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태고록太古錄

[부록] 비명

쪽빛마루 2015. 7. 7. 19:41

비명(碑銘)

 

 

비명*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 삼중대광 한산부원군 영예문춘추관사 신이색 봉교찬(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 三重大匡 漢山府院君 領藝文春秋館事 臣李 奉敎撰)

전봉익대부 판전교사사진현관제학 신권주 봉교서단 병전액(前奉翊大夫判典校寺事進賢提學 臣權鑄 奉敎書丹 並篆額)

 

 (우왕)11년 1월 10일에 좌대언 신 중용(左代言 臣 仲容)이 국사 태고의 부도에 명(銘)을 지으라는 왕명[敎旨]을 내게 전하였다.

 신은 삼가 상고하건대, 국사의 휘(諱)는 ‘보우(普愚)요 호는 태고(太古)며, 속성은 홍(洪)씨로서 홍주(洪州) 사람이다. 아버지[考]의 휘는 연(延)이니, 개부의동 사 상주국 문하시중 판리병부사 홍양공(開府儀同司上柱國門下侍中判吏兵部事 洪陽公)이시고, 어머니는 정(鄭)씨로서 삼한국대부(三韓國大夫人)이시다.

 부인은 해가 품에 드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대덕(大德) 5년 신축 9월 21일에 스님을 낳았다. 스님은 아이 때부터 뛰어나게 영민하였다.

 13세에 회암사(檜岩寺) 광지(廣智)선사에게 출가하여 19세에는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를 참구하였다. 원통(元統) 계유년에 성서(城西) 감로사(甘露寺)에 머시다가 하루는 의심덩이가 깨어져 게송 여덟 구를 지었는데 “부처와 조사, 산하까지도 입이 없이 모두 삼켜버렸네”라는 것이 그 끝 구절이다.

 그 뒤 지원(至元) 정축년은 스님의 나이 37세였다. 그 해 겨울에 전단원(栴檀)에 머무시면서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하다가, 다음해 정월 7일 오경(五更)에 활연히 깨쳐 게송 여덟 구를 지었는데 “튼튼한 관문을 쳐부순 뒤에, 맑은 바람이 태고에게 불어오네”라는 것이 그 끝 구절이다.

 3월에는 양근(楊根)의 초당으로 돌아와 어버이를 모셨다. 스님은 일찍이 1천7백 공안을 참구하다가 ‘암두밀계처(巖頭密啓處)’에서 막혀 지나가지 못하였다. 한참 묵묵히 있다가 갑자기 깨닫고는 냉소를 머금고 한마디 하였다.

 “암두스님이 활을 잘 쏘기는 하나 이슬에 옷젖는 줄은 몰랐다.”

 신사년 봄에 한양 삼각산 중홍사에 머무시면서, 그 동쪽 봉우리에 암자를 짓고 이름을 ‘태고암’이라 하였다. 그리고 영가(永嘉)스님이 지은 시의 문제를 본따서 노래 한 편을 지었다.

 지정 병술년, 스님의 나이46세였다. 스님은 연도(燕都)에 갔다가 축원성(竺源)선사가 남소(南巢)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가 보았으나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스님은 다시 호주 하무산(霞霧山)으로 가서 석옥 청공화상을 만나보고, 깨달은 바를 자세히 말한 뒤에 ‘태고암가’를 바쳤다. 석옥화상은 스님이 큰 그릇임을 굳게 믿고 일상사를 물었다. 스님은 다 대답하* 나서 다시 천천히 물었다.

 “이 밖에 또 어떤 일이 있습니까?”

 석옥화상은 “노승도 그러했고 삼세의 불조도 그러했소” 하고, 가사를 주어 신(信)을 표하고는 “노승은 이제 다리를 뻗고 잘수 있게 되었소” 하였다. 석옥화상은 임제(臨濟)의 18대 손이다. 스님을 반달 동안 머무르게 한 뒤에 떠나 보낼 때는 주장자를 주면서 "부디 잘 가시오" 하였다. 스승은 절하며 그것을 받고 연도(燕都)로 돌아오매 성 안에 명성이 널리 퍼졌다. 천자는 이 소문을 듣고 영녕사(永寧寺)에서 개당하기를 청하고, 금란가사와 침향불자 등을 내리셨다. 황후와 황태자는 향과 선물을 내렸으며 왕공(王公)과 남녀들은 달려와 예배하였다.

