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어록 강설

[성재헌의 ‘선사, 애물단지를 깨다’] 10. 대주, 거울이 되다

쪽빛마루 2013. 9. 29. 18:59

 

[성재헌의 ‘선사, 애물단지를 깨다’]


10. 대주, 거울이 되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 ‘내 마음’이라 집착 말라

 

눈 앞에 버젓이 보이는 그것은
마음 거울에 비친 인연 그림자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며칠 전 TV에서 사자며 원숭이 개 등에게 거울시험을 하는 것을 보았다. 사육사가 거울을 들고 다가가자 어떤 놈은 살벌하게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거리고, 어떤 놈은 깜짝 놀라며 부리나케 도망치고, 어떤 놈은 꼬리를 살랑거리며 다가가 몸을 비비고 얼굴을 핥았다. 동물들의 우스꽝스런 행동에 깔깔대며 웃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물들만 저렇게 어리석은 것일까?”


동물들은 눈앞에 보이는 ‘그것’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란 사실을 모른다. 따라서 거울 속의 ‘그것’을 보고 분노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사랑하는 것이 동물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한발 떨어져 이 광경을 지켜보는 인간에겐 그들의 분노와 공포와 애정이 도통 까닭 없는 짓거리일 뿐이다.


“동물들만 저렇게 어리석은 것일까?”


우리 눈앞에는 수많은 ‘그것’들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 가지고 싶어 안달하기도 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기도 하고, 상냥한 낯빛으로 다가가 손을 건네기도 하고, 험상궂은 얼굴로 살벌한 말을 내뱉기도 한다.


“우리의 이런 행동들은 정당한 것일까?”


‘화엄경’에 “마음은 솜씨 좋은 화가와 같아 온 세상을 몽땅 그려낸다네.” 라는 게송이 있다. 사람들은 지금 눈앞에 버젓이 보이는 ‘그것’이 마음이라는 거울에 비친 인연그림자란 사실을 모른다. 따라서 인식한 ‘그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일이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한발 떨어져 이 광경을 지켜보는 부처와 조사에게는 사람들의 기쁨[喜] 노여움[怒] 슬픔[哀] 행복[樂]이 도통 까닭 없는 짓거리일 뿐이다.


대주 혜해(大珠慧海)선사의 말씀에는 ‘밝은 거울[明鑑]’이란 단어가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거울은 어떤 빛깔도 어떤 형상도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무언가를 비추기만 하면 온갖 빛깔과 형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우리의 참 마음[眞心]이 그 밝은 거울과 같다. 거울에는 온갖 빛깔과 형상의 물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거울 속 ‘그것’은 가질 수 없다. 우리의 허망한 마음[妄心]이 그 거울 속 물상과 같다. 거울은 방향을 조금만 틀어도 그전의 빛깔과 형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부처님의 마음[佛心]은 그 밝은 거울과 같아 지나간 과거를 담아두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마음[衆生心]은 한참 지난 화면의 잔상(殘像)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장 난 TV처럼 기회만 되면 화려했던 추억과 아픈 상처를 재방송하기에 여념이 없다.


뿐만이 아니다. 바람을 붙잡으려는 야생마처럼 머물지 않는 현재를 붙잡으려고 발버둥 치고, 하늘이 무너지면 어쩌나 하며 침식을 잊은 기(杞)나라 사람처럼 오지 않은 미래를 짐작하며 두려워하고 있다. 면도를 하는데 거울이 면도를 하기 전 모습만 비친다면, 머리카락 눈 코 면도기를 번갈아 비추느라 정신이 없다면, 말끔히 면도를 마친 모습을 미리 비춘다면, 그런 거울을 어디다 쓰겠는가?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의 마음이 그런 거울 못지않게 제정신이 아니다[顚倒].

 

상대적인 모든 마음 보시하고
어떤 마음도 집착 않는게 수행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걸까?


이는 스스로 밝은 거울이 되지 못하고,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나의 마음’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거울에 물상이 비치듯 인연 따라 기쁨과 슬픔, 우울과 공포, 분노와 좌절 등 갖가지 작용이 일어났건만 그것이 인연의 그림자임을 모르는 우리는 “나는 기쁘다” “나는 슬프다” “나는 두렵다”고 소리친다.

 

해서 기쁜 나를 붙잡으려고 발버둥치고, 슬픈 나를 지우려고 애를 쓰고, 두려운 나를 위장하려고 온갖 가식으로 덧칠을 한다. 그런 노력의 끝에는 어김없이 피로허탈함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럼, 비친 물상에 집착하지 않고 밝은 거울 자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에 담긴 말씀을 정리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무엇이 지혜입니까?”


혜해 스님이 말씀하셨다.
“선과 악, 사랑과 미움, 존재와 비존재 등 상대적인 모든 것들이 거울에 비친 그림자처럼 그 자체의 성품이 없다는 것을 알면 그것이 바로 해탈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대적인 것들이 자기만의 성품을 가지고 있어 허망하지 않다고 여기면 해탈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그럼 그 해탈의 문은 어떻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보시바라밀을 실천하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육바라밀이 보살행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보시바라밀만 거론합니까?”
“보시바라밀만 닦으면 육바라밀을 완전히 갖출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을 보시해야 합니까?”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 고요한 마음과 불안한 마음, 청정한 마음과 타락한 마음 등 모든 상대적인 마음을 보시해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마음들은 자체의 성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걸 보시해버리고 어떤 마음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진실한 수행이라 합니다.”

 


참, 요긴한 말씀이다. 현재 나의 마음은 모두 참마음에 비친 빛깔의 그림자요, 소리의 메아리일 뿐이다. 그러니 지나간 과거를 잊지 못해 애태우던 마음도, 머물지 않는 현재를 붙잡으려 발버둥 치는 마음도, 오지 않은 미래를 짐작하며 두려워하는 마음도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에게 돌려주고 또 돌려줘야 하리라. 그렇게 ‘나의 마음’ ‘나의 것’ 으로 여겼던 것을 보시하고 또 보시해 더 이상 베풀 것이 없게 된 사람의 삶은 어떨까?


경덕전등록’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원(源) 율사가 찾아와 물었다.
“화상께서도 도를 닦으려고 애를 쓰십니까?”


혜해 스님이 대답하였다.
“애를 씁니다.”


“어떻게 애를 씁니까?”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잡니다.”


“그거야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하는 것 아닙니까.”
“똑같지가 않습니다.”


“왜 똑같지 않습니까?”
“그들은 밥을 먹을 때도 제대로 밥을 먹지 않고, 이것저것 따지고 평가하느라 바쁩니다. 잠을 잘 때도 제대로 잠을 자지 않고, 온갖 궁리에 계획을 세우느라 바쁩니다. 그러니 똑같지가 않습니다.”

 


밥 먹을 때 밥 먹고, 잠잘 때 잠자라니, 참 좋은 말씀이다. 말해야 할 때 말하고,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고,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라니, 참 좋은 말씀이다. 크고 맑은 거울에 만상이 드러나듯 인연 따라 세월을 보내며 집착하지 말라 하시니, 참 좋은 말씀이다.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출처 : 법보신문 2012.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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