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선림보전禪林寶典

제2편 완릉록(宛陵錄) 22~25.

쪽빛마루 2016. 7. 4. 11:55

22. 양의 뿔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임금님의 창고 안에 이런 칼이 전혀 없다'고 하셨는데, 바라옵건대 그 뜻을 가르쳐 주십시오."

 "임금님의 창고란 바로 허공의 성품[虛空性]이니라. 그것은 시방의 허공세계를 받아들여 모두가 다 너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 또 다른 말로는 임금님의 창고를 허공장보살이라고도 일컫는다. 네 만약 그것에 대해 있고 없음과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을 말한다면, 모두가 양의 뿔이 되느니라. 양의 뿔이란 바로 네가 구하여 찾는 것이니라."

 

 배상공이 물었다.

 "임금님의 창고 속에는 진짜 칼이 있읍니까?"

 "그것도 역시 양의 뿔이니라."

 "임금님의 창고 속에 애초부터 진짜 칼이 없다면, 왕자가 그 창고에서 진짜 칼을 가지고 다른 나라로 나간 것이어늘, 어찌하여 스님께서는 그저 없다고만 말씀하십니까?"

 "칼을 가지고 나갔다는 것은 여래의 심부름꾼에 비유한 것이다. 네 만약 임금님의 창고 속에서 왕자가 진짜 칼을 가지고 나갔다고 말한다면, 창고 안에 있는 허공도 함께 따라 갔을 것이니라. 그러나 본원의 허공성(虛空性)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이 무슨 말이겠느냐? 설령 네가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양의 뿔이니라."

 

問 如王庫藏內에 都無如是刀라하니 伏願誨示 師云 王庫藏者는 卽虛空性也니 能攝十方虛空世界하야 皆總不出你心이라 亦謂之虛空藏菩薩이니 你若道是有是無와 非有非無하면 總成羊角이니 羊角者는 卽你求覓者也니라

問 王庫藏中有眞刀否아 師云 此亦是羊角이니라 云 若王庫藏中에 本無眞刀하면 何故云王子持王庫中眞刀하야 出至異國이어늘 何獨言無오 師云 持刀出者는 此喩如來使者니라 你若言王子持王庫中眞刀出去者인댄 庫中應空去也니 本源虛空性은 不可被異人將去니 是什麼語오 設你有者라도 皆名羊角이니라

 

23. 여래의 심부름꾼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가섭존자는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받았으니, 말을 전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다."

 "만약 말 전한 사람이라면 양의 뿔을 여의지 못한 사람이겠군요."

 "가섭존자는 스스로 본래 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양의 뿔이 아니니라. 만약 여래의 마음을 깨달으면 곧 여래의 뜻을 알게 되며, 여래의 겉모습을 보는 사람은 곧 여래의 심부름꾼에 속하는 자로서 말 전하는 사람이 되느니라. 아난존자가 20여년 동안 부처님의 시자로 있었으면서도 다만 여래의 겉모양만 보았기 때문에 부처님으로부터 '세간을 구제하는 것을 보는 자는 양의 뿔을 벗어나지 못하니라'는 꾸지람을 들었다."

 

問 迦葉受佛心印하니 得爲傳語人否아 師云 是니라 云 若是傳語人인댄 應不離得羊角이로다 師云 迦葉은 自領得本心이라 所以不是羊角이니 若以領得如來心하면 見如來意하며 見如來色相者는 卽屬如來使하야 爲傳語人이니 所以阿難이 爲侍者二十年호대 但見如來色相이라 所以被佛訶云 <唯觀救世者는 不能離得羊角이니라>하나니라

 

24. 무분별지는 얻을 수 없다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문수보살이 부처님 앞에서 칼을 든 것은 어찌 된 까닭입니까?"

 "500명의 보살들이 전생을 아는 지혜를 얻어서 지난 과거 생의 업장을 볼 수 있었다. 500이란 너의 오음으로 된 몸이니라. 이 숙명을 보는 장애 때문에 부처가 되기를 구하고 보살 · 열반을 구하게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문수보살이 지혜로써 헤아리는 칼을 가지고 부처를 봄이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베어 버렸다. 그래서 '아주 잘 베어 버렸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칼입니까?"

 "헤아리는 마음이 칼이다."

