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어록 강설

[성재헌의 ‘선사, 애물단지를 깨다’] 9. 대주, 보물을 발견하다

쪽빛마루 2013. 9. 29. 18:58

 

[성재헌의 ‘선사, 애물단지를 깨다’]


9. 대주, 보물을 발견하다
붓다가 가르친 행복과 자유는 내 안에 있다

 

 

자기 보배창고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만 떠돌면 구할 수없어

 

 

▲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26년 전 이맘 때였다. 입학 2주 만에 다니던 대학을 접고 직지사 백련암으로 들어갔다. 시름이 늘어진 부모님께는 재수를 핑계 대었지만 속으로 불교학과를 가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던 때였다. 그러니 산더미처럼 지고 올라간 교과서며 참고서는 전시용일 뿐이었다. 상큼한 새벽공기를 깨우는 종소리 따라 일어나 불전에 예배하고, 아침나절 두어 시간쯤 산길을 헤매다가, 목탁소리에 어우러진 천수경의 청아한 가락을 듣는 게 마냥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상좌 사랑이 지극했던 암주 덕형 스님이 참선을 시작하려는 혜송 스님을 데리고 화두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 참선이 무엇인지, 화두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재헌이 학생도 갈래요?” 한 마디에 선뜻 따라 나섰다. 버스와 완행열차를 번갈아가며 갈아타고 산길을 걸어 한나절 만에 도착한 곳은 동화사 비로암이었다.

그곳에 신문지를 펴고서 봉령을 말리던 범룡 스님이 검정고무신을 신고 마당에 서계셨다. 그리 깨끗해 보이지 않는 승복에 주름이 가득한 얼굴이셨다. 당신의 방에는 별다른 세간도, 곁에는 차 한 잔 내올 시자도 없었다. 스님은 한암 스님을 모시고 공부했던 당신의 경험을 곁들이며 말씀하셨다.


“보물은 안에 있어. 헌데 사람들이 그걸 몰라.

마치 어느 부자가 황금을 가득 담은 상자를 자기 집 마당에 묻어놓고

사방팔방 돌아다니다가 거지꼴로 돌아온 것과 같아.

헌데 이 사람이 거지노릇을 오래하다 보니 집에 와서도 궁상을 떨어.

자기 손으로 자기 집 마당에 황금을 묻고도 말이야.”


절집을 한번쯤 기웃거려본 사람치고 “네가 부처다” “보배는 네 안에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도리어 드물다. 허나 진정으로 그 말을 수긍하기는 쉽지 않다. 불교도들에게 있어 부처님은 완벽한 존재이다. 늘 평온한 미소를 품고 있는 그분에게서는 우울과 슬픔, 고뇌와 번민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네가 부처다”에 조금만 살을 붙이면 “당신은 지금 이대로 완벽한 존재입니다. 당신은 지금 이대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입니다”가 된다. 이런 말에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일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상근기가 달리 상근기가 아니다. 이런 말씀을 당장에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상근기다.


‘전등록’에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주(朱)씨 성에 혜해(慧海)라는 법명을 가진 한 수행자가 있었다.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의 도지(道智) 화상에게 출가한 그는 스승으로부터 학업을 익히고 여느 수행자들처럼 행각에 나섰다. 그리고 운 좋게도 처음 찾아간 곳이 강서(江西)의 마조(馬祖) 선사였다.


마조가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월주 대운사에서 왔습니다.”

“여기 와서 무엇을 구하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마조가 혀를 찼다.
“자기 집안의 보배 창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집을 버린 채 어쩌자고 사방팔방 돌아다니는가?

나에게는 한 물건도 없는데 무슨 불법을 나에게서 구하겠단 말인가?”

정신이 번쩍 든 혜해는 절을 하고 물었다.
“무엇이 저의 보배 창고입니까?”


마조가 말하였다.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그것이 그대의 보배 창고이다.

온갖 것이 구족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고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왜 밖에서 구하려고 하는가.”

 

 

대주, 근본 마음은 앎과 지각에
말미암지 않음을 단박에 알아


혜해 스님은 상근기였나 보다. 스님은 마조의 말끝에 근본 마음은 앎이나 지각을 말미암지 않음을 단박에 알아차리고 뛸 듯이 기뻐하며 절을 올렸다. 그 후 마조 스님을 시봉하며 6년 동안 곁을 떠나지 않다가 연로한 은사가 병환으로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월주로 돌아갔다.

 

그리고 자취를 감춘 채 어수룩한 행동에 어눌한 말투로 바보처럼 살았는데, 남몰래 지었던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을 조카 상좌인 현안(玄晏)이 훔쳐가는 바람에 “월주에 큰 구슬[大珠]이 있다”는 소문이 나게 되었다.


몰려든 사람들에게 “저는 선(禪)을 모릅니다. 그러니 한 법도 남에게 보일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고 한사코 거절했지만, 보물을 찾는 이들은 물러설 줄을 몰랐다. 스님은 어쩔 수 없어 무엇이 부처냐고 물어오는 이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맑은 못에 얼굴을 비춰 보세요. 그것이 부처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선가에 “밖에서 들어온 것은 보배가 아니다”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세상살이에서는 남의 것을 잘 빼앗고, 나의 것을 잘 지키고, 적절한 상황에 잘 과시하는 자가 유능한 사람이다. 허나 불법에서는 그렇질 않다.


붓다가 가르친 행복과 자유를 밖에서 찾는 자는 바보이다. 또한 진정한 행복과 자유는 무언가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로 인해 생겨난 것은 무언가로 인해 파괴된다고 붓다는 누누이 말씀하셨다. 전에 없던 행복과 자유를 새롭게 얻었다면 그런 행복과 자유는 언제가 반드시 사라진다. 상실의 고통이 그 빈자리를 채웠을 때, 추억은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럼, 붓다가 가르친 행복과 자유는 무엇일까? “나는 행복하지 않아” 하며 투덜거리고, “나는 행복해지고 싶어” 하며 안달을 부리지만 그러고 있는 ‘나’는 햇살아래 그림자처럼 실체가 없다.

 

이를 확인할 때, 과거에 대한 불만과 현재에 대한 불안과 미래에 대한 희망저절로 사라진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붓다가 가르친 행복과 자유는 더 이상 행복과 자유를 꿈꾸지 않게 되었을 때 찾아든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에도 있다더라.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혜해 스님은 단박에 알아차렸지만 미련하고 둔한 근기인 나는 범룡 스님의 말씀을 그저 그런 노인네의 흔하디흔한 언구로 흘려듣고 말았다. 세월이 이만큼이나 흘러 빈손에 너덜너덜한 살림살이가 되고 보니, 그 말씀이 얼마나 소중하고 절실했던지 조금은 알겠다.


절로 오는 봄을 재촉하는지 종일 비가 내린다. 하릴없이 던진 눈길에 들어온 모과나무 가지마다 물망울이 가득하다. 둥그스름 촉촉 늘어진 모양새며 투명하고 찬란한 빛이 영락없는 다이아몬드다.


큰 놈 작은 놈 줄줄이 긁어모으면 족히 만 캐럿쯤 되지 싶다. 누가 훔쳐갈까 걱정 없고 훔쳐가도 제 자리로 돌아올 것이니, 절로 맘이 푸근해진다. 눈길 한번으로 세상에 드문 부자가 되었으니, 지짐 구워 막걸리라도 한잔 해야겠다.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출처 : 법보신문 2012.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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