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죽는 날까지 능엄경을 읽다 / 여 일암(如一菴)스님
여 일암(如一菴)스님은 영가(永嘉) 사람이며 속성은 원씨(袁氏)다. 그가 태어나기 5일 전 그의 아버지가 꿈을 꾸었는데, 한 스님이 불경을 가지고 왔기에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자, 오운산(五雲山)에서 왔다 하며, 성이 무엇이냐고 묻자 은씨(殷氏)라 하였다. 이름은 무엇이냐고 묻자 또다시 성이 은씨라고 대답한 후 5일 후에 반드시 다시오겠다 약속하고 경전을 그의 집에 놓아두고서 신표를 삼았다. 약속한 날이 되자 과연 스님이 태어났는데, 머리가 우뚝 솟고 눈빛은 사람을 쏘았다. 15세에 방산(方山)스님에게서 공부하여 종지를 얻었으며 보복사(保福寺)의 주지로 있다가 서간암(西澗菴)에서 10년 은둔하니 명망이 날로 높아만 갔다.
스님은 어린 나이에 마음을 내어 수능엄경을 암송하다가 제 5권까지 읽고는 피를 토하는 병으로 더할 수 없었다. 그 후 쾌차되던 어느날 밤 꿈에 읽지 못한 나머지 부분의 경을 보았는데 모두가 금자[金字]로 씌어 공중에 펼쳐 있기에 목청을 돋구어 경문을 읽어가다가 잠을 깨었는데 남아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졌다. 이 때문에 스님은 다시 능엄경을 암송했으며 이 경하나만으로도 넉넉하다고 하여 죽는 날까지 그치지 않고 매일 한 차례씩 외웠다.
27. 단강 각은(斷江覺恩)스님의 행장
단강(斷江)스님은 법명이 각은(覺恩)이며 속성은 자계 고씨(慈溪顧氏)다. 스님은 후리후리한 키에 청정하고 준엄하게 살았다. 어린 시절 운문산 광효사(廣孝寺)에서 삭발하고 뒷날 명주 연경사(延慶寺) 문법사(聞法師)에게 사교의(四敎儀)를 배웠는데 겨우 7일만에 통달하자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당시 횡천(橫川)스님이 육왕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선종을 중흥시키자 학인들이 모여들었다. 스님도 그곳을 찾아가 향을 사른후 입실하여 기어(機語)가 맞자 횡천스님은 내기(內記) 소임을 맡도록 명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의 공부가 나날이 드러나 원근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스님의 지은 게송은 우아하고 고풍스러웠는데, 제형 모헌지(提刑牟龜之)는 책머리에 서문을 썼으며, 당시 사대부 조문 민공(趙文敏公) · 등강 장공(鄧康莊公) · 원문 청공(袁文淸公) 등과 모두 절친한 사이였다. 소주(蘇州) 천평사(天平寺) 주지가 되어 횡천(橫川)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뒤에 개원사(開元寺)와 명주 보복사(保福寺)의 주지로 옮겨 갔다가 월주(越州) 천의사(天衣寺)에서 입적하였다.
어느 날 방장실에 앉아 있다가 주장자를 붙잡고 "빈 골짜기에 지팡이를 의지한 노승은 분명 한 폭의 수보리(須菩提) 그림이렷다!” 하였다. 그리고는 시자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주장자를 내던지고 깔개에 기댄 채 열반하였다.
28. 양황참범(梁皇懺法)의 효험
지정(至正) 경자(1360)년에 정해(定海)의 뱃사공 하태삼(夏太三)이 양곡을 싣고서 연(燕 : 北海)으로 가는 길에 바다에 빠져 죽었다. 그후 16년이 지난 홍무(洪武) 을묘(1375)년에 그의 아내 진씨(陳氏)와 아들 선(善)이 지난 날 하태삼을 생각해 보니,
그는 성품이 포악하여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데 인정이 없었으므로 비명에 죽은 외
로운 넋이 바다에 잠겨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제도를 받을 수 있을까
를 생각한 나머지, 재물을 모아 은주(鄞州) 십자항암(十字港菴)에 엄숙하게 도량을
차리고 갖가지로 훌륭하게 장엄하였다. 청정한 스님 열 분을 모시고는 협만종(叶
萬宗)스님에게 그 일을 주관해 주십사 청하고 「양황참법(梁皇懺法)」을 닦았다.
