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산방야화山房夜話

「벽암록」으로 깨달음의 증표를 삼을 수 있읍니까?

쪽빛마루 2014. 11. 30. 17:55

「벽암록」으로 깨달음의 증표를 삼을 수 있읍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종문 중에는 「벽암집(碧岩集)」이라는 책이 있읍니다. 원오극근(圓悟克勤):1063∼1135)스님이 협산(夾山)에 머물 때, 설두(雪竇)스님의 송고(頌古)를 취하여 강요(綱要)를 나누어 배열하고, 말씀을 해설하여 만든 책입니다. 그 책의 설명은 세밀하고도 분명합니다. 풍부하고 유려한 것으로 말한다면 명주(明珠)와 패옥(貝玉)을 수북이 쌓아 놓은 것 같고, 그 충만해 넘치는 것으로 말한다면 황하의 싱류인 우문(禹門)을 가로막아 역류가 소용돌이치며 물결이 출렁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정말이지 매우 위대한 책입니다. 법을 깨달았어도 자유롭지 못한 자는 근처에도 가지 못할 내용입니다. 그런데 참선을 한다는 사람들이 모두 그 책을 사다리 삼아 깨달음을 얻으려 하자, 이 사실을 원오스님의 제자인 묘희 (妙喜:1088∼1163) 스님이 알게 되었읍니다. 그리하여 책에 얽매여 배우는 사람들이 근원으로 돌아오는 것을 혹시나 잊어버릴까 염려해서 민(閔) 땅에 있던 판각(板刻)을 불질러버렸습니다. 지금 전국 선원에서 다시 「벽암록」을 간행하는데, 이것은 말세에 배우는 자들을 잘못된 길로 유인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나는 말했다.
 "아닙니다. 중생들에게는 각각 자기에게 현성공안(現成公案)이 하나씩 있읍니다.
부처님께서도 영산(靈山)에서 49년 동안 설법하시면서도 이것을 일일이 다 설명하지 못하셨고, 달마대사도 서쪽으로부터 만 리 길을 왔지만 이것을 일일이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덕산스님과.임제스님 역시 이것을 다 찾아내지는 못했읍니다. 그러니 설두스님이 어찌 이것을 다 송(頌)할 수 있으며, 원오스님이 이것을 다 해설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벽암록」이 백천만 권이 있다 해도 현성공안의 하나인들
더하거나 덜 수 있겠습니까? 묘희스님이 이런 이치를 확실히 알지 못하고, 「벽암록」판각을.불지른 것은, 마치 석녀 (石女)에게 아이를 낳지 말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일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벽암록」을 간행한 사람들의 행동은 석녀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권유하는 것으로 가소로운 일입니다."
 객승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각자의 현성공안은 끌내 불조의 언교(言敎)와는 관계가 없는지요? 또 우리들은 무엇을 참고로 하여 깨달음의 증거를 삼겠읍니까?"
 나는 말했다.
 "참고로 할 것도 없고, 증거를 삼을 것도 없읍니다. 오직 각자마다 한 순간에 회광퇴보(回光退步)하여 눈앞의 견문 각지(見聞覺知)를 그대로 한꺼번에 뒤엎어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바람결에 들려오는 폭포수 소리와 비온 뒤 시냇물 소리가 모두 송고(頌古)인 것을 알게 되고, 공산(空山)에 진동하는 우뢰와 대낮에 울리는 자연의 청아한 음향이 모두 해설〔判〕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늘은 높고 땅은 넓으며, 밤은 어둡고 낮은 밝은데 만상삼라(萬象森羅)가 정연하게 설법을 하고 있읍니다. 이것이 바로 현성공안인 「벽암집」인 것입니다. 비록 백 천의 설두스님과 원오스님이라 해도 현성공안의 그림자에는 쩔쩔멜텐데, 어찌 언어나 문자를 사용해 이러쿵저러쿵 논란할수 있겠습니까? 선배들의 가르침이 어떤 때는 왕성하게 만들고 어떤 때는 부숴버리며, 어떤 때는 금지하고 어떤 때는 장려하는 것은, 다만 세속의 일반적인 풍속을 따라서 그렇게 한 것이지, 이치가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대는「벽암집」이 참석하는 자들을 잘못된 길로 들게 하여 스스로 깨닫는데 장애가 된다고 말하나, 두 스님의 마음을 소급해 추측해보면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세존께서 법계 중생 모두가 여래의 지혜덕상(智慧德相)을 구비하고 있으면서도 망상 집착(妄想執着)때문에 증득하지 못하는 현상을 올바른 법안(法眼)으토 환히 관찰하시고, 당신 스스로성도(聖道)를 가르쳐 중생을 모든 집착에서 떠나게 해야겠다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왜 모르셨겠읍니까? 성도(聖道) 또한 중생을 구속하여 언어로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을. 듣는 이의 근기에 따라 무려 300여 회나 설법하신 대(大).소(小).편(偏).원(圓).돈(頓).점(漸).반(半).만(滿) 등의 가르침은 하루도 입에서 떠난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요즘이나 옛날의 참선하는 자들은 그것이 언어로 표현
된 방편인 줄을 모르고 참된 법이라고 여겨 집착합니다. 그들이 각기 이해한 데에 집착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분분히 내세워 시비가 복잡하게 일어났읍니다. 끝내 일대장교(一大藏敎)를 능(能)과 소(所)로 쪼개어 「벽암집」의 원태 취지와는 아주 멀어졌습니다. 성인의 가르침도 그러한데 더구나 범인들의 가르침은 어떻겠읍니까?
 그렇기는 해도 언교(言敎)의 장단점을 잘 응용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당사자가 자기 일에 얼마나 진지하고 절실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의 일에 진지하고 절실하다면 하잘 것 없는 이야기도 생사를 초월하는 약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것은 경전 중에 '거위왕이 우유만 가려 먹는다'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일 스승과 제자가 진지하게 자기의 일을 밝힐 수 있고 자기 종문(宗門)의 사활(死活)을 걸머지겠다는 뜻이 있다면, 절대로 문자에 의지해 의미를 깨달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깊이 스스로게 물어 참구한다면 「벽암집」의 유무에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