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한사(羅漢寺) 계남(系南)선사의 수행일생
여산(廬山) 나한사(羅漢寺)의 계남(系南)선사는 임정 장씨(臨汀張氏)의 아들이다. 모친이 그를 가졌을 때, 용맹스런 대장부가 황금갑옷을 입고 마당을 빙빙 돌기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선지식이 이 집에 태어나기에 그를 호위하려 왔다는 꿈을 꾸었다. 그가 태어나자 부모가 품에 안거나 만지거나 하면 곧장 울음을 터뜨려 어쩔 수 없이 보모에게 기르도록 하였다. 10세에 김천원(金泉院)의 승려 덕렴(德廉)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는 속가의 백부이다. 그 절은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는 3년 동안 한차례도 집에 가지 않았다. 마침 그의 부친이 세속 음식을 덕렴스님에게 주면서 손짓발짓으로 공경을 표하자 계남선사는 슬퍼하며 말하였다.
"청정한 가람을 마늘 냄새로 더럽혀서야 되겠습니까?"
덕렴스님이 이 말을 듣고 예의 바르지 못하다고 그를 꾸짖고 심하에 물리쳤다. 때마침 일꾼이 마당가의 잣나무 가지를 치고 있었는데 계남선사는 입에서 나오는대로 '세백게(洗栢偈)'를 지어 그의 뜻을 나타냈다.
두 그루 잣나무를 계단 앞에 심었더니
푸른 잎 신비한 뿌리 점점 굳어져
만년의 높은 기상 원래 타고났으니
무심함은 눈서리도 어쩔 수 없네.
兩株寒栢種堦前 翠葉靈根漸次堅
自禀萬年高操在 等閒霜雪莫相煎
덕렴스님이 깜짝 놀라 남다르게 생각하였고, 19세가 되자 승적에 이름을 올렸다. 같은 절 스님 해평(海評)과 함께 신도를 위하여 양무참법회(梁武懺法會 : 양나라 무제대에 비롯되었다는 참회법회)에 참여하였다가 갑자기 느낀 바 있어 해평에게 말하였다.
"부처님과 보살은 우리의 조상인데도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전혀 모르고 있으며 심지어는 참문(懺文)을 읽으면서도 잘못 읽으니 더구나 그 깊은 뜻을 알 까닭이 있겠는가? 이제는 그저 비슷하게 흉내만 내면 법제자를 삼으니 어찌 부끄러운 마음이 없겠는가?"
그 뒤 그 고을 개원사(開元寺)의 담(潭)선사를 찾아갔다. 담선사가 달구경을 하다가 그의 문도들에게 착어(著語)로서 그들의 뜻을 표현하라 하니 계남선사는 서슴없이 대답하였다.
팔월 한가위
밝은 달은 푸른 시내위에 흐르네
은강위에만 비치는 게 아니라
그 빛은 사백고을에 가득하여라.
中秋十五夜 明月碧谿流
不獨鄞江上 光充四百州
담선사는 기뻐하며, '앞날을 쉽게 헤아릴 수 없는 인물'이라고 말하였다. 이어 강국(江國)으로 나가 돌아다닐 때, 맨 처음 여릉(廬陵) 융경사(隆慶寺) 한(閑)선사의 선실을 찾아가고 그 다음 앙산사(仰山寺)의 위(偉)선사를 찾아뵈니 그들은 모두 큰 그릇이라고 중히 여겼다. 원풍(元豊) 기미년(1079)에 장사(長沙) 도림사(道林寺)에 가서 우(祐)선사를 찾아뵈었는데, 그의 한마디 말끝에 모든 의문이 탁 풀렸다. 우선사가 절 일을 그만두자 그를 모시고 여악(廬嶽)으로 갔으며, 원우(元祐) 병인년(1086) 우선사가 나한사(羅漢寺)의 주지를 맡자 계남선사는 그를 보좌하여 총림을 건립, 양자강 유역에서 으뜸가는 가람이 되게 하였다. 우선사가 노환으로 물러나자 그 뒤를 계승하니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그는 일을 처리하고 대중을 다스리는 데 그 법도가 준엄하였으며, 명성이 사방에 널리 전해졌다. 7년이 지난 어느날 갑자기 법당에 올라 대중에게 말하였다.
나는 오늘
철마를 거꾸로 타고
수미산을 거슬러 올라
허공을 밟되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으리.
羅漢今日 倒騎鐵馬
逆上須彌 踏破虛空
不留联跡
그리고는 방장실에 들어가 가부좌를 한 채 돌아가셨는데, 때는 바야흐로 소성(紹聖) 개원(改元) 갑술년(1094)이었다.