 "헤아리는 마음이 이미 칼이라고 한다면 부처를 봄이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베어 버린 것인데, 그렇다면 능히 베는 그 마음은 어떻게 없앨 수 있읍니까?"

 "너의 분별이 없는 지혜로써 보는 것이 있다고 분별하는 마음을 베느니라."

 "부처를 봄이 있다느니 혹은 부처를 구함이 있다느니 하는 마음을 내는 경우에는 분별이 없는 지혜의 칼로써 베는 것이지만, 그 지혜의 칼이 있는 것은 어찌 해야 합니까?"

 "분별 없는 지혜로써 있다는 견해[有見]와 없다는 견해[無見]를 베어 버리면, 분별 없는 지혜도 또한 얻을 수 없느니라."

 "지혜로써 지혜를 자르지 말며, 칼로써 칼을 자르지 마소서."

 "칼이 스스로 칼을 베어서 칼과 칼이 서로 베어지면, 칼 또한 얻을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혜가 스스로 지혜를 베어서, 지혜와 지혜가 서로 베어지면 지혜 또한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어미와 자식이 함께 죽는 것도 역시 이와 같느니라."

 

問 文殊執劍於瞿曇前者는 如何오 師云 五百菩薩이 得宿命智하야 見過去生業障하니 五百者는 卽你五陰身이 是라 以見此夙命障故로 求佛求菩薩涅槃하니 所以文殊將智解劍하야 害此有見佛心故로 故言你善害라하니라 云 何者是劍고 師云 解心이 是劍이니라 云 解心旣是劍이라 斷此有見佛心이니 祇如能斷見心을 何能除得고 師云 還將你無分別智하야 斷此有見分別心이니라 云 如作有見有求佛心하면 將無分別智劍斷이나 爭奈有智劍在何오 師云 若無分別智가 害有見無見하면 無分別智도 亦不可得이니라 云 不可以智更斷智하며 不可以劍更斷劍하라 師云 劍自害劍하야 劍

劍相害하면 卽劍亦不可得이요 智自害智하야 智智相害하면 卽智亦不可得이니 母子俱喪도 亦復如是로다

 

25. 견성이란?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자성을 보는 것[見性]이란 무엇입니까?"

 "성품이 곧 보는 것이요, 보는 것이 곧 성품이니, 성품으로써 다시 성품을 보지 말라. 또 들음이 그대로 성품이니 성품으로서 다시 성품을 들으려 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성품이라는 견해를 내며, 능히 성품을 듣고 능히 성품을 보아서 문득 같다거나 다르다는 견해를 일으킨다. 저 경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볼 수 있는 바는 다시 보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너는 어찌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얹겠느냐? 경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마치 소반 위에 구슬을 흩어 놓는 것과 같아서, 큰 구슬은 크게 둥글며, 작은 구슬은 작게 둥글어서 각각의 구슬끼리 알지 못하며, 각각 서로를 방해 하지 않아서, 일어날 때에 <내가 일어난다> 말하지 않으며, 없어질 때에 <내가 없어진다>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4생과 6도가 이렇지 않은 경우가 없느니라.

 또 중생이 부처를 보지 못하고 부처가 중생을 보지 못하며, 4과(四果)가 4향(四向)을 보지 못하고 4향이 4과를 보지 못하며, 3현(三賢) · 10성(十聖)이 등각과 묘각을 보지 못하고 등각과 묘각이 3현 · 10성을 보지 못하며, 나아가 물이 불을 보지 못하고 불이 물을 보지 못하며, 땅이 바람을 보지 못하고 바람이 땅을 보지 못하며, 중생이 법계에 들지 못하고 부처가 법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법의 성품은 가고 옴이 없으며 능히 보는 것도 보여지는 대상도 없다. 능히 이와 같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본다느니 혹은 나는 듣는다느니 말하겠느냐?

 무엇보다도 선지식의 회하에서 깨닫도록 하여라. 선지식이 나에게 법을 설하시며,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셔서 중생들에게 법을 설해 주신다. 그러나 가전연은 다만 생멸하는 마음을 가지고 실상(實相)의 법을 전하였기 때문에 유마거사에게 꾸중을 들었느니라. 분명히 말하건대, 어떤 법이라도 본래로 속박하지 않는데 어찌 풀어 제칠 필요가 있겠으며, 또 본래 물들지도 않는데 굳이 맑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말하기를, '모든 법의 참다운 모양이 이와 같거늘 어찌 말로써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네가 지금 다만 시비하는 마음, 염정(染淨)을 따지는 마음을 내고 하나하나마다 알음알이를 배워 얻어서, 온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결정코 취하려고 하는 것을 곧 보게 되는데, 도대체 누가 마음의 눈을 갖추었으며,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지 말해 보아라. 만약 이렇게 한다면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현격하게 다른 것이니, 다시 무슨 견성(見性)을 논하겠느냐?"

