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산암잡록山菴雜錄

산암잡록 上 22~28.

쪽빛마루 2016. 2. 22. 19:54

22. 설두사 상장주(常藏主)의 게송 4수

 

 설두사(雪寺)의 상장주(常藏主)는 횡산(橫山)스님의 제자이다. 그의 모습은 몹시 초라하고 일자무식이었으나 오로지 선정(禪定)만을 닦았다. 그가 지은 게송은 현실과 이치에 다 맞고 음률이 막히지 않아 사람들을 크게 일깨우는 점이 있었다. 그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상달마(常達磨)'라고 일컬었다.

 나는 소년시절에 경산사에서 그를 알게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그가 지은 게송 4수를 기억하고 있다. 즉 「철우송(鐵牛頌)」 · 「해문송(海門頌)」 · 「고순송(苦笋頌)」 · 「식암송(息菴頌)」이다.

 「철우송」은 다음과 같다.

 

백번 달군 화롯불 속 재빨리 뛰쳐나와

머리에 솟은 뿔 세속 티끌 멀리하고

때려도 가지 않고 당겨도 꼼짝 않으니

이번 회향에는 결코 포태 속에 들어가지 않으리.

百鍊爐中輥出來  頭角崢嶸體絶挨

打又不行牽不動  這回端不入胞胎

 

 「해문송」은 다음과 같다.

 

업풍이 불어 산처럼 파도치니

고기잡이 늙은이들 발 붙이기 어려워라

목숨과 몸 버리고 밀치고 들어가니

옥문에 자물쇠 없는 줄을 비로소 알았노라.

業風吹起浪如山  多少漁翁著脚難

拚命捨身挨得入  方知玉戶不曾關

 

 「고순송」은 다음과 같다.

 

자줏빛 거죽 다 벗기니 은처럼 새하얀 줄기

펄펄 끓는 솥 속에 이리저리 뒤적인다

이처럼 괴로운 마음 사람들은 믿지 않고

무심히 깨물으며 진미라고 좋아하네.

紫衣脫盡白如銀  百沸鍋中轉得身

自是苦心人不信  等閒咬着味全珍

 

 「식암송」은 다음과 같다.

 

백척간두에서 방법을 묻지 않고

높은 봉우리에서 한가로히 지내는 이 몸

부서진 집 엉성하여 비바람 못가리나

내 집 사정 남에게 말하기도 난처하네.

百尺竿頭罷問津  孤峰絶頂養閒身

雖然破屋無遮蓋  難把家私說向人

 

 

23. 절노비 때문에 입은 명예훼손 / 천뢰(千瀨)스님과 형석(荊石)스님

 

 주지된 사람은 누구나 엄하게 노비를 다스려야 하며 수시로 좋은 말로 그들을 가르쳐야만이 자신에게 누를 끼치는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

 천뢰(千瀨善慶)스님이 가흥(嘉興) 천령사(天寧寺)의 주지로 있을 때 그의 노비가 동네 거리의 개 한 마리를 훔쳐 먹었는데 이 때문에 천뢰스님은 '개 삶아 먹은 스님[煮狗]' 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또한 형석(荆石)스님이 고소(姑蘇) 승천사(承天寺)의 주지로 있을 때 신도 집의 초청을 받고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한 마을을 지나면서 그의 노비가 그 고을 사람의 염소 한 마리를 훔쳐 먹었는데 이 때문에 형석스님은 '염소 삶아 먹은 스님[煮羊]'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개를 훔치고 염소를 훔친 일들이 두 분 스님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마는 그 악명은 몸소 겪어야만 하였다. 이는 평소에 노비들을 엄격히 다스리지 못한 데에서 빚어진 일이라 하겠으니 뒷사람들은 이 두 스님의 전례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24. 속인과 어울려 술판을 벌이다가 / 홍복사(洪福寺) 심석산(琛石山)스님

 