진씨는 지극정성이었으므로 그가 처음 도량에 들어와 사연을 전했을 때 감동의 눈
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날 「예참」의 제 2권을 마치고 밤이 깊어 선잠을 부치게 되었는데 의변(宜便)이라는 승려가 느닷없이 놀라 신음하면서 잠꼬대를 하였다.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고 오직 겁에 질린 모습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만종 등 여러 스님은 그가 깨어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모두 일어나 한참 동안이나 주문을 외웠으며 다급하게 부르자 겨우 소생하였다. 그에게 까닭을 묻자 울기만 하다가, 다시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위태천(韋駄天)처럼 생긴 한 신인(神人)이 위엄스런 의관을 갖추고 일산과 화려한
수레, 그리고 창칼로 매우 삼엄하게 호위하며 나를 강제로 동행시켜 하태삼을 데리
고 이곳에 와서 천도를 받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가는 길에 해포(蟹浦)를 지나
가자 신인의 위엄이 늠름하여 행인들은 멀리 피했으며 험한 곳을 두루 지나 큰 바
닷가에 이르니, 귀신떼들이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어 참으로 무서웠습니다. 신인은 나에게 바다 속으로 들어가 하태삼의 손을 잡고 데리고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하태삼은 원나라 모자를 쓰고 세찬 파도속에서 떴다 가라앉았다 하였으므로 도저히 그의 손을 붙잡을 수 없었으며, 게다가 다른 귀신이 나에게 돈을 요구하였습니다. 마침 수중에 돈이 있어 그들에게 주고 힘을 다해 하태삼을 붙잡아 언덕으로 올라서려는 찰나에 그대들이 부르는 소리에 깨어났습니다.”
이 말을 마치고 그는 다시 울었는데 그것은 너무나 고생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 죄를 없애고 죽은 이를 천도하는 데에는 이 참법보다 더 좋은 공덕이 없을 것이
기에 나는 짐짓 이를 기록하여 세인에게 권하는 바이다.
29. 지극한 신심을 가진 일가 / 황암 진군장(黃岩 陳君璋)
황암 진군장(黃岩 陳君璋)은 인품이 단정하고 신중하며 말씨가 적었다. 그는 조심스레 사람을 사귀어 신의(信義)가 한 고을을 감복시켰다. 그의 나이 마흔에 가까워지자 부인 섭씨(葉氏)와 함께 틈만 있으면 경건히 법화경을 독송하였다. 그 고을에 「양황참문」 책이 없어서 군장은 손수 베껴 썼는데 그러다 보니 문 앞의 산다화(山茶花)가 가을을 맞이하여 활짝 핀 줄도 몰랐다.
홍무(洪武) 경술(1370)년에 군장의 나이 60세였는데 병세가 위독하였다. 그의 아들 경성(景星)과 며느리 왕씨(王氏)는 타고난 효성으로 약과 음식을 몸소 보살피고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낮에는 환자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왕씨는 자기 넙적다리 살을 도려내어 죽을 끓여 바치기까지 하였다. 그 해 12월 11일 서산에 해질 무렵 군장은 그의 몸을 부축해서 앉히게 한 후 경성에게 유언을 하였다.
"나는 돌아가련다.”
"어디로 돌아가시렵니까?”
"해 지는 곳으로 떠나가리라.”
또 이어서 부탁하였다.
"내가 죽으면 불가의 법에 따라 화장을 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함께 아미타불을 부르라 하고는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
군장은 두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바로 경성이고 둘째는 나에게 출가한 거정(居頂)이다.
30. 걸식으로 어머니를 봉양하다 / 공 행이(恭行已)스님
공 행이(恭行已)스님은 상우(上虞)의 사람이다. 일생 동안 어렵게 공부하여 내전(內典 : 불경)과 외전(外典)을 모두 탐구하였으며 특히 시를 잘했다.
어머니가 연로하여 의탁할 곳이 없자 걸식으로 봉양하였는데 어머니를 업고 전당(錢塘) 호수를 건너면서 읊은 시 한 수가 있다.
어머니는 가마 위에 계시고 아들은 길을 걷는데
가마에 오르지 않고 걸을 때면 어머니가 먼저 아들을 부른다
끊어진 다리 밑에 흐르는 저 물길 따라 석양이 지는데
차가운 숲에 어미새에게 먹이를 물려주는 까마귀 보기가 민망스럽다.
母在籃輿子在途 子行不母先呼
斷橋流水斜陽外 羞見寒林返哺烏
이 시를 음미해 보면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31. 불상 조각가 광보살(光菩薩)의 일생
광(光)보살은 은현(鄞縣) 사람으로 장(張)씨의 아들이다. 그의 집안은 선대로부터
조소(彫塑)를 가업으로 해왔는데 광(光)보살 대에 와서는 더욱 정교한 솜씨를 갖
게 되었다. 그는 장년의 나이에 식구에게 얽매여 사는 것에 싫증을 느끼고 해회사(海會寺) 수매봉(壽梅峰)스님에게 귀의, 삭발하고 승려가 되려고 하였지만 그의 아내가 자식을 데리고 관가를 찾아 호소하는 바람에 수 스님이 그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광보살은 만호(萬戶) 완도(完都)와 절친한 사이였는데 광보살에게 도망할 것을 권
유하자 광 보살은 마침내 자취를 감추고 칼을 뽑아 자기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었다. 그 후 절강을 건너 패구(貝區)를 지나 광부(匡阜) 땅에 오르는 동안 큰스님을 두루 참방하고, 10년이 지난후에 다시 수스님을 찾아뵈려고 하였으나 그는 벌써 입적한 뒤였다. 화정사(華頂寺) 무견(無見)화상의 도행이 높다는 말을 듣고 가슴 속에 품어온 의심들을 말하자 무견스님은 그에게 '개에게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는 화두를 참구하도록 하였는데 마침내 깨친 바 있어 무견화상에게 절을 올리고 그를 은사로 삼았다.
