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부도탑에서 읊은 게송 / 남산 융(南山隆)수좌
융(南山隆)수좌의 법호는 남산 수(南山叟)이며 청원(淸源) 남안(南安) 사람이다. 젊은 시절 많은 곳을 참방하여 덕망 높은 스님을 많이 친견하였다. 파참(罷參) 후 업해(業海)스님의 부도탑에 예배하고 게송을 읊었다.
업해스님이 업의 바다 깡그리 말린 줄 알았더니만
여전히 겁석(劫石 : 부도탑)의 그림자를 덩그렇게 남겼네
내 여기에 찾아와 웃음 뒤에 오열을 삼키며 통곡한 것은
지난 날 그 배가 여기에서 뒤짚혔기 때문이라오.
業火煎熬業海乾 尙餘劫石影團團
我來笑罷呑聲哭 昔日船從此處翻
치둔(癡鈍)스님의 부도탑을 청소하다가 게송을 읊었다.
풀로 만든 빗자루, 값어치 없는 거라지만
'나무도 쓰러지고 등넝쿨도 마르면'이라고 한 옛 법어는 그 예전엔 귀중한 것
한 세대 지나 또 한 세대 지나도록
삿된 법이란 부지하기 어려움이 여전하지.
生苕苕柄背時貨 樹倒藤枯舊陣圖
一代年來低一代 灼然邪法實難扶
남산 수(南山叟)스님은 무은(無隱), 쌍삼(雙杉), 형수(荆叟)스님과 함께 치둔스님을 가장 오랫동안 시봉하였다.
8. 회암 휘(晦嵓暉)선사의 하안거 해제 법문
서촉(西蜀) 보복사(保福寺)의 회암 휘(晦嵓暉)선사는 통천 백씨(通泉白氏) 자손이다. 일찍이 조 낙암(肇諾庵), 도 곡원(道谷源), 개 엄실(開掩室)스님 등과 함께 송원(松源)스님의 문하에 동참하여 도의 요체(要諦)를 깨달았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세 차례나 도량의 주지가 되어 원근 사람의 존경을 받았고, 교화가 더욱 성하였다.
하안거 해제 때 소참법문을 하였다.
"큰 지혜는 밝아서 시방세계를 녹인다. 성색을 초월하고 고금을 뛰어넘으니 침묵으로도 알 수 없고 말로서도 이 경지에 나아갈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대각세존(大覺世尊)께서는 마갈제국에서 21일간 입을 열지 않다가 네 곳에서 힘을 다해 설법하시되, '이 법은 사량분별로 알 수 없는 것이다' 하고 또 말씀하셨다. '이 법은 말이나 글로써 보일 수 없으니 그 상(相)이 적멸하기 때문이다'라고. 이렇게 들어 보여줌은 비유하자면 절벽에서 돌이 떨어지는 것과 같으므로 보는 사람은 다른 곳에 눈을 팔 수가 없는 것이다. 반드시 한 생각에 잘못을 알아서 앞뒤가 딱 끊겨 전체를 짊어지고 가는 것이 참다운 정진이며, 참 법으로 여래께 공양하는 것이다. 한 차례 영산회상의 모임이 엄연히 흩어지지 않으니 이와 같이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한 생각 한 생각을 보살펴야 한다. 또 어찌하여 90일 동안에 오랏줄 없이 스스로를 묶어두려 하는가? 그렇지만 납의를 머리에 뒤집어쓰면 모든 것이 그만이니 이럴 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의 법어는 대개 이와 같았다.
치절(癡絶)스님이 장산(蔣山)에 있으면서 그의 어록에 머릿글을 썼다.
"대수(大隨)화상의 말에 의하면 그가 70여 명의 선지식을 만나 보았으나, 그 중에 큰 안목을 지닌 분은 한두 사람에 불과하였고 그 밖의 사람은 바른 지견(知見)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내가 30여년 전 총림에서 서 회암(晦嵓)스님과 함께 행각할 때는 큰 안목을 지닌 분은 송원(松源) 노스님 한 사람 뿐이었다. 경인(庚寅)년 8월, 그의 문도 보일(寶日)스님이 동림사(東林寺)에서 주지하며 스승의 법문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편집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 계기로 그의 어록을 펼쳐보며 한 글자 한 구절을 모두 훑어보게 되었는데, 경황 중에 했던 법문이라도 모두 옛부터 내려오는 큰 안목을 지니고 있었고, 그 바탕은 한갓 지말적인 언어에 힘쓴 것은 아니었다. 이로써 송원스님의 도가 모두 이 책 속에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 옛날과 멀어질수록 스님의 법도 따라 점점 무너져 바른 지견을 지닌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우니 큰 안목을 지닌 자는 더욱 짐작할 만하다. 회암스님의 말씀은 이 촉땅에서 행하였지만, 이 어록이 강호에 널리 전해지면 우리 불도에 있어서 믿을 수 있는 어록이 될 것이다. 이 어록을 잘 읽는 사람만이 나의 말이 망언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치절스님도 읽고 감격한 바 있어 이런 말을 하였을 것이다.