 주지(住持)란 모든 보살이 지혜로 머무는 경계에 머물러[住]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륜을 잘 지키는[持] 자이니, 백장스님이 소위 주지가 되어 명리를 쫓는 이들은 임무가 막주안지 모르는 자들이다. 그런 중에는 간혹 속인들과 사귀며 먹고 마시는 일에 빠져 지내는 이도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태주(台州) 홍복사(洪福寺)의 심석산(琛石山)스님은 절 주변에 사는 속인 방공권(方公權)과 사귀면서 서로 술자리를 돌려가며 날마다 먹고 마시는 것만을 일삼았다. 그 절의 감사(監寺)인 방(方)스님은 창고 일을 맡아보기로 승낙을 받았었는데, 방공권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를 모함하여 못하게 하였다. 이에 방감사는 앙심을 품고 방공권을 독살하려고 방장스님의 시봉에게 뇌물을 주어 그의 차 속에 독약을 넣었다. 그러나 공권이 석산스님을 존경하여 자기 찻잔을 돌려 먼저 드리자 석산스님이 그 차를 마시고 독살되었다. 방감사는 석산스님을 독살시킨 일이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어느 날 콩새 우는 소리를 들어보니 영락없이 '방감독이 날죽여[方監殺我]'하는 것이었다. 이에 근심과 두려움이 더욱 심해져 마침내 병이 되었고 햇볕 보기를 겁내다가 짚을 씹으면서 죽어 갔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석산스님은 자기 직분을 지키지 못하고 속인과 사귀며 그들의 말을 들어준 데서 화근이 되어 마침내는 자신의 생명을 가볍게 잃었으니 뒷사람들은 이를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콩새[桑扈鳥]를 시골 사람들은 단마조(鍛磨鳥)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늦봄이 되어서야 운다. 세속에서는 그 울음소리를 '장감단마(杖監鍛磨 : 짱 찌안 뚜완 뭐)'라 하는데 이 중은 '방감살아(方監殺我 : 팡 찌안 싸 워)로 착각한 것이었다. 티후루[提葫蘆] · 쁘어삥찌아우[婆餅焦] · 퉈뿌쿠[脫布袴] · 니훠훠[泥滑滑] 따위의 새는 모두 그 울음소리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25. 목을 베자 하얀 우유빛 피가 흐르다 / 합존(合尊)대사

 

 합존(合尊)대사는 송나라의 어린 임금 영국공(瀛國公)이다. 원(元) 살선(薩禪 : 世祖)황제에게 귀순하자 황제는 그에게 삭발을 하고 승려가 되도록 하였는데 국사가 그의 이마를 손수 쓰다듬으며 비밀 계법을 전하였다. 그는 확고하게 정진 연마하여 이미 많은 증험이 있어왔는데, 영종조(英宗朝 : 1321~1323)에 이르러 대사는 때마침 흥에 겨워 시 한 수를 읊조렸다.

 

임화정에게 묻노니

매화는 몇 차례나 피어왔는지

황금누대 위의 길손이여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 몸.

寄語林和靖  梅開幾度華

黃金臺上客  無復得還家

 

 첩자가 그 시의 의도는 강남 인심을 격동시키려는 데 있다고 참소하자 황제는 그를 목 베어 죽였는데 스님의 목에서 우유빛 피가 흘러 넘쳤다. 황제는 그제서야 뉘우치고 내탕(內帑) 황금을 출연하여 소조상을 세우고 강남 지방의 글씨 잘 쓰는 승려와 선비를 연경(燕京)에 불러들여 대장경을 서사하여 그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그러나 황제는 초여름에 상도(上都)로 가는 도중 더위를 피하다가 시해 당하여 새로 서사하는 대장경을 절반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26. 환생한 어린아이

 

 지정(至正) 신축년(1361)에 섬서(陜西) 지방의 민가에 한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겨우 세 살이었다. 어느 날 마을 거리에서 '현관(縣官) 행차에 길 비켜라' 하는 소리를 듣고서 앞길을 막아선 채 현관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의를 표하며 말하였다.

 "서로 헤어진 지 오래인데 지금까지 별일 없었소?”

 현관은 깜짝 놀라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 어린아이가 어떻게 나의 이름을 알고 있단 말인가?”

 이에 어린아이 앞으로 나아가 물어보자 어린아이는 전생(前生)의 성명을 말하고 이어서 예전에 함께 주고 받으며 읊조렸던 시 몇 수를 열거하자 현관은 그때서야 옛 친구임을 믿게 되었다. 그는 다시 현관에게 말을 이었다.

 "그대와 헤어진 뒤 이제 사람의 몸으로 환생하였으나 앞서 세 차례나 태어난 바 있다. 처음 죽어서는 개로 태어나 스스로 싫증을 느낀 나머지 일부러 주인집 아이를 물었는데 주인이 화가 나서 나를 죽였고, 다시 메추리로 환생하였으나 그것도 싫증이 나 강물에 빠져 죽었는데 이제 사람으로 태어나 그대와 다시 만난 것이 참으로 다행이로다.”