광보살은 일생 동안 절강 양편 여러 사찰의 불상과 보살상을 매우 많이 조성하였지만 일을 끝마치면 짐을 꾸려 곧장 떠나갔으며 보수는 조금도 받지 않았다. 노년에 화정사에 돌아와 은거하면서 석교암(石橋菴)의 오백나한상을 빚었는데 그 정교함은 극치를 다하였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하던 새벽녘에 자욱한 안개 속에서 북소리 · 종소리 · 범패소리가 가득히 울려왔으며, 끝마친 후에는 채소밭에 먹을 것이 없었다. 광보살은 사람을 보내 시주를 하려 하였는데, 생각지도 않게 영해(寧海) 다보사(多寶寺)의 원(圓)강주가 채소를 보내왔다. 광보살은 기뻐하며 그 까닭을 물으니, 얼마전 진보살이 부처님의 명을 받고 그의 절을 찾아와 채소를 시주하라고 말해주길래 보내왔다는 것이었다. 당시 석교암에 진(眞)이라는 승려가 있었지만 그는 병으로 몸져 누워 오랫동안 문밖 출입을 못하던 자였다. 이 사실로 본다면 다보사를 찾아간 사람은 신인(神人)의 응화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일은 광보살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73세에 아무런 병이 없이 화정(華頂)에서 앉은 채 입적하였으며 화장을 한 후
산중에 부도를 세웠다.
32. 사성암(思省菴)스님의 법문과 게송
사성암(思省菴)스님은 태주(台州) 영해(寧海) 사람이며 속성은 알 수 없다. 형제 네 명 가운데 성암스님이 맏이였는데 모두 일시에 신심을 내어 출가하였다. 종친들에게 조상의 유산을 다 나누어주고 살던 집 한 채 만을 남겨두었는데 친척들이 그것마저 서로 차지하려고 계속 다투자 사스님은 형제들과 함께 집을 불태운 후 그곳을 떠나버렸다. 사스님은 그후 여러 곳을 참방하여 향상의 지견을 갖췄으며 온주(溫州) 영운사(靈雲寺)의 주지를 하다가 영암사(靈岩寺)로 옮겼고 마지막에는 영운사의 앞 초막에 은거하였다.
지정(至正) 갑신(1344)년, 내가 달차원(達此原) · 명성원(明性元) 등과 함께 스님을 찾아가니, 당시 스님은 90이 넘어 긴 눈썹과 호호백발이 무척이나 맑아 보였다. 스님은 신발을 끌고 나와 서서히 걸으면서 나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강심사(江心寺)에서 왔습니다."
"강물의 깊이가 몇백 발이나 되는가?"
"노스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이에 성암스님은 합장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앉으시오. 차 한잔 합시다."
성암스님은 성품이 반듯하고 고결하여 시를 지으면 한산자(寒山子)와 유사한 기품이 있었다. 그가 '어느 승려를 욕하며'라는 시를 벽에 써놓았다.
오온(五蘊)*을 버리지 못한 채 머리만 깎고
누런 베옷 두르니 이것이 중이라네
불법도 세속법도 전혀 모르고
잘하는 것이라곤 돼지고기 개고기 잘 먹는 일.
五蘊不打頭自髠 黃布圍身便是僧
佛法世法都不會 噇猪噇狗十分能
책상 위에 그의 어록 한 권이 놓여 있기에 손가는대로 펼쳐보니, 여름 결제 때 한 상당법문이었다.
대원각은
소바리 말바리에 실어오고
우리 가람을 위해서는
외바구니 나물바구니를.
以大圓覺 牛角馬角
爲我伽藍 瓜藍菜籃
또한 상당법문에서 조주스님의 '개에겐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는 화두를 들어 송을 하였다.
개에게 불성이 없다
개에게 불성이 있다
원숭이는 인색하고 교활한 장사치 때문에 시름하고
개는 청정하고 도통한 중의 입을 보고 달아나네.
狗子佛性無 狗子佛性有
猴愁摟擻頭 狗走抖擻口
나는 달차원 등과 그곳을 떠나왔으며, 다시는 감히 그의 기봉(機峰)을 범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우리는 영운사에 묵으면서 노스님에게 사 성암스님의 몇 가지 언행에 대하여 들었는데 모두 전할만한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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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의 '瘟'은 '蘊'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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