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불법문중에 잘못되어가는 일을 바로잡다 / 봉산 의(鳳山儀)법사
근대 우리 선문에는 상황에 맞게 방편을 쓰되 옛사람의 묵은 발자취를 답습하지 않고 자신의 기지로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고 불법을 구정(九鼎)*보다도 무겁게 하신 탁월한 분들이 많았었는데, 지금 그러한 스님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항주 하천축사(下天竺寺) 봉산 의(鳳山儀)법사는 원대(元代) 연우(延祐1314~ ) 초에 '삼장 홍려경(三藏鴻臚卿)'이라는 호를 하사받았으나 그 작록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법문중에 조금치라도 어긋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바로 잡았다.
고려 부마(駙馬) 심왕(瀋王)이 황제의 칙명으로 보타관음(寶陀觀音)을 예배하러 가는 길에 항주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는 주머니 돈으로 명경사(明慶寺)를 찾아가 재를 올리고 많은 사찰의 주지를 위해 공양하였다. 성관(省官) 이하 여러 관아의 관리들이 직접 그 일을 감독하였으며, 서열을 정함에 있어서는 심왕을 강당의 중앙 법좌 위에 자리하고 모든 관리는 서열에 따라 법좌 위에 줄지어 앉고 사찰의 주지들은 양쪽 옆으로 앉게 하였다. 자리를 모두 안배한 후 법사는 맨 나중에 왔는데 오자마자 법좌 위로 달려가 왕에게 물었다.
"오늘의 재는 누구를 위한 재입니까?”
"많은 사찰의 주지를 공양하기 위함입니다.”
"대왕께서 많은 사찰의 주지를 공양하기 위함이라 말하고서도, 이제 주인의 자리는 없고 왕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아 모든 주지들을 양 옆으로 줄지어 앉히고 심지어는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자도 있으니, 이는 순라 도는 병졸들을 공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예법에는 이렇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황공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사과하고 곧장 법좌에서 내려와 많은 사찰의 주지에게 예의를 표한 후 손님과 주인의 자리를 나누어 모든 관리들은 양 옆의 주지가 앉았던 곳으로 물러나 앉았다. 공양이 끝난 후 왕은 법사의 손을 잡고 말했다. "우리 법사가 아니었더라면 예의를 차리지 못할 뻔하였습니다.”
아! 이른바 상황에 맞게 방편을 써서 사람의 마음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이란 봉산법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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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정(九鼎) :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주조했다는 큰 솥.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보배.
8. 혐의 받을 행동을 미리 막다 / 허곡(虛谷希陵)스님
허곡(虛谷希陵)스님이 앙산사에서 사직하고 경산사로 부임해 가는 도중에 원주(袁州)성에 이르니 사방에서 시주하는 신도들의 돈과 폐백 등이 수북히 쌓였다. 허곡화상은 서서히 이를 거절하며 말하였다.
"내 똑똑하지는 못하나 나로 인하여 양절(兩浙 : 浙江의 옛명칭) 지방의 여러 사원에서 선문의 종지를 알게 되었는데, 경산사 주지 자리가 비어 나를 부르는 뜻은 나에게 개당설법(開堂說法)을 하여 선문의 종지를 밝혀달라는 것이다. 내 어찌 가난 때문에 사람들에게 의혹을 사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이 보내주신 물건들은 도로 가져가시어 나에게 '신화엄(新華嚴)'이라는 꾸지람을 듣지 않도록 해주기를 바라오.”
시자승에게 꼭 필요한 행장만을 꾸려 그를 따르도록 명하였다.
9. 봉산 일원(鳳山一源)스님의 염고(拈古)
나는 천력(天曆 : 1329~1330) 연간에 호주(湖州) 봉산사(鳳山寺)에서 일원 영(一源靈)스님을 찾아뵙고, 조주스님이 오대산 노파를 시험했다는 화두를 참구했으나 깨치지 못했다. 하루는 시봉하는 차에 이 화두를 들어 물으니, 스님께서 말하였다.
"내 젊은 날 태주(台州) 서암사(瑞岩寺) 방산(方山文寶)화상의 문하에 있을 때 유나(維那)를 맡아 보면서 나 역시 이 화두를 물었더니 방산화상이 말씀하시기를, '영유나(靈維那)야, 네가 한마디 해 보아라.'하셨다. 나는 그 당시 입에서 나오는대로 '온누리 사람들이 노파를 어찌할 수 없다'고 하였더니, 방산화상은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온누리 사람들이 조주스님을 어찌할 수 없다고 하겠다' 하였다. 나는 그 당시 마치 굶주린 사람이 밥을 얻은 것마냥, 병든 이가 땀을 흘린 것처럼 스스로 기쁨을 알았다.”
