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불광 도오(佛光道悟)선사의 행장
불광 도오(佛光道悟)선사는 협우(陜右) 난주(蘭州) 사람이며 성은 구씨(寇氏)로 태어나면서부터 이빨이 나있었다. 16세에 삭발한 뒤 2년 동안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임조(臨兆)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자점(彎子店)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인도 승려가 부르는 소리에 꿈을 깼으며 때마침 말 울음소리를 듣고 환하게 깨친 후 스스로 노래를 읊조렸다.
좋구나 좋아
허공에 가득한데
다만 하나 뿐일세.
好也羅 好也羅
遍虛空 只一个
그리고는 그의 어머니에게 '나는 간밤에 물건 하나를 주웠다'고 하니 어머니가 '무슨 물건을 주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시작도 없는 때부터 잃어버렸던 물건'이라고 대답하였다.
하루는 선지식을 찾아가는 길에 마을 사람들이 게송을 청하자 지어 주었는데, 그 중에는 '물은 흘러흘러 바다에 이르고 학은 흰구름 위로 솟아 날도다[水流須到海 鶴出白雲頭]'라는 구절이 있다.
웅이산(態耳山)에 이르러 백운 해(白雲海)스님을 찾아보니 서로 뜻이 맞았다. 이에 앞서 어느 사람이 해스님에게 어찌하여 법제자를 두지않느냐고 묻자, 해스님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천천히 '빼어나게 피는 난초는 서진 땅에서만 나온다'고 대답하였다.
스님이 그곳에 도착할 무렵 해스님은 공중에서 울리는 사람소리를 들었는데 "내일 곽상공(郭相公)을 맞이하라!”는 것이었다. 해스님이 살던 절은 곽자의(郭子儀)가 세운 것인데 불광스님은 곽자의의 후신이었다. 해스님이 입적하자 불광스님은 세상에 나와 정주 보조사(普照寺)의 주지가 되어 해스님의 법을 이었다. 그후 죽각암(竹閣菴)에 은거하면서 낙천(洛川)지방에 보이다 안보이다 하니 사람들은 그의 행적을 헤아릴 수 없었다. 스님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를 범인이라고 한다면 나는 성인의 자리로 갈 것이며, 나를 성인이라고 한다면 나는 범인의 자리로 가리라. 나를 성인도 범인도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너희들의 눈동자와 콧구멍 속으로 수없이 거꾸러지며 들어 가리라.”
태화(泰和) 5년 5월 13일 아무 병 없이 서거하였는데 그가 살던 집 위에 오색 구름이 일산처럼 뒤덮힌 가운데에 해같이 둥글고 붉은 빛이 세 개나 나타났었다. 당시 스님의 나이 55세였다.
6. 돼지 잡아 손님 대접하다가 / 하산사(何山寺) 노승
오흥 (吳興) 하산사(何山寺)의 노승 모(某)스님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며 대중을 업신여기고 평소 행실이 바르지 못한데다가 더욱이 살생을 좋아하였다. 어느날 손님을 대접하려고 돼지를 잡아 머리를 먼저 솥에 넣고 삶으면서 고기가 익었는가를 직접 가서 살펴보는데 언뜻 사람 머리 하나가 보였다.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며 펄펄 끓는 가마솥 속에 머리카락이 뒤엉켜 험악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노승은 그 모습을 보고서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며 몸둘 바를 몰랐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가서 보자하니 그것은 돼지머리였다. 노승은 그 일을 계기로 잘못을 뉘우치고 선행을 닦게 되었다.
7. 청정(淸淨)에 걸린 장애를 깨고 / 조문민(趙文敏)
조문민공(趙文敏公)이 항주의 관아에서 적조(寂照)스님을 방문하여 차를 마신 후 근래에 자신이 지은 시를 거론하였는데 그 가운데 "이 청정의 업장을 깨닫고 나니[了此淸淨障]”라는 구가 있었다. 스님은 그에게 물었다.
"청정함에 어찌 업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때묻고 더러운 것을 싫어하여 청정을 좋아하는 그것이 업장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대를 한림원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었는데 이제보니 의관을 갖춘 스님이었구려.”