 무자년 봄에는 본국으로 돌아와 미원장(迷源莊) 소설산(小雪山)에 들어가 몸소 밭을 갈면서 4년을 지냈다. 임진년 여름에는 현릉(玄陵)이 스승으로 맞이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았다가 다시 사신을 보내 간절히 청하므로 부득이 갔다. 그러나 그 해 가을에 굳이 사양하고 산으로 돌아왔다. 얼마 안되어 일신(日)의 변란(變亂)이 일어났다. 병신년 3월에는 스님을 봉은사(奉恩寺)로 모셔 설법을 청하였는데, 선교(禪敎)의 스님들이 모두 모였다. 현릉은 친히 나와 만수가사와 수정염주 및 그 밖의 옷과 기구를 바쳤고, 스님은 사자좌에 올라가 종지(宗旨)를 드날렸다. 천자는 여러 가지 빛깔로 짜여진 단필(段疋)가사 3백 벌을 내려 이 날 모인 스님네들에게 주었는데, 선교의 큰스님들로 법회는 전에 없던 성황을 이루었.
 스님이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현릉은 “스승이 여기 있지 않으면 나는 스승에게 도를 돌려드리겠소.”하였다.

 4월 24일에 스님을 왕사로 봉하고 원융부(圓融府)를 세우고는 거기에 정3품(正三品)의 장관을 두는 등, 지극히 존숭(尊崇)하였다. 광명사(廣明寺)에 있다가 그 이듬해에 왕사의 직위를 사양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스님은 밤에 달아났다. 현릉은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음을 알고 법복과 인장을 모두 스님께 보내드렸다.

 임인년 가을에는 양산사(陽山寺 : 현재 희양산 봉암사)에 머무시기를 청하였고, 계묘년 봄에는 가지산(迦智山)에 머무시기를 청하였는데, 스님은 그때마다 다 응하였다.

 병오년 10월에는 왕사의 직위를 사양하고 인장을 봉해 돌리면서 자유로이 수도하기를 빌었다. 현릉은 그 청을 따랐는데, 그것은 신돈(申)이 권세를 부렸기 때문이었.

 이보다 앞서 스님은 왕에게 글을 올려 신돈에 대해 논하였다.

 “나라가 다스려지면 진승(眞僧)이 그 뜻을 얻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사승(邪僧)이 때를 만납니다. 왕께서는 살피시어 그를 멀리하시면 국가에 큰 다행이겠습니다.”

 무신년 봄에 전주 보광사(普光寺)에 머무셨는데, 신돈은 스님을 죽이려고 온갖 꾀를 썼으나 되지 않았다. 그 뒤에 스님이 강남 절강 땅에 가려 할 때에 신돈은 현릉에게 아뢰었다.

 “태고는 왕의 지극한 은혜를 입어 편안히 늙어 가는 것이 그 직책입니다. 그런데 지금 멀리 외국에 가려는 것은 반드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왕께서 자세히 살피소서”

 그 말이 매우 절박하였으므로 현릉은 부득이 따랐다. 신돈은 스님을 법사(法司)에 내려보내 여러 가지로 신문한 뒤에, 스님의 측근들이 스님을 모함하도록 항복받아 스님을 속리산(俗離山)에 가둬 두었다. 기유년 3월에 현릉은 후회하고 스님에게 소설산으로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신해 7월에 신돈을 베어 죽었다.

 현릉은 사신을 보내 예를 갖추어 스님을 국사로 높여 봉하고, 영원사(瑩原寺)에 무시기를 청하였으나 스님은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그러나 왕의 명령으로 멀리서 7년 동안 일을 맡아 보다가, 무오년 겨울에 지금 임금(우왕)의 명령으로, 비로소 그 절에 가서 1년 동안 있다가 돌아왔다.

 신유년 겨울에 양산사로 옮겨 주지로 취임하던 날, 왕은 다시 국사로 봉하였으니 그것은 선군(先君)을 생각해서였다,

 임술년 여름에 소설산으로 돌아와 12월 17일에 약하게 병으로 앓더니, 23일에는 문도들을 불러 말하였다.

 “내일 유시(酉時)에는 내가 세상을 떠날 것이니 군수에게 청하여 인장을 봉하도록 하라.”

 그리고는 세상을 하직하는 글[辭世狀] 몇 통을 입으로 전하였다. 때가 되자 목욕한 뒤에 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아, 네 구로 된 게송을 읊고 소리가 끊어지자 돌아가셨다. 이 소식이 왕에게 들리자 왕은 매우 슬퍼하고, 계해 정월 12일에 향을 내렸다.

 화장하는 날 밤에는 그 광명이 하늘에 뻗쳤고 사리가 수없이 나왔다. 그 사리 백 알을 왕에게 올렸더니 왕은 더욱 공경하고 존중하여 유사(攸司)에게 명하여 원증(證)이란 시호를 내렸다. 중홍사 동쪽 봉우리에 탑을 세워 이름을 보월승공(寶月昇空)라 하고 석종(石鐘)을 만들어 세 군데에 사리를 간직하였다. 가은(加恩)의 양산사(山寺)와 양근(楊根)의 사나사(舍那)이며, 이 절 부도 곁에 그것을 세운 뒤에 석탑을 만들어 간직한 곳은 미원(迷源)의 소설사(小雪寺)이다.