이어서 말하였다.
"시자야! 너는 달리 한마디 해보아라.”
나는 그 당시 인사하고 곧장 그곳을 떠나버렸다. 내 기억으로는 지난날 스님이 처음 이곳에 부임하여 상당법문을 할 때 '세존이 법좌에 오르시자 문수가 백추를 치고…'라는 공안*을 들어 설법한 후 염송하였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잘못 말씀하시고
문수도 이것을 잘못 전했으며
오늘 나도 이것을 잘못 거론했도다.
알겠는가.
한 글자를 세차례 베껴쓰면
오(烏)자와 언(焉)자는 마(馬)가 되느니라.
世尊以是錯說 文殊以是錯傳
新鳳山今日以是錯擧
會麽 字經三寫烏焉成馬
그 당시 은사 축원(竺元)스님은 육화탑(六和塔)에 은거하면서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선정원(宣政院)*에서 수많은 노스님을 천거하였으나 봉산(일원)스님이 조금 나은 편'이라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일원스님은 영해(寧海) 사람이며 경산사 운봉(雲峰)스님이 직접 머리 깎아 준 제자인데 주지로 세상에 나와서는 방산스님의 법을 이었다. 인품이 자애롭고 참을성이 있어 남을 용납하는 아량이 있었으며 제자들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스님께서 입적하자 그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 모두가 애도해 마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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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존께서 어느 날 자리에 오르시자 대중이 모였다. 문수가 백추(白槌)를 치고 말하되 "법왕의 법을 자세히 살펴보니 법왕의 법이 이러하나이다"하니 세존께서 자리에서 내려오셨다.
* 선정원 : 원(元)나라 때 불교의 승속과 티벳, 트루판을 관리하던 관청.
10. 불경과 장자에 나오는 몸 큰 물고기
불경에 의하면, 바다 한가운데 산 만한 물고기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등 위에는 큰 나무가 솟아 있고 밤낮없이 업장의 바람에 뒤흔들려 무어라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하였고, 장자(莊子)에도 북해에 곤(鯤)이라는 고기가 있는데 몇 천리가 되는지 크기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지정(至正) 계묘년(1363)에 노아천(奴兒千)에서 왔다는 아무개의 말에 의하면, 얼마 전 그곳에 산 만한 고기 한 마리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 고기가 바다를 지날 때 물 위로 기나긴 지느러미가 보이고 등과 꼬리를 흔들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유유히 헤엄쳐 갔는데 나흘이 지나서야 그 물고기의 몸통이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이른바 '몸 큰 중생의 옛날 업장에 의한 감응'이라는 것이 이러하다. 그러나 아수라왕(阿修羅王)이 큰 바다 가운데 서 있으면 키가 수미산 만하고 두 손으로 일월을 가지고 논다 하였으니, 그가 이 물고기를 보았다면 한낱 작은 물고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세간 사람들이란 자신의 이목으로 보고 듣는 데에 막히므로 그의 이목이 미치지 못하는 그밖의 일은 모두 허황된 것이라 생각하니, 한심스러운 일이다.
11. 「선문종요(禪門宗要)」의 저자에 관하여
「선문종요(禪門宗要)」는 설산 담(雪山曇)스님이 지은 책이다. 설산스님이 송 순우(宋淳祐 : 1241~1252) 연간에 태주(台州) 서암사(瑞岩寺)의 방산(方山)스님에게 귀의하여 완성한 책이니 어찌 구차스럽게 이루어졌겠는가.
내 젊은 날 봉산사의 일원 영(一源靈)스님에게 공부할 때, 스님은 야참(夜參)법문에서 문득 이 「선문종요」에 대해 언급하며, “그 중에는 옛사람이 이르지 못한 경지를 들어 말한 곳이 있기는 하나 나머지는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그 책을 내려주면서 읽어보라고 하였다. 그후 40여 년이 지나 천의사(天衣寺) 청업해(淸業海)라는 자가 자상하게도 이 책을 중간하면서 자기도 서문을 쓰고 용장준(用章悛)에게도 서문을 써달라 하였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가, '설산스님이 남의 문집을 도용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간행했다'고 하면서 '은공단강(恩公斷江)' 한마디를 증거로 제시하였고, 게다가 이를 10권으로 분책하고 매 편마다 본문에서 한마디씩을 뽑아 제목을 붙였으니 인용하여 본문의 취지를 잃은 곳이 매우 많다. 나는 뒷 사람들이 이 책의 유래를 자세히 알지 못하고서 도리어 업해스님의 말을 긍정하여 설산스님에게 누를 끼칠까 근심한 나머지 이를 기록하는 바이다.