9. 판관이라는 별명이 붙은 스님 / 절옹 순(岊翁淳)선사
복주(福州) 성천사(聖泉寺)의 절옹 순(岊翁淳)선사는 타고난 자질이 특출난 분이었다. 일찍이 설봉사(雪峰寺)의 여름 결제에서 오산각(鼇山閣) 중건을 보고 게송을 지었다.
야반삼경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더니
한 줄기 풀 위에 옥루가 나타나네
발걸음이 같을 수야 없지만
달빛과 바람결은 한결같이 수심깊네.
夜半天崩地陷休 一莖草上現瓊樓
儂雖先後不同步 月幌風櫺一樣愁
당시 이 게송은 많은 사람이 다투어 외웠다.
운소(雲巢), 무준(無準)스님은 지난 날 함께 행각하면서 모두 스님을 성심으로 존경하였다. 스님은 총림에서 선문답을 할 때 논변이 뛰어나 '선판관(禪判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0. 승천사(承天寺) 승당기(僧堂記) / 천산 태초(泉山太初)선사
담주(潭州) 대위사(大潙寺)의 천산 초(泉山太初)선사는 자가 자우(子愚)이며, 천주 진씨(泉州陳氏) 자손이다. 처음엔 유학을 공부하여 '향선생(鄕先生)'이라 불리웠으나 뒷날 조주스님의 어록을 보고 느낀 바 있어 삭발하고 비구계를 받았으며, 선지식을 두루 참방하여 영 목암(永木庵)스님의 수제자가 되었다. 고향의 「승천사 승당기(承天寺 僧堂記)」를 지은 바 있다.
"승천사 큰 법당이 중건된 지 100여 년, 겉모습이야 장엄해 보이지만 내부는 좀이 먹은 줄을 아는 사람이 없다. 이에 주지 요공(了空)스님이 부서진 곳만을 수리하려 하였으나 시주하는 사람이 즐거워하고 공사하는 사람이 기뻐하여 반년이 채 못되어 완성을 보게 되었다. 조당(照堂)이 뒤편에 둘러 있고 명루(明樓)는 앞에 있다. 이 일을 전담한 분은 도본(道本)과 종분(從賁)스님이고, 가을에 착공하여 겨울에 준공하였다. 이에 요공스님이 좋은 날을 가려 대중을 거느리고 들어가 사니 그날이 바로 가정(嘉定) 6년(1213) 12월 19일이다. 비구 태초(太初)는 이를 기록하는 바이다."
이 글은 겨우 아흔 두 글자이다. 그 당시 서산 진공(西山 眞空 : 眞德秀)이 이 고을을 다스렸는데, 이 「승당기」를 보고 기뻐하여 후일 호남성에 있을 때 스님에게 서신을 보내 초청하니 스님은 대위사에서 20년을 주지하다가 입적하였다.
11. 소암 울(嘯巖蔚)선사의 섣달 그믐 대중법문
소암 울(嘯巖蔚)선사가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1년 360에서 오늘 아침은 마치 새 친구를 사귀는 날과 같구나. 말해 보아라. 하늘에서 내려준 옷 한 벌을 가지고 어떻게 사람들과 제야(除夜)를 보낼꼬?"
주장자를 뽑아들고 말하였다.
"하지 않는다면 모르되 했다하면 쉬지 말아야 한다. 돌호랑이를 삶고 진흙소의 껍질을 벗겨 이처럼 수북이 소반 위에 담아내 왔구나."
주장자로 탁자를 치며 말하였다.
"삼덕육미(三德六味)를 부처님과 스님에게 시주하니, 법계 중생 모두가 함께 공양하는구나. 삼덕육미가 어금니에 달라붙고 이 사이에 끼여있는 자들은 아마 우리의 가풍이 냉담하다고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한번 뼈다귀를 깨물어 보면 자연히 즐겨 시름을 잊게 되리라. 비록 그렇다하지만 내년 봄에 새 가지가 돋아 봄바람에 끊임없이 어지럽혀지리라."
