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오심요
上
1. 화장 명수좌(華藏明首座)*에게 주는 글 (江寧府 天寧寺에 머물다)
곧바로 보여주는 조사선에 어찌 샛길을 용납하리오. 여기서는 향상인(向上人)만을 귀하게 여길 뿐이다. 그들은 듣자마자 곧 들어 보이고, 뽑아들자마자 당장 가니, 설사 밝은 눈으로 엿본다 해도 벌써 바보짓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한 모서리를 들어주었는데도 나머지 세 모서리를 돌이켜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내 상대하지 않겠다"라고 하였으니, 하나를 들면 나머지 셋을 알고 눈대중으로 아주 작은 차이를 알아내어 수레바퀴가 데굴데굴 굴러가듯 전혀 막힘이 없어야 '향상의 수단을 쓴다[提持]'고 할 수 있으리라.
듣지 못하였는가. 양수(良遂)스님이 마곡(麻谷)스님을 찾아뵈었을 때, 뵙자마자 마곡스님은 방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그가 의심을 품고 있다가 두번째 다시 찾아뵙자 이번에는 마곡스님이 채소밭으로 휙 가버렸다. 그러자 양수스님은 단박에 깨닫고 마곡스님에게 말하였다.
"스님! 저를 속이지 마십시오. 스님을 찾아와 뵙지 않았더라면, 일생을 12부경론(十二部經論)에 속아서 지낼 뻔 하였습니다."
이처럼 했던 것을 보건대, 그는 참으로 힘을 덜었다[省力]하겠다. 양수스님은 되돌아와서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이 아는 것을 나는 모조리 알지만 내가 아는 것은 여러분이 모르리라" 하였다. 양수스님이 안다 한 것은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경계로서, 다른 사람들은 결코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겠으니 진짜 사자라 할 만하다. 그 집안의 종지를 잇는 법손이 되려면 반드시 그의 경지를 벗어나야만 할 것이다.
달마(達摩)스님이 양(梁)나라에 갔다가 위(魏)나라로 가서 낙초자비(落草慈悲)*로 사람을 찾으며 소림(少林)에서 9년을 홀로 앉아 있었다. 이때 깊은 눈 속에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마지막에 "무엇을 얻었느냐"고 묻자 다만 세 번 절하고 제자리에 가 서니 마침내 "골수를 얻었다"는 말이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그루터기를 지켜 토끼를 기다리는[守株待兎] 무리들이 앞을 다투어 '말없이 절하고 제자리에 선 것을, 골수를 얻은 심오한 이치라고 여기에 되었으나 그들은 칼 잃은 자리를 뱃전에 새겨놓고 나중에 칼을 찾는 격[刻舟求劍]이 되었음을 전혀 몰랐다 하리라. 이런 자들이야말로 칼 잃은 자리를 배에다 새기는 자들이니 꿈엔들 달마스님을 뵐 수 있겠는가.
진정한 본색도류(本色道流)라면 반드시 정견(情見)을 벗어나서 별도의 생애를 설정해야 하는 것이니, 결코 썩은 물 속에서 살아날 계책을 짓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이 집안의 가업을 계승 하리라. 여기에 이르러서는 옛부터 내려오는 법이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이른바 유하혜(柳下惠)*의 일을 잘 배우면 결코 그의 자취를 본받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옛사람은 말하기를, "한 마디 합당한 말은 만 겁에 노새 매는 말뚝이라네" 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옳다 하겠다.
유(有)를 타파한 법왕(法王 : 부처님)이 세간에 나오셔서 중생의 욕구에 따라 갖가지로 법을 설하시나, 그 설법은 모두 방편임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만 집착과 의심을 부수고 알음알이와 아견(我見)을 부숴주기 위해서이니, 그 많은 악각악견(惡覺惡見)이 없다면 부처님이 세간에 나오시지도 않을 터인데, 하물며 갖가지 법을 설한 까닭이 있겠는가.