 듣자하니, 이 아이는 전생에 주역의 이치를 즐겨보며 '태극이 움직이기 전[太極未動]'의 경지를 체험한 까닭에 삶과 죽음을 넘나들면서도 생사에 매이지 않았다고 한다. 마의(麻衣)스님이 주역을 '심역(心易)'이라 하였고, 자호(慈湖)스님은 이를 '역(易)'이라 이름했는데, 거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27. 보(寶)상좌의 사리와 피고름 / 파암(破菴)스님

 

 파암(破菴祖先)화상이 자복사에서 물러나 경산사 몽암(蒙菴)스님의 부름을 받고 그곳을 찾아가니, 몽암스님은 그에게 입승수좌(立僧首座)의 직책을 맡겼다. 그곳의 보(寶)상좌는 큰 지견을 갖춘 인물이었으며 주지나 수좌가 부임하여 개당법문을 할 때면 으레 느닷없는 선기문답으로 그들의 기봉(機鋒)을 꺾곤 하였다. 어느 날 파암스님이 법좌를 열었는데 보상좌가 왔다.

 "천지의 안, 우주의 사이 그 중간에 있다.”하면서 파암스님이 말씀하시자 보상좌가 무어라 말하려다가 파암스님에게 얻어 맞고 쫓겨나왔다. 당시 보상좌는 파암스님의 말이 끝난 다음 앞으로 나가 반박하려 했었는데 이미 '그 중간에 있다.'라는 부분에서 얻어 맞고 쫓겨나오자 파암스님이 고의로 자신을 꺾으려 했다고 생각하고 자기자리로 돌아가 죽어버렸다. 화장을 하고 나서 고향 사람들이 사리를 거두어 파암스님에게 드리자 파암스님은 그것을 들고 말하였다.

 "보상좌야! 너에게 설령 여덟 섬 네 말의 사리가 나왔다 하더라도 그것을 한쪽 벽에 던져 놓겠으니 내 생전에 한마디[一轉語]를 돌려다오!”

 그리고는 사리를 땅에 던지자 오직 보이는 건 피고름 뿐이었다. 이 이야기는 선배에게서 들은 것이다.

 

 

28. 스스로 자초한 응보 / 장구육(張九六)과 방국진(方國珍)

 

 원 지정(元 至正) 병신년(1356)에 장사성(張士誠)이 소주(蘇州)성을 공략했을 때 그의 아우 구육(九六)이라는 자가 맨 먼저 입성하여 살 집을 물색하다가 승천사(承天寺)가 그윽하면서도 밝은 것을 보고서 내심 좋아하였다. 그곳을 궁실로 개조하고자 병사에게 법당의 불상을 부수도록 하였으나 병사들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그 누구도 감히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구육이 화가 나서 불상의 얼굴에 활을 쏘아 맞힌 뒤 다 부숴버리고 장사성을 맞이하여 그곳에 살았다. 그 이듬해 정유년(1357)이 되자 명나라의 많은 병사가 여구(呂口)의 황태(黃埭)를 공격하니 구육이 병사를 거느리고 출전하였으나 패배하여 포로가 된 후 오른팔을 잘리고 죽었던 것이다.

 무술년(1358) 방국진(方國珍)이 강절성(江浙省)의 분성참정(分省參政)이 되어 명주(明州)를 수비할 때였다. 그의 좌우사관(左右司官) 유인본(劉仁本)이 문학을 몹시 좋아하여 평소에 지은 문장과 시를 편집 · 간행할 때 성 중에 있는 사찰의 장경을 가져다가 이를 풀칠하여 표지를 만들고 경문을 지워 없앤 후 자기의 시와 문장을 베껴쓰니, 우리가 보기에도 뼈에 사무치게 마음 아팠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오(吳)의 원년(1359)에 군대가 명주를 점령하여 방국진이 조정에 항복하자 유인본이 충성하지 않는 죄를 논하여 그의 등을 채찍질하니 등이 터지고 창자가 드러난 채 결국 죽고 말았다.

 구육은 하나의 용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죄복(罪福)의 응보를 알지 못한 자이니 그래도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유인본은 공자의 학문을 배우고서 차마 이러한 일을 자행할 수 있었을까? 공자의 말에 의하면, '신을 공경하되 신명이 앞에 있는 것처럼 하라'고 하였다. 더구나 우리 부처님은 삼계의 큰 성인이시다. 그런 까닭에 한 사람은 불상을 부수고 한 사람은 불경을 파손하였는데 발걸음을 돌리기도 전에 극형의 응보를 받았다. 이는 받아야 할 것을 받은 것으로서, 실제로 스스로가 자초한 응보이지 우리 성인이 보복한 것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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