문인 행초(行初)가 그의 행적을 모아 촉승(蜀僧) 윤평(允平)에게 정리하도록 명하니 모든 일이 빈틈없다고 할 만하다. 「속승보전(續僧寶傳)」에는 계남스님을 첫머리에 기록하였지만 자세한 행적은 밝히지 못하였으니,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이 아니겠는가?
21. 승려에게 재물과 밥을 보시하는 일
지주(池州) 매산현(梅山縣) 우구사(愚丘寺)의 종(宗)선사는 연당거사(練塘居士) 홍경선(洪慶善)이 강동(江東) 절도사에 부임한 인연으로 산중에서 밤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홍거사가 승려에게 밥을 보시하는 것[飯僧]은 어느 경에 나와있으며 그 뜻은 어디에 있느냐도 묻자, 종선사가 대답하였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백사람 악인에게 밥을 보시하는 것은 한 선인(善人)에게 보시하는니만 못하고 나아가서 천억의 삼세제불에게 밥 보시를 하는 것은 한사람의 무주(無住) 무작(無作) 무증(無證) 자에게 보시하느니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닦고 깨달을 것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정념(正念)으로서 완전한 해탈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밥 보시를 한다면 그 공덕은 모든 부처에게 공양하는 것 이상이며 그러나 선배 큰스님들 중에는 이 뜻을 아는 자가 많았습니다."
"누가 그런 사람입니까?"
"우선 가까운 사람을 예로 들면, 진소유(秦少游)는 등주(滕州)에서 귀양살이하면서 스스로 자기 만장(挽章 : 장송곡)을 지었는데 그중에 '누가 사부대중에게 밥을 보시할까?'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소동파는 진소유의 계획을 들은 후 서신과 함께 은 5냥을 보내면서 범원장(范元長)에게 진소유를 위하여 밥보시를 하라고 권하였습니다. 소동파가 북쪽으로 가는 길에 비릉(毘陵)에 이르러 병환으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자 태학사들이 돈을 모아 동경(東京) 혜림사(慧林寺)의 승려들에게 밥시주를 하였는데 소황(蘇黃)의 문도가 소동파의 묘지명을 쓸 때 이 사실을 첫머리에 기록하였다."
"금전을 시주한다는 근거가 있습니까?"
"그대는 모시(毛詩)의 「소아 녹명(小雅鹿鳴)」편을 보지 못했습니까? 많은 신하와 손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 음식을 대접한 다음 다시 광주리에 예물을 가득히 채워 성의를 나타낸 바 있습니다. 이는 음식만으로는 존경의 마음을 모두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선물을 주어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를 위하여 정진공(丁晉公)의 「재승소(齋僧疏)」를 외워 주었다.
"부처님은 두루한 지혜를 내리시고 도로써 많은 중생을 기르시어 위태로움을 구제할 때에는 반드시 미리 큰 복을 내리십니다. 나는 천민으로서 관록을 받게 되어 외람되게 재상의 중책을 맡았고 성상의 은총과 선황제의 넓으신 보살핌으로 중산보의 곤룡포를 입게되었습니다. 정성을 다해 부열(傅悅商代의 신하. 충성스런 간언을 하다가 끓는 국 솥에 던져졌다)의 국을 끓였으나 많은 사람의 입맛에 맞추기는 어려웠습니다.
어느날 밤 깊은 잠결에 갑자기 부처님이 나타나시어 현묘한 가르침으로 시원시원하게 세속에 찌든 마음을 깨닫게 해주셨으나 비밀스런 참 모습을, 안타까워라! 범인의 눈으로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지혜가 몸에 가득하지 못하여 일은 영영 어긋나고 해가 다가오고 재앙이 임박해도 헤아리지 못하다가 재앙이 닥치고 난 뒤에야 예사일이 아닌 데 놀랐습니다. 벼슬에서 쫓겨나 서경을 향할 적에 성은이 너그러우심에 감격하였고 남쪽 땅의 귀양살이에 충성으로 마음 달갑게 여겼습니다. 허물은 내 스스로 마련한 것이요 재앙이 남 때문에 만들어진 게 아니지만 온집안이 사방으로 흩어진 것을 생각하니 만리를 바라봄에 어디로 돌아 가겠습니까. 이미 나라를 저버린 신하가 되었으니 영원히 나라를 경륜할 재주가 사라졌습니다.