옛사람은 종지를 체득한 뒤에는 깊은 산 초막이나 돌집 속에서 다리 부러진 솥에 밥을 해 먹으며 10년이고 20년이고 지냈다. 그리하여 세상사를 모두 잊고 티끌세계를 영원히 떠났었다. 요즈음 시대엔 감히 그와 같기를 바라지는 못한다 해도 명예와 자취를 버리고 본분을 지켜 오로지 도에 순숙한 노납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몸소 깨달은 바를 자기 역량에 따라 쓰면서 지난 업을 소멸하고 오래도록 익혀온 습성을 녹여야 한다. 이렇게 하고도 남은 힘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반야의 인연을 맺어주고 자기 근본이 익어지도록 연마해야 한다. 비유하면 거친 풀숲을 헤치고 온개 도인, 반개 도인[一個半個]*을 얻은 것과 같은 것이니, 그리하여 불법이 있음[有]을 같이 알고 생사를 함께 벗어나야 한다. 미래세가 다하도록 이렇게 하여 부처님과 조사의 깊은 은혜에 보답해야만 한다.
설사 인연이 무르익어 부득이 세속에 나와 인연 따라 사람과 하늘 중생들을 제도하더라도 결코 무엇이라도 구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런데 하물며 부귀하고 세력있는 이들과 결탁하여 세속에 물들고 아부하는 그런 스님들의 행동거지를 본받아 범부와 성인을 속이는 짓을 하랴. 나아가 구차하게 잇속과 명예만을 탐내어 무간업을 지어서야 되겠는가! 설사 깨달을 계기는 없다 해도 이처럼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업을 지어 과보를 받는 일은 없으리니, 참으로 번뇌의 세계의 벗어난 아라한(阿羅漢)이라 할 수 있다.
한 스님이 천황(天皇道悟)스님에게 묻기를, "무엇이 계(戒) · 정(定) · 혜(慧)입니까?" 하자 천황스님이 말하기를, "여기 나에겐 그런 부질없는 살림살이는 없다"고 하였다. 또 덕산스님(德山宣鑑 : 782∼865)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하고 물었더니 덕산스님은 "부처님은 서천(西天)의 늙은 비구다"하였다. 또 석두(石頭希遷) 스님에게 "무엇이 도입니까?"하고 묻자, "나무토막이니라" 고 하였고, "무엇이 선입니까? 하고 묻자 "벽돌이니라" 하였다.
한 스님이 운문(雲門文偃) 스님에게 묻기를 "무엇이 불조(佛祖)를 초월한 이야기입니까?" 하자 "호떡이지" 하였고, 또 조주(趙州) 스님에게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뜰 앞의 잣나무다"라고 하였다. 또 청평(淸平) 스님에게 "무엇이 유루(有漏)입니까?" 하였더니, "조리(笊籬)"라 하였고, "무루(無漏)가 무엇입니까?" 물었더니, "나무국자"라고 하였으며, 삼각(三角)스님에게 "3보란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쌀, 조, 콩"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모두는 지난 날 본분종사(本分宗師)가 실제의 경지를 몸소 밟아보고 본분자리에서 자비를 베푼 말씀이다. 그런데 그 스님들의 이런 말들만 뒤쫓는다면 은혜를 저버리는 짓이 될 터이고 그렇다고 그 스님들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금강정안(金剛正眼)을 갖추지 못하고서는 귀결점을 알 수 없으리라.
이 선문(禪門)에서는 홀연히 벗어나 깨쳐야지, 애초부터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 주어서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캄캄한 봉사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이근종성(利根種性) 맹팔랑(孟八郞)*이 하루아침에 단박에 깨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곧바로 알아차려 쓰고 싶으면 쓰고, 가고 싶으면 갈 뿐, 허다한 일들이 없다. 마음씀[心行]이 익어져 모든 것을 단박 놓아버리면 어디에서든지 문득 쉬어서 안락하게 되어 종일토록 배 부르게 밥 먹고 코를 골며 잠을 잔다 해도 옳다 하리라.
처리하기 가장 어려운 것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함이다. 그림자를 인정하여 우러러보거나 소리를 듣되 그것을 따르지 않고, 맑고 고요한 성품을 꼭 붙들어 큰 보배를 얻은 양 가슴에 품고는 종일 소소영영(昭昭靈靈)하다고 하며, 잡된 알음알이로 스스로 자부하고 나도 한소식 했다고 하는 것들이다.