 내 가만히 생각하니, 선왕(先王)도 지극히 불교를 승상하였으나 참소가 그 사이에 횡행하였고, 태고도 불교를 위해 지극히 힘썼으나 화가 몸에 미쳤으니, 이것은 인연의 과보로써 성인도 면할 수 없었던 것인가 한다. 심지어 그 명성은 중국에까지 넘쳤고 사리는 고금에 빛났으니, 그것이 어찌 아무 시대에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이겠는가.

 나 색()은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명(銘)을 짓는다.

 

스승의 마음이여, 바다가 넓어 하늘이 다다랐고

스승의 자취여, 배를 띄우고 지팡이를 날렸도다

돌아와서는 지기(智己)를 만나 왕의 스승이 되었고

소설사에서 몸소 밭 갈매 숨고 나타나기 때를 따랐다.

그 때는 취성(鷲城 : 신돈)이 외람되이 형권(刑權)을 희롱했으나

구름이 해를 덮은 것 같거니 그 빛에 무슨 손해 있으랴

달은 곤륜(崑)에 떨어졌지만 남은 광명이 그대로 있었으니

사리의 빛나는 광채 옥문(玉門)을 비추었다

구름 끝에 솟아난 저 푸른 삼각산

그 밑에 탑을 세우니 나라와 함께 길이 편안하며

스님의 풍도는 대동(大東)에 널리 퍼지리

신은 절하고 명(銘)을 짓노니 무궁하도록 전해지이다.

  

홍무 18년(1385) 을축 9월11일, 문인 전 송광사 주지 대선사 석굉(釋宏)이 비석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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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는 '고려국국사 대조계사조 전불심인 행해묘엄 비지원융 찬리왕화 부종수교 대원보제 일국대종사 마하실다라 이웅존자 시원증 탑명(高麗國國師 大曹溪嗣祖 傳佛心印 行解妙嚴 悲智圓融 贊理王化 扶宗樹敎 大願普濟 一國大宗師 摩訶悉多羅 理雄尊者 諡圓證 塔銘) 및 서(序)'이다.

* 문답한 것은 적지 않는다.【원문 주】

 

 

문도(門徒)

 

 국사 지웅존자 혼수(國師智雄尊者混脩), 왕사 원응존자 찬영(王師圓應尊者粲英), 내원당 묘엄존자 조이(內願堂妙嚴尊者祖異), 내원당 국일도대선사 원규(內願堂國一都大禪師元珪), 도대선사 광화군 현엄(都大禪師廣化君玄嚴).

 

대선사(大禪師) : 수서(守西), 조굉(祖宏), 자소(慈紹), 선진(旋軫), 일녕(一寧), 정유(定柔), 상총(尙聰), 혜렴(惠廉), 혜심(慧深), 경돈(慶敦) 등 90인.

 

선사(禪師) : 신규(信規), 계교(屆皎), 덕제(德濟), 의경(義瓊), 수윤(壽允), 내유(乃由), 내규(乃圭), 성잠(省岑), 천긍(天亘), 유창(惟昌) 등 1백 7인.

운수(雲水) : 법공(法空), 정유(定乳), 환여(幻如), 달생(達生), 성명(省明), 중철(中哲), 복남(卜南), 정일(定一), 조행(祖行), 성인(省因), 법자(法慈), 법순(法淳), 달심(達心), 성여(省如), 희엄(希儼), 명회(明會), 각명(覺明), 선견(善見), 희오(希悟), 가신(可信), 가생(可生), 지천(止川), 운잉(雲仍), 선정(宣正), 가운(可雲), 가인(可印), 운상(雲祥), 설강(雪岡), 설사(雪思), 설서(雪栖), 요환(了幻), 설진(雪珍), 가송(可松), 가순(可淳), 내녕(乃寧) 등 약 1천3인.

 

칠원부원군 운항령 삼사사 이인임(漆原府院君伊桓領三司事李仁任), 판문하 최영(判門下崔瑩), 문하시중 임견미(門下侍中林堅味), 수문하시중 이성림(守門下侍中李成林), 판삼사사 이성계(判三司事李成桂), 철성부원군 이림(鐵城府院君李琳), 삼사좌사 염흥방(三司左使廉興邦), 찬성사 우인열(贊成事禹仁烈), 연흥군 박형(延興君朴形), 개성군 왕복명(開城君王福命), 상당군 한천(上黨君韓蕆), 문하평리 반익순(門下評理潘益淳), 정당문학 이인민(政堂文學李仁敏), 김해군 김사행(金海君金師幸), 밀산군 박성량(密山君朴成亮), 지신사 염정수(知申事廉廷秀), 전공판서 최경만(典工判書崔敬萬), 김해부사 이희계(金海府使李希桂), 삼한국대부인 이씨(三韓國大夫人李氏), 비구니 묘안(比丘尼妙安), 전공판서 김인귀(典工判書金仁貴).

 

비석의 높이는 7척5촌. 넓이는 3척 5촌 5분. 글자의 지름은 9분 해서(楷書)요, 전제(篆題) 글자의 지름은 3촌 2분인데,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북한리 태고사(京畿都 高陽郡 神道面 北漢里 太古寺)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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