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지공화상(指空和尙) 기골(起骨)*
"밝고 텅 빈 한 점은 아무 걸림이 없어, 한 번 뒤쳐 몸을 던지니 얼마나 자유롭소."
죽비로 탁자를 한 번 내리치며 할을 한 번 하고는 '일으켜라!' 하셨다.
입탑(入塔)
스님께서 영골을 받들고 말씀하셨다.
"서천의 108대 조사 지공대화상은 3천 가지 몸가짐을 돌아보지 않았는데 8만 가지 미세한 행에 무슨 신경을 썼는가. 몸에는 언제나 순금을 입고* 입으로는 불조를 몹시 꾸짖었으니, 평소의 그 기운은 사방을 눌렀고 송골매 같은 눈은 가까이하기 어려웠다. 원나라에서 여러 해를 잠자코 앉아 인천(人天)의 공양을 받다가 하루 아침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전하매 천룡팔부가 돌아오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아침에 정성스레 탑을 세우고 삼한(三韓) 땅에 모시어 항상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나 그 법신은 법계에 두루해 있다. 말해 보라. 과연 이 탑 안에 거두어 넣을 수 있겠는가. 만일 거두어 넣을 수 없으면 이 영골은 어디 가서 편안히 머물겠는가. 말할 수 있는 이는 나와서 말해 보라. 나와서 말해 보라. 없다면 산승이 스스로 말하겠다."
할을 한 번 한 뒤에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수미산을 겨자씨 속에 넣기는 오히려 쉽지만, 겨자씨를 수미산에 넣기는 매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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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골(起骨) : 사람이 죽어 화장한 뒤에 그 영골을 거두어 탑에 넣기 위해 보내는 일.
* 혼금(渾金)은 제련하지 않은 금으로, 원래 완전함을 뜻함.
13. 각오선인(覺悟禪人)에게 주는 글
생각이 일고 생각이 멸하는 것을 생사라 하는데, 생사하는 그 순간순간에 부디 힘을 다해 화두를 들어라. 화두가 순일하면 일고 멸함이 곧 없어지는데 일고 멸함이 없어진 그 곳을 신령함[靈]이라 한다. 신령함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그것을 무기(無記)라 하고, 신령함 가운데 화두에 어둡지 않으면 그것을 신령함이라 한다. 즉 이 텅 비고 고요하며 신령스럽게 아는 것은 무너지지도 않고 잡된 것도 아니니, 이렇게 공부하면 멀지 않아 이루어질 것이다.
14. 지여상좌(智如上座)를 위해 하화(下火)*하다
세 가지 연[三緣]이 모여 잠깐 동안 몸[有]을 이루었다가 4대가 떠나 흩어지면 곧 공(空)으로 돌아간다. 37년을 허깨비 바다에서 놀다가 오늘 아침 껍질을 벗었으니 흉년에 쑥을 만난 듯 기쁠 것이다. 대중스님네여, 지여상좌는 어디로 갔는지 알겠는가. 목마를 세워 타고 한 번 뒤쳐 구르니, 크고 붉은 불꽃 속에서 찬 바람을 놓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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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화(下火) : 하거(下炬), 화장할 때 불을 붙이는 일.
15. 두 스님을 위해 하화하다
"혜징(慧澄) 수좌와 지인(志因) 상좌여, 밝고 신령한 그 한 점은 날 때에도 분명하여 남을 따르지 않고, 죽을 때에도 당당하여 죽음을 따르지 않는다. 생사와 거래에 관계없이 그 자체는 당당히 눈앞에 있다."
횃불로 원상(圓相)을 그리면서 말씀하셨다.
"대중스님네여, 이 두 상좌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가. 57년 동안 허깨비 세상에서 놀다가 오늘 아침에 손을 떼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가운데 소식을 누가 아는가. 불빛에 함께 들어가나 감출 곳이 없구나."
16. 신백대선사를 위해 뼈를 흩다
큰 들판에 재가 날으매 그 뼈마디는 어디 갔는가. 깜짝하는 한 소리에 비로소 뇌관(牢關)에 이르렀다. 앗! 한 점 신령스런 빛은 안팎이 없고, 오대산 하늘을 둘러싼 흰 구름은 한가하다.
17. 지보상좌(志普上座)를 위해 하화하다
근본으로 돌아갈 때가 바로 지금이거니, 도중에 머물면서 의심하지 말아라. 별똥이 튀는 곳에서 몸을 한 번 뒤쳐, 구품의 연화대로 자유로이 돌아가라.
18. 숙녕옹주 묘선(淑寧翁主 妙善)에게 드리는 글
이 한 가지 큰 일을 성취하려면 그것은 승속이나 남녀나 초기(初機) · 후학(後學)에 있지 않고, 오직 당사자의 마지막 진실한 한 생각에 있을 뿐입니다. 제가 옹주를 보매 천성이 남과 다른 데가 있어, 본래부터 사심이나 의심이나 미혹한 마음이 없고, 오직 전심으로 더 없는[無上] 보리를 구하려는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어찌 과거 무량겁으로부터 선지식을 가까이하여 반야의 바른법을 훈습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사람의 말에, '장부란 남자 여자의 형상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요, 네 가지 법[四法]을 갖추면 그를 장부라 한다' 하였습니다. 네 가지 법이란 첫째는 선지식을 가까이하는 것이요, 둘째는 바른 법을 듣는 것이며, 셋째는 그 뜻을 생각하는 것이요, 넷째는 그 말대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법을 갖추면 참으로 장부라 하고, 이 네 가지 법이 없으면 비록 남자의 몸이라 하더라도 장부라 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옹주님도 이 말을 확실히 믿고 그저 날마다 스물 네 시간 행주좌와의 4위의(四威儀) 속에서 오직 본래 참구하던 화두만을 들되 끊이지 않고 들며 쉬지 않고 의심하면 고요하거나 시끄러운 가운데서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고,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되며, 자나깨나 화두가 앞에 나타나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고 일어나려 해도 일어나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경지에 이르러 모르는 사이에 몸을 뒤쳐 한 번 내던지면, 거기는 여자의 몸을 바꾸어 남자가 되고 남자 몸을 바꾸어 부처를 이루는 곳이 될 것입니다. 간절히 부탁하고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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