12. 요즘 총림의 도반관계와 사자관계
호구사 동주(東州壽永)스님과 영은사 독고 붕(獨孤淳朋)스님은 같은 고향에 동문수학한 사이로서 우의가 매우 두터웠다. 동주스님이 호구사 주지로 있던 어느 날 때마침 성 안에 있었는데 만수사(萬壽寺) 주지자리가 비었다고 제방의 주지가 독고스님을 그곳에 추천하자 하였다. 당시 독고스님은 호주(湖州) 천령사(天寧寺)의 주지로 있었으므로(만수사의 주지가 되는 일은) 단계를 밟아 승진하는 것이지 결코 단계를 뛰어넘는 일이 아닌데도 동주스님은 힘을 다해 저지하였다. 그러나 독고스님은 이 말을 듣고서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해가 지나 동주스님은 화주(化主)할 일이 있어 호주(湖州)에 갔다. 그는 이에 독고스님을 만나보고 싶었지만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에 만나지 않았고, 또한 그가 자기를 헐뜯어 모연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갈까 두려워하여 일부러 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천령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독고스님은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속히 돌아와 예를 다하여 숙소와 음식을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돈을 털어 모연을 돕고 그를 위하여 앞장서서 주선하며 조금도 전과 다를 바 없이 편히 대하면서 옛 우정을 나누었다. 동주스님이 호구사로 돌아온 후 깊은 밤에 방장실 치상각(致爽閣)에서 서성대며 스스로를 돌이켜, '독고는 군자이고 수영(壽永)은 소인'이라고 하였다.
내 요즘 총림에서 도반이라고 하는 자들을 살펴보니 말 한마디나 작은 잇끝으로 서로 다투며 나아가서는 서로 헐뜯고 모함하여 상대방의 명줄을 끊어놓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자들이 있다. 독고스님의 너그러운 우정과 동주스님의 반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제자가 스승의 잘못을 덮어주고 스승의 훌륭함을 드러내며 옳은 일을 따르고 잘못을 저버리는 것을 효도라 하고, 스승의 선을 가리우고 잘못만을 들춰내며 옳은 일에 등을 돌리고 잘못된 일은 따르는 것을 불효라 한다. 만일 스승에게 드러낼 만한 선이 없다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억지로 선이 있는 것처럼 꾸며 다른 사람들이 쑥덕거리게 만들어 도리어 스승의 불선을 들춰내게 한다거나, 순종할 수 없을 경우에는 스승에게 간언해야 옳은데도 어거지로 옳은 일이라 여기고 순종하여 다른 사람들이 쑥덕거리게 만들어 도리어 스승의 비리를 들춰내게 하는 일 또한 불효라 하겠다.
내가 요사이 여러 곳의 큰스님들이 열반하는 일을 살펴보니 그 제자들이 행장을 잘 갖추어 유명한 자에게 비명을 부탁하되, 거기에는 반드시 그가 태어날 때 부모의 남다른 현몽을 기록한다거나 죽어서 화장하였을 때 치아와 염주 등이 부숴지지 않았고, 사리가 수없이 나왔노라 기록하고, 이러한 몇 줄의 문장이 없으면 큰스님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변변치 못한 제자들이 바른 이치를 알지 못하고 부질없이 거짓말을 꾸며 자기 스승에게 욕을 끼치는 일이니 효도라 할 수 있겠는가? 「전등록(傳燈錄)」에 실려 있는 1,700명의 선지식 가운데 사리가 나왔던 분은 겨우 14명이었으며, 적음(寂音)존자가 저술한 「승보전(僧寶傳)」에 실려 있는 81명의 선사 가운데 사리가 있었던 분은 몇 사람에 불과하였다.
무엇보다도 우리 선문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오로지 종지를 통달하고 설법을 잘하는 일이다. 향상(向上)의 수단으로 사람들의 속박을 풀어 없애주는 일을, 법을 전하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나머지는 모두 지엽과 말단이다. 화장하여 간혹 육신[諸根]이 부서지지 않고 구슬같은 사리가 나오는 것은 평소 그의 수행이 청정했다는 증험이니 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내 두려워하는 것은 후세의 승려들이 서로서로 이러한 일을 모방하여 거짓말을 조작하고 부질없이 자기 스승을 미화하느라 그 사실을 비석에 새겨, 다른 종교 사람들이 읽어 보고 도리어 남다른 기적이 있는 스님들까지 거짓으로 의심하는 일이 생길까 하는 바로 그 점이다. 이러한 일들이 불문에 끼친 폐해는 참으로 적지 않으니 가슴 아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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