귀양살이 가는 길에 소상강을 구경하고 영산으로 길으 드니 바야흐로 번뇌에 잠긴 몸이 생각잖게 청량한 대중을 만나 비로소 부귀란 시종 지키기 어려운 줄 알았습니다. 설령 고관대작의 진수성찬이라도 한 발우의 국맛만 하겠는가만 다만 삼보에 귀명하는 예를 갖추고자 삼가 정성을 내는 바입니다. 경건히 백금을 시주하여 청정한 공양비에 충당함은 덕망높은 스님들께 공양하고 나찬(嬾瓚)스님의 깊은 자비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이번 길에 별다른 일 없게 해주고 엎드려 원하노니 성상께서 남녘을 보살피시어 은택을 내리사 변방에서의 귀양살이 백주에 귀신과 함께함을 풀어주시고 중원으로 돌아가도록 하여 주시면 황천에서 또다시 천은에 감격할 것입니다. 삼가 충심을 기울여 길이 법력에 의지하고자 하나이다."
홍거사는 "내, 요사이 「명신전(名臣傳)」을 읽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중산보의 곤룡포를 입고 부열의 국을 끓이다'라는 한 구절만을 보았는데 오늘 그 전문을 들었다."고 하였다. 그의 정성어린 기도는 이와 같았다.
22. 천 법용(泉法湧)스님이 황룡 사심(黃龍死心)선사에게 입실하다
황룡사(黃龍寺) 사심(死心)선사는 촉승(蜀僧) 천 법용(泉法湧)이 입실하자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시를 읊을 줄 안다하니, 시 한 편 읊어보아라."
"스님께서 제목을 내 주십시오."
이에 사심선사가 불자를 세워 보이자 천 법용이 시를 읊었다.
일구(一句)를 좌중에서 얻었지만
한 조각 마음은 하늘 밖에서 왔노라.
一句坐中得 片心天外來
사심스님이 "사천땅 버릇없는 애가 운(韻)자도 못맞추는구나." 하자, 천 법용스님이 "엉터리 시관(試官)이 좁쌀같이 많도다."하고는 소매를 털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얼마 수 사심선사는 법어에서 "이 황룡장노는 번뇌에 부딪치지만 마음자리를 논하자면 붉은 태양이 찬란히 빛나도다."라고 하였는데, 어느 사람이 "번뇌에 부딪친다[觸着煩惱]"는 말을 '머리가 없다[無頭無腦]'라고 바꿔 썼다. 사심선사가 이 말을 듣고 성을 내며 꾸짖으니, 천 법용이 말하였다.
"이 말이야말로 스님께 광채를 내줄 것입니다."
"사천 중은 헛 다리를 내밀지 말라."
"조사의 게송에 '진성의 심지장에는 머리도 꼬리도 없도다. [眞性心地藏 無頭又無尾]'하였는데 여기에 무슨 다리가 있겠습니까?"
이 말에 사심선사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폈다.
사심선사가 일찍이 육조스님을 찬하였다.
육조스님은 그 당시 장부가 아니었다
남의 손을 빌려 벽 위에 글을 썼을 뿐 자신은 불투명했으니
분명히 게송에는 '무물(無物)'이라 말하고
도리어 남의 집 발우를 받았다네.
六祖當年不丈夫 倩人書壁自塗糊
明明有偈言無物 却受佗家一鉢盂
당시 이 운(韻)자를 따라서 화답한 사람이 많았으나 사심선사는 또다시 그 원래 운[元韻]에 따라 게를 지어 천스님에게 주었다.
그대 싯구 훌륭하여 장부보다 훌륭하니
말하는 그 기상 불투명한 곳이 없네
알지어다! 뜻을 얻으면 흐르는 물과 같아
황매에서의 발우 다툼을 우습게 만든느 줄을.
絶句精明勝丈夫 出言吐氣不麻胡
須知得意如流水 笑殺黃梅爭鉢盂
천스님은 얼마 후 송을 지어 사심선사를 이별하였는데 그 가운데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나는 모른다[조의서래아부지]'라는 구절이 있었다. 사심선사는 그 구절을 들어 염송하여 그를 송별하였다.
조사의 '서래의(西來意)'를 나는 모른다
알았을 때도 불성의 경지엔 들어가지 못하리
불성의 경지에서 불성의 뜻을 완전히 깨달아야
비로소 마음 근원이 홀로 돌아감을 믿으리.
祖意西來我不知 知時未得入離微
離微徹了離微旨 始信心源獨自歸
'선림고경총서 > 운와기담雲臥紀談'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운와기담 上 26~30. (0) | 2015.10.15 |
---|---|
운와기담 上 23~25. (0) | 2015.10.15 |
운와기담 上 16~19. (0) | 2015.10.13 |
운와기담 上 12~15. (0) | 2015.10.12 |
운와기담 上 9~11. (0) | 2015.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