스님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쳐주고 왕의 통치를 도운 일이 명실상부하게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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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당법문에는 '禿'이 '朶'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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