"어머니께서 나를 낳으시던 날 밤에 스님 한 분이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셨다고 하는데, 나는 평소 선종의 향상기연(向上機緣)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경전의 가르침에 관한 것은 읽기만 하면 대의를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8. 세력을 업고 비행을 일삼다가 / 휘동명(輝東溟)
휘동명(輝東溟)은 황암(黃岩) 사람이며 우승상 의방(義方)의 부인이 그의 어머니다. 이 때문에 세력을 빙자하여 선배를 멸시하였다. 영석사(靈石寺) 연 일주(蓮一舟)스님은 용상사(龍翔寺) 소은(笑隱)스님에게서 법을 얻고 선정원(宣政院)의 명을 받아 그 절 주지로 있었는데 동명은 그를 밀쳐내고 주지로 앉았으며, 또한 홍복사(鴻福寺), 안국사(安國寺) 두 사찰을 돈으로 사서 한 몸에 세 곳의 주지를 겸하면서 마음대로 비행을 일삼았다.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잠자다가 깨어보니, 영석사의 가람신이 나타나 도깨비를 시켜 그의 목을 누르고 무릎으로 허리춤을 짓이기고 꿇어앉힌 후 사정없이 곤장을 치고 이어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종휘(宗輝)는 이제부터 감히 절 재산을 훔치지 않을 것이오니, 신이여!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신이여!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애걸하는 것을 보았다. 그 후 3년 만에 그는 죽고 말았다.
9. 말세의 신심 / 주(周)씨 노파와 전자중(田子中)
은현(鄞縣) 보당시(寶幢市)의 주씨(周氏) 노파는 일생동안 정토수행을 닦았다. 매년 정초가 되면 묵언을 하며 정월이 다 가도록 꼬박 눕지 않았고 5월이 되면 사람이 모여드는 정자에 나가 차를 끓여주면서 한여름을 보냈다. 그의 나이 70여 세가 되던 어느 날 저녁, 큰 연꽃잎이 보당마을 전체를 덮고 그녀가 손에 염주를 들고 연잎 위를 걸어가는 꿈을 꾸었다. 그 후 가벼운 병이 들었는데 이웃사람들이 그날 밤 많은 깃발과 큰 가마가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새벽녘이 되어 노파를 살펴보니 그녀는 합장 염불하는 모습으로 간 뒤였다.
나는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 말법에는 빗발처럼 많은 남염부제국(南閻浮提國) 여인들이 정토에 왕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주씨 노파를 보니 참으로 거짓이 아니다.
홍무(洪武) 병술년(1370) 겨울 봉화(奉化)에 사는 전자중(田子中)이 태백사(太白寺)에 나를 찾아 와서 오랫동안 함께 기거하였다. 내가 우연한 기회에, '금강반야경은 염라대왕의 명부전에서는 공덕경이라 일컫기에 세간 사람들은 죽은 이를 천도하는데 금강경을 많이 읽는다'고 하였더니, 전자중은 죽을 때까지 이 경을 수지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어느 날 그의 모친 기일(忌日)에 신심을 내어 금강경을 백 번 넘게 외워 천도한 뒤 새벽에 일어나 소나무 의자 위에 앉아 아홉번째 읽어가는 중이었다. 그때 도깨비들이 형틀에 묶인 한 노파를 끌고와 그의 의자 앞에 꿇어 앉혔는데 헝크러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고 있었다. 이에 자세히 보니 그 노파는 바로 돌아가신 어머니였다. 전자중이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잠깐 후 다시 끌고 가는데 마치 형틀을 벗겨내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에 전자중이 큰 소리로 울면서 어머니가 끌려왔을 때 금강경을 그만두고 어머니를 위로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 나의 생각으로는 금강경의 공덕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으리만큼 큰 것이다. 전자중이 신심을 내어 금강경을 외우던 일은 보이지 않는 사이에 저승의 명부(冥府)를 감동시켜 모자 간에 서로 만나볼 수 있도록 한 것이며, 그 고통을 풀어줄 것이다. 아! 이는 위대한 일이다.
10. 네 스님의 게송
육왕사(育王寺)의 허암 실(虛菴實)수좌가 와운(臥雲)암주에게 보낸 게송은 다음과 같다.
황제의 정원에 말을 달리니
한 치의 거리에서 칼을 어루만지지 않나 의심을 하네
매화나무에 달빛이 쏟아지고 숲 위에 눈이 나리면
와운암 베갯머리엔 단꿈이 맴돈다.
黃金園裡馬交馳 徑寸多成按劍疑
月晒梅花千樹雪 臥雲一枕夢回時
천동사(天童寺) 환암 주(幻菴住)수좌는 응암(應菴)스님의 부도를 참배한 후 게송을 지었다.
드르렁거리며 잠자는 호랑이 그 가죽 엿보니
중봉을 끌어다가 기대는 산을 만들었구려
깨어진 사발 하나 얻지 못하고
자손 살길 빌어봐도 어려울 걸세.
耽耽睡虎管窺班 便把中峰作靠山
不得破沙盆一个 子孫乞活也應難
묵중사(黙中寺)의 유서당(唯西堂)스님이 누에고치에 대하여 읊은 게송은 다음과 같다.
밭 뽕 산 뽕 모두 다 없어지자 그때야 쉬는 마음
면밀한 공부 이 고치에 들었네
화롯불 끓는 솥에 던져 넣고
학인 위해 한 가닥만 남겨두었네.
