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산암잡록山菴雜錄

서(4)

쪽빛마루 2016. 2. 22. 19:18

서(4)

 

 

 나는 평소 병 많은 몸으로 노년에 일본의 주청(奏請)에 관한 일로 조정의 부름을 받아 서울에 올라가게 되었다. 이에 혼자 생각해 보니 설령 일본을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떻게 살아 돌아올 수 있겠나 싶었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성상폐하께서 나를 가엾게 여겨 특별히 일본의 주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궁궐에 머물게 하셨다. 그리고 나서도 온갖 병들이 끊임없이 나의 몸을 침범하여 세번이나 죽을 뻔 했지만 또한 천행으로 폐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천동사(天童寺) 옛절로 돌아가도록 명하시니, 친구들은 내가 마치 다시 세상에 태어나기라도 한 듯이 반겼다.

 내 나이 칠십에 가까운데 만 번 죽을 고비를 겪고 다시 한번 삶을 얻게 되었기에, 이제 문을 닫고 모든 인연을 끊은 채 여생을 마칠까 하였는데 법질(法姪) 장경중(莊敬中)이 자주 나의 암자에 찾아와 이렇게 청하였다.

 "당 · 송 시대 큰스님들의 말씀과 저서는 끊이지 않고 간간이 세상에 나왔었는데 원 대부터는 이러한 일이 드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근래 큰스님들의 법문과, 총림의 귀감이 될 만한 아름다운 말씀이나 행실들이 대부분 없어져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노스님께서는 총림의 전성시대를 맞이하여 많은 큰스님을 두루 참방하여 넓은 견문을 지니셨습니다. 제가 항상 노스님을 모시면서 들은 한두 가지 일만 해도 모두 이제껏 듣지 못했던 이야기로서 저를 더욱 깊이 일깨워주었습니다. 바라옵건대 노스님께서는 그저 유희 삼아[遊戱三昧]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위로는 옛 스님의 숨겨진 빛을 나타내시고 아래로는 후학들의 고질병을 벗겨 주신다면 불법문중의 경사가 되리라 믿기에 감히 간청을 드리는 바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대의 마음이야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내 말은 문장이 될 수 없으니 말을 하되 문장으로 잘 표현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먼 훗날까지 전해질 수 있겠는가? 이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경중은 또다시 말하였다.

 "이제 불법은 쇠하고 선배스님들도 거의 사라지셨습니다. 이런 때 노스님께서 먼곳에서 돌아오실 줄은 실로 예기치 못했던 일이었는데, 노스님께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거절하신다면 장차 누가 이 일을 맡겠습니까? 문장이 잘되고 못되고를 어찌 따지겠습니까? 사실대로 기록하여 그 일을 밝힐 수만 있다면 충분합니다. 바라옵건대 굳이 사양하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나는 평소 스승과 도반이 강론했던 법어들과 강호에서 보고 들은 일 가운데 기연(機緣)의 문답과 선악의 인과응보, 그리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 낱낱의 처신 등을, 시대의 선후와 인물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후배들을 일깨울 수 있는 일이라면 생각나는대로 붓 가는대로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하고 이를 「산암잡록(山艤雜錄)」이라 이름하였다.

 지난 송대(宋代)에 큰스님이 편수한, 이른바 「나호야록(羅湖野錄)」 「운와기담(雲臥紀談)」 등에 기재된 바는 불법의 제일의제(第一義諦)를 고무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내 젊은 시절 이러한 류에 대한 기억이 있었으나 이제는 십중팔구는 잊어버렸고, 노년에 바다 한쪽 끝에 살다보니 사람들에게 물어 많은 자료를 채집할 수도 없었다. 이에 따라 빠진 것이 많음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바이다.

 말을 하되 도로써 하는 것은 지극한 말로써 일찍이 말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이밖의 것은 나의 분수에 벗어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총림에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의 붓을 잡는 자가 있다면 어쩜 이를 채택해 주지 않을까 한다.


홍무(洪武) 8년(1375) 12월 15일 천태산인(天台山人) 석 무온(繹無)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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