소암스님의 말은 마치 혜강(嵆康)*과 같고 키는 일곱자 여덟치이며, 맑은 목소리에 아름다운 풍채를 지녔다. 멋을 내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에게 용과 봉황과 같은 자태가 넘친다고들 하였다. 아!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 혜강 : 진(晉)나라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노장학을 좋아하여 양생편(養生篇)을 지었다.
12. 치절 도충(癡絶道沖)선사의 말년 법문
치절 충(癡絶道沖)선사가 말하였다.
"내가 소희(紹熙) 임자년(1192) 삼협(三峽)에서 나와 공안(公安) 이성사(二聖寺)에서 여름 결제를 보내고 있을 때, 송원스님은 요주(饒州) 천복사(薦福寺)에서 밀암스님의 도를 펼치고 있었는데 혹심한 가뭄으로 대중스님을 보살피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때마침 서호(西湖) 묘과사(妙果寺)에 빈 자리가 있자 송원스님은 운거사(雲居寺)의 수좌 조원(曺源)스님을 추천하니 조원스님 또한 밀암스님의 법제자이다. 그가 산문을 들어서면서 송원스님이 제창하는 법어를 듣고 깨달은 바 있었다. 이에 정성을 다하여 가서 머물다가 얼마 후 다시 되돌아와 시사승(侍司僧)이 되었다. 갑인년(1194) 여름 조원스님은 귀봉사(龜峰寺)로 올라오라는 송원스님의 서찰을 받고 다시 그를 따라 3년간 머물다가 절(浙)땅으로 나왔으며 송원스님은 호구사를 거쳐 영은사로 옮겨왔다. 그 당시 둔암(遯庵)스님은 화장사(華藏寺)의 주지를, 긍당(肯堂)스님은 정자사(淨慈寺)의 주지를 하였으나 모두 송원스님을 따랐다. 송원스님이 영은사에 계실 때 그 문하의 법도가 준엄하여 여덟달이 지나서야 승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방부 들이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나 꾸짖어 쫓아버려 가까이할 수가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문을 활짝 열고 방부 들이려는 이들을 다 받아준다면 내 스스로 허물을 짓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예전 귀봉사에 3년 동안 있을 때 조원스님이 성내고 꾸짖고 희롱하고 비웃고 했던 모든 일들이 모두 위하는 방편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천하의 높은 스님들이 오든 안오든 나를 속이지 못하였고, 인연을 따라 자유로운 생활을 하였다. 조원스님이 입적한 지 20년 후 사람들의 추천으로 세상에 나왔으나 그의 영전에 한 묶음의 향을 올리며 그를 잊지 못하였다. 내 여섯 사찰의 주지를 지내는 동안 모여든 대중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겸손히 은거하는 자가 적으니 괴로운 일이다. 우리 종파는 망하였도다. 올해 내 나이 여든 둘이다. 이젠 죽을 날이 머지 않은데 병든 몸을 안고 기록하여 법통을 얻을 수 있는 실마리를 서술하여 부도 뒷면에 새겨 지극한 마음을 밝히고자 한다. 이 해는 순우(淳祐) 10년(1250) 경술년이다."
아! 치절스님은 세상에서 말하는, 소반 위에 구슬이 구르듯 대기대용(大機大用)이 자유자재한 분이었다. 그러나 더욱 빛나는 점은 스승이 죽은 후 20년 만에야 비로소 주지에 임하니 이는 이른바 '기미를 보고 떴다가 한바퀴 돌고서 내려 앉는 것'이며 구만리 하늘을 나는 붕조(鵬鳥)와 같은 큰 활보였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타인에 의하여 오르내리는 일을 용납하지 않았고 또한 그의 견식은 남보다 뛰어났다. 이것이 그의 명성이 일세를 진동할 수 있었던 이유이며 중봉(中峰)스님의 도를 일으켜 세운 징험 또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만년에 우리 종파는 망했다고 근심하였으니, 이 말을 듣고 가슴아프지 않을 자 있겠는가.
'선림고경총서 > 고애만록枯崖漫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애만록 下 19~24. (0) | 2016.02.20 |
---|---|
고애만록 下 13~18. (0) | 2016.02.17 |
고애만록 下 1~6. (0) | 2016.02.15 |
고애만록 中 44~51. (0) | 2016.02.14 |
고애만록 中 37~43. (0) | 2016.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