桑空柘盡始心休 綿密工夫一繭收
爐炭鑊湯拚得入 爲人只在一絲頭
불농사(佛隴寺) 의 행가(宜行可)스님이 빗소리를 들으면서 지은 게송은 다음과 같다.
처마 끝에 떨어지는 뚜렷한 빗방울
자신을 모르는 중생들 아우성소리
나 또한 요사이 물욕을 따르는 일 많아
봄날의 베개 위에 단꿈 꾸기 어려워라.
簷前滴滴甚分明 迷己衆生喚作聲
我赤年來多逐物 春宵一枕夢難成
아! 네 분의 게송은 잘 되었는데도 당대에 알려지지 못했기에 내 이를 기록하여 후학에게 보인다.
11. 게송 짓는 일 / 축원 묘도(竺元妙道)
스승 축원(竺元妙道) 스님은 노년에 천태(天台) 자택산(紫택山)에 한가히 살면서
후학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한번은 이런 말을 하였다.
"송을 지을 때는 반드시 사실[事]과 이치[理]가 동시에 갖추어져야 한다. 비유
하자면 두 다리가 똑같지 않으면 걸어갈 수 없는 것과 같다. 대천(大川)화상의
「거미에 대한 송[蜘蛛頌]」은 잘 지었기는하나, 그 가운데 세글자는 이치를 표현
한 데에는 손색 없지만 사물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의 송은 이렇다.
한가닥 줄을 허공에 걸어놓고 머물 때
백억 가닥 엉킨 줄마다 살기가 번뜩이네
상하 사방으로 그물을 얽어놓고
빠져 나갈 수 없을 때 바야흐로 화두가 된다.
一絲掛得虛空住 百億絲頭殺氣生
上下四圍羅織了 待無庄網話方行
마지막 구절의 세글자 '화방행(話方行)'은 거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말이다.
그는 또한 석가출산상에 송을 썼다.
빼어난 자품으로 왕궁을 나오셨다가
까칠한 얼굴로 설봉을 내려오면서
온갖 중생을 모두 제도하겠노라 맹세하니
언제나 다 할려는지 알 수 없구려.
龍姿鳳質出王宮 垢面灰頭下雪峰
誓願欲窮諸有海 不知諸有幾時窮
여기서 설산(雪山)을 설봉(雪峰)이라 바꿔 쓴 것은 운(韻)자에 구애된 것이지만,
이곳(중국)에 설봉이라는 이름이 이미 알려진 이상 설산을 설봉으로 쓴 것은 잘
못된 성싶다. 이렇게 해서 완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어 또다시 이어 말하였다.
"허주(虛舟普度)스님이 금산사 주지로 있을 때 눈이 내리자 상당 법문에서 송을
하였다.
하룻밤 사이 강바람 불어 옥가루 휘날리니
고봉은 희지 않아 정신을 흔드네
공중에서 내려왔다가 공중따라 올라가니
뼈속에 사무치는 추위 몇이나 겪을고.
一夜江風攪玉塵 孤峰不白轉精神
從空放下從空看 徹骨寒來有幾人
학인들이 앞다투어 이 송을 암송하고 있으나 허주스님은 옛사람이 말한 참뜻을
몰랐으며 학인들도 으레껏 잘못 이해해 오고 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스님께서는
"옛 사람의 송에, '눈이 천 산에 덮혔는데 어째서 고봉은 하얗지 않나[雪覆千山
因甚孤峯不白]'한 말은 한 마디 전어(轉語)였는데 허주 스님이 고봉은 실제로
하얗지 않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고 하였으며, 다시 말씀하셨다.
"대체로 입원불사(入院佛事 : 주지에 임명되어 하는 첫 법문)에서 정밀하고 오묘
하게 법문하기 어려운 것은 송을 지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동서(東嶼)스님이
정자사(淨慈寺) 주지가 되어 산문(山門)에서 한 법문은 다음과 같다.
청정한 자비의 문
호수의 가을 물이
들어오든 말든
범은 대충(大虫 : 범)을 물고
구렁이는 별비사(鱉鼻蛇)를 삼키도다
이 문을 딴 곳으로 옮겨놓아도 쓸모가 없다.
淸淨慈門 一湖秋水
入得入不得 虎咬大蟲
蛇呑鱉鼻 且移他處用不得
죽천(竹泉)스님이 중축사(中竺寺) 불전(佛殿) 불사를 할때 지은 송은 다음과 같다.
먼지를 털어내고 부처님을 보지만
부처 또한 먼지임을 그 누가 알랴
귀 뚫린 선객 만나기 힘들고
흔히 만나는 건 각주구검하는 어리석은 자.
撥塵見佛 誰知佛赤是塵
罕逢穿耳客 多遇刻舟人
이는 체제가 잘 된 송으로서 학인들이 본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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