그런가 하면 더 나아가서는 종사에게 인가를 받았다고 하여 아견만을 늘리고, 고금의 문장을 이리저리 천착하여 불조의 말씀을 확인해 보고는 일체를 업신여긴다. 묻기만 하면 재주를 부리며 그것에 착 달라붙어 한 무더기가 되었는데도 정반성(定槃星)*을 잘못 읽었다는 것도 끝내 모르는 것이다. 그러다가 누군가 그에게 방편을 베풀어 끈끈한 것을 떼어 주고 결박을 풀어 주면 도리어 "나를 가만두지 않는구나, 나를 옥죄는구나. 도대체 무슨 심보냐!"라고 하니, 이래가지고야 어찌 구제될 수 있으랴!
오로지 단박에 그릇된 줄을 스스로 알아서 가지고 있던 것을 다 놓아버려야 하리라. 선지식이 되어 이와 같은 무리들을 만나면 모름지기 큰 솜씨로 단련시키되, 온개도인, 반개도인[一個半個]만이라도 깨치게 했다면 삿됨을 뒤집어 올바름을 이루었다 하리라. 이런 사람이야말로 도량을 헤아릴 수 없는 큰 인물이라 하겠으니, 병을 많이 앓아보아야 약의 성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깨달은 사람은 마음 기틀[心機]을 모두 끊어버렸고 비춤의 체[照體]도 이미 잊었다. 그런가 하면 알음알이도 전혀 없고 그저 무심한 경지만 지킬 뿐이어서 하늘 사람이 그에게 꽃을 바치려해도 길이 없고 마군 외도가 가만히 엿보려 해도 보지 못한다.
깊고 깊은 바다 밑을 가고, 번뇌가 다하여 뜻으로 헤아리고 하는 일마다가 모두 평상심(平常心)이어서 한가한 시골에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 당장에 모든 생각을 놓아버려 성태를 길러서 이런 경지가 되어도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으니, 털끝 만큼이라도 무언가 있기만 하면 태산이 사람을 가로막는 것처럼 여겨서 바로 털어버린다. 비록 이렇게 하는 것이 순일한 이치이긴 하나 취할만한 것이 없으니, 취했다 하면 바로 '견해의 가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는 무심히 사람에게 합하고, 사람은 무심히 도에 합한다"고 하였으니, 스스로 나는 체득한 사람이라고 자랑하려 해서야 되겠는가.
살펴보건대, 본분종사들은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으려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 스님을 '배울 것이 끊겨 함이 없는, 옛사람과 짝이 될 만한 참도인'이라 부르게 된다.
덕산스님이 하루는 공양시간이 늦었는데 발우를 들고 방장실에서 내려오자 설봉(雪峰) 스님이 말하였다.
"종도 울리지 않고 북도 치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로 가십니까?"
그러자 덕산스님은 머리를 푹 숙이고 그냥 되돌아가버렸다. 암두스님이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가엾은 덕산스님이 말후구(末後句)도 모르는군."
그러자 덕산스님이 물었다.
"그대는 노승을 긍정하지 않는가?"
암두스님이 이윽고 은밀히 그 뜻을 사뢰니 이튿날 덕산스님이 법좌에 올랐을 때는 평상시와는 전혀 달랐다. 암두스님은 손뼉을 치면서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기쁘도다. 덕산늙은이가 말후구를 알아버렸네. 그렇기는 해도 앞으로 3년밖에 살 수 없도다.
이 공안(公案)을 총림에서 알음알이로 아는 경우는 매우 많지만 정확하게 뚫은 자는 드물다. 어떤 사람은 "참으로 이 구절[此句]이 있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비와 아들이 서로 부르고 화답하지만 실로 이 구절[此句]은 없다"고 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이 구절[此句]은 비밀스럽게 전수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모두는 말로만 이해한 것으로 기로(機路)만을 늘리는 것을 면치 못하리니, 본분도리와는 거리가 대단히 멀다 하겠다. 이 때문에 '으뜸 가는 제호(醍醐)의 맛은 세상에서는 진미지만 이런 사람을 만나면 도리어 독약이 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본분종사는 활구(活句)를 참구했었지 사구(死句)를 참구하진 않았다. 활구에서 깨달으면 영겁토록 잊어버리지 않겠지만 사구에서 깨치면 자신마저도 구제하지 못하리라. 불조의 스승이 되고자 하거든 활구만을 분명히 취해야 한다. 소양(韶陽 : 운문)스님은 한마디 꺼냈다 하면 마치 날카로운 칼로 자르는 것과도 같았다. 또 임제(臨濟)스님도 "취모검(吹毛劍)을 쓰고 나서 얼른 갈아 두어라"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5음 18계(五陰十八界) 가운데의 일이랴. 세간의 지혜와 총명함으로는 전혀 미칠 수가 없다.