 

 배상공이 대사께 물었다.

 "이미 성품이 그대로 보는 것이며 보는 것이 그대로 성품이라고 스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성품이 본래 장애가 없어야 하며 제한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물건이 가로막히면 곧 보지 못하고, 또 허공 가운데서 가까우면 보고 멀어지면 보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은 네가 망령되게 다르다는 견해를 낸 것이니라. 만약 물건이 앞에 가로막히면 보지 못하고 그것이 없어지면 본다고 생각하여, 성품을 가로막는 장애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잘못이니라. 성품이란 보는 것도 보지 않는 것도 아니며, 법 또한 보는 것도 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만약 견성한 사람이라면 어느 곳인들 나의 본래 성품이 아님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6도 · 4생과 산하 대지가 모두 내 성품의 맑고 본체 그대로이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물질[色]을 보는 것이 곧 마음[心]을 보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물질과 마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모양에 집착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알아서 눈 앞의 물건을 없애고 나서야 비로소 보려고 하는 자들은 2승(二乘)의 무리 가운데 떨어진, 의지하여 통하려는 견해이니라. 허공 가운데서 가까우면 보고 멀면 볼 수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외도에 떨어지고 만다. 분명히 말하노니,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며,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것이니, 가까우면서도 볼 수 없는 것이 중생들의 성품이니라. 가까이 있어도 오히려 그렇거늘, 멀어서 볼 수 없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이겠느냐?"

 

問 如何是見性고 師云 性卽是見이요 見卽是性이라 不可以性更見性하며 聞卽是性이니 不可以性更聞性하라 祇你作性見하며 能聞能見性하야 便有一異法生이로다 他分明道호대 所可見者는 不可更見이라하니 你云何頭上更著頭오 他分明道호대 如盤中散珠하야 大者大圓하며 小者小圓하야 各各不相知하며 各各不相礙하야 起時에 不言我起하며 滅時에 不言我滅하나니 所以로 四生六道가 未有不如時니라 且衆生이 不見佛하며 佛不見衆生하고 四果不見四向하며 四向不見四果하고 三賢十聖이 不見等妙二覺하며 等妙二覺이 不見三賢十聖하야 乃至水不見火하며 火不見水하고 地不見風하며 風不見地니 衆生이 不入法界하며 佛不出法界하나니 所以法性이 無去來하며 無能所見이니 能如此하면 因什麼하야 道我見我聞고 於善知識處에 得契悟하라 善知識이 與我說法하며 諸佛이 出世하야 與衆生說法이니 迦旃延이 祇爲以生滅心으로 傳實相法일새 被淨名呵責하니라 分明道호대 一切法이 本來無縛이니 何用解他며 本來不染이니 何用淨他리요 故云實相이 如是어니 豈可說乎아 汝今祇成是非心染淨心하야 學得一知一解하야 遶天下行하야 見人便擬定當取하니 誰有心眼하며 誰彊誰弱고 若也如此하면 天地懸殊라 更說什麼見性고

問 旣言性卽見見卽性인댄 祇如性自無障礙하며 無劑限이어니 云何隔物卽不見이며 又於虛空中에 近卽見遠卽不見者는 如何오 師云 此是你妄生異見이니 若言隔物不見하며 無物言見하야 便謂性有隔礙者는 全無交涉이라 性且非見非不見이며 法亦非見非不見이니 若見性人은 何處不是我之本性이리요 所以로 六道四生과 山河大地가 總是我之性淨明體라 故云見色便見心이라하니 色心이 不異故니라 祇爲取相作見聞覺知하야 去却前物하야 始擬得見者는 卽墮二乘人中依通見解也니라 虛空中에 近則見遠則不見은 此是外道中收라 分明道非內亦非外며 非近亦非遠이니 近而不可見者는 萬物之性也라 近尙不可見이어니 更道遠而不可見은 有什麼意旨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