밑바닥까지 깊이 사무쳐서 이제껏 남에 의지해 일으켰던, 밝고 어둡고 맞고 거슬리고 하는 알음알이를 모두 떨어버려, 금강정인(金剛正印)으로 도장을 찍고 금강왕보검(金剛王寶劍)을 휘둘러 본분의 수단을 사용했던 것이다.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데는 반드시 살인도라야 하며 사람을 살리는 데는 꼭 활인검이라야 한다고 하였다.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사람을 살릴 수도 있어야 하며,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한 쪽만 한다면 치우치게 된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손을 쓰려면 반드시 방편을 살펴보아 칼끝을 상하게 하거나 손을 다치지 않게 해야만 한다.
어디에나 몸을 벗어날 길이 있어서, 8면으로 영롱하여 저들을 비추어보고서 비로소 칼날을 대야 한다. 여기에서 반드시 치밀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느슨했다간 일곱번째 여덟번째에 떨어지리라. 그저 자신이 무심하다는 그것도 털끝 만큼이라도 남겨 두지 말아야 하며, 설사 조금 있다 해도 잘라서 세 동강을 만들어버려야 한다.
그런데 더구나 옛부터 이 종문에 내려오는 본분수단은, 이 문중의 납자를 만나서 드러내 보였을 때 기연에 투합하면 함께 쓰고 기연에 투합하지 못하면 이로써 요점을 삼을 것이니, 그리하면 깨닫지 못할 일이 없다. 힘써 실천할 것을 간절히 바라노라.
화장 명수좌는 금관 · 협상 · 종부로부터 나를 따라 노닌 지 10여년이더니, 그 정리(情理)의 뛰어난 이해력을 이미 모두 드러내 보였도다. 이 문중에 들어와서는 조용과 기지와 견해의 길을 모조리 물리쳐 버리지 않음이 없는데, 오로지 향상일로의 한 도리는 조실에서 백천 번 단련하였다. 근래에 민노덕을 보살피느라 아침저녁으로 떨어져 나가 있으므로 붓으로 몇 말을 얻어듣고자 한다기에 여기 몇 장을 조목별로 열거하여 함께 부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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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 명수좌는 금관(錦官), 협산(夾山), 종부(鐘阜), 등에서 나와 함께 10년이나 행각하였다. 그는 자신이 알음알이로 이해한 이론을 모두 내버렸고, 이 선문에 들어와서는 조용(照用), 기지(機智), 해로(解路)를 다 물리쳤다. 오직 향상(向上)의 하나[一著子]만을 선실(禪室)에서 백번 천번 단련하더니 요즈음 민로(民老)를 보살피느라 자주 나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게 아침 저녁으로 떨어져 있어 편지를 받고 싶다고 하므로 나는 몇 장을 조목조목 써서 그에게 부친다.
* 낙초(落草) : 원래는 풀숲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양민이 난세를 피해 초야에 묻혀 초적(草賊)이 된다는 의미. 양민이 초적이 된 것을 여기서도 높은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자비를 베푼다는 뜻으로 씀.
* 유하혜(柳下惠) : 장문중(藏文仲)이 유하혜가 어진 줄 알면서도 그를 조정에 천거하지 않았던 고사.
* 전진왕이 구마라즙을 얻으려고 정복전쟁을 일으켰을 때 몸이 성한 구마라즙과 불구인 한 스님을 얻었는데 여기서 일개(一個)도인 반개(半個)도인을 얻었다는 말이 생겼다. 최소한 한두사람의 뜻으로 쓰임.
* 맹팔랑(孟八郞) : 맹(孟)씨네의 여덟째 아들이란 말로 도리를 모르고 행동하는 난폭한 놈을 뜻한다. 장삼이사(장삼이사(張三李四)와 같은 말.
* 정반성(定槃星) : 저울의 기준되는 눈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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