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들도 계율을 지켜야 됩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고봉(高峰: 1238∼1295) 스님께서 제자들에게 수계 (受戒) 할 때에 손가락을 태우게 했다는데, 제방(諸方)에서는 이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정말 고봉스님이 그랬읍니까?"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또한 그런 소문을 직접 듣고, 스님께 여쭈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이상할 것이 없다. 저들이 방편임을 알지 못해서 그럼 것인데, 난들어찌 모르겠느냐' 달마대사께서 흘로 전하신 성품을 바로 가리키는 선은 문자(文字)도 쓰지 않았는데 무슨 계(戒)를 주고 받겠습니까? 그러나 달마스님이 계율을 말씀하지 않은 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근본 종지(宗旨)만을 투철하게 관찰하게 하려고 그런 것이고, 둘째는 제자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첫째의 근본 종지만을 투철하게 관찰하게 했다는 뜻은 달마스님은 오로지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하는 것으로써 종을 삼았읍니다. 오직 바로 가리키는 것에만 힘을 기울여 단 한번에 훌쩍 깨달음의 자리에 그대로 들어가게 했을지언정, 대.소 2승(二乘)의 단계를 차례차례 거치도록 하지는 않았읍니다. 그종지가 이와 같으므로 계율을 말한다면 벌써 잘못입니다.
다음으로 제자들을 믿었다는 뜻은, 일반적으로 달마스님의 문하에는 모두가 상근기의 인재들만이 모였었읍니다. 숙세에 반야의 종지를 익히고 최상승(最上乘)의 근성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읍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계정혜(戒.定.慧) 3학(三學)을 닦았기 때문에 또다시 계율의 수지(受持)를 말할 필요가 없었읍니다.
그러므로 달마스님 당시에는 계율을 지키라고 말하지 않아도 잘 지켜졌던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굳이 계율을 지키라고 강조하지 않았지만, 어느제자도 고의적으로 계율을 어기는 자가 없었읍니다.
달마스님 이후로 대승의 근기와 성품을 갖춘 선사들이 천지 사방에서 구름처럼 일어나고 바닷물이 용솟음치듯 하였읍니다. 달마스님 때부터 계속하여 계율을 말하지 않았던 것은, 종지로 볼 때에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애초에 계율을 지키지 않고 부처님의 심종(心宗)을 전수했다는 소리는 내 아직 들어본 적이 없읍니다 .
옛날에 자수화상(慈受和尙: 1077∼1132)은 종문(宗門)의 빼어난 지도자이십니다.
항상 제자들이 계업(戒業))을 잘지키는 것을 극도로 찬양하였습니다. 또 진헐화상(眞歇和尙)은 '권발보리심대회(勸發菩提心大會)'를 개최하여 사부대중과 함께 계율을 권장 선양하였습니다. 이 두 스님은 모두 점진적인 방현을 사용하신 분들이십니다.
옛날에 담당무준(湛堂無準: 1061∼1115)스님께서 양산 승(梁山乘)스님을 찾아뵙고 인사하자, 승스님은 이렇게 말했읍니다. 즉 '어찌 계율을 받지 않고도 감히 불법을 배울수 있겠는가?' 그러자 담당 준스님은 합장예배하고 말하기를, '계 받는 장소가 계일까요? 아니면 삼감마(三갈磨)와 청정한아사리(阿사梨)가 계인가요?' 라고 했습니다. 승스님이 깜짝 놀라며 이상하게 생각하자, 담당 준스님이 말하기를 '그렇기는 하지만 감히 계를 받지 않아서야 되겠읍니까? '라고, 하고는, 곧 바로 강안율사(康安律師)에게 가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읍니다.
옛부터 선가(禪家)에는 계율에 대한 말이 아주 많았지만,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들지 못하겠습니다. 이른바 방편이란 상황에 알맞게 운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봉스님이 수계한 것을 조금도 이상스레 여기지 마십시오.
돌이켜보면 내가 처음 대중 생활을 할 때 는 개경(開慶).경정(景定) 연간이었읍니다. 그때도 정자사(淨慈寺).쌍경사(雙徑寺)같은 절은 대중의 수효가 400∼500을 넘었읍니다. 그 절의 주지스님은 말할 것도 없고 대중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술을 마시면, 항 상술을 마신 것이 아닌데도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꾸짖었읍니다. 가끔 술을 마시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드물었읍니다. 그러나 지금은 위에서 아래까지 모두가 방탕하여 피하거나 거리끼는 것이 없는 듯 합니다. 옛날에 부처님께서는 일반 신자들을 위해 5계(五戒)를 말씀하셨고, 비구들에게는4분(四分).승지(僧祗)등의 계율과,3취정계(三聚淨戒).구족대계(具足大戒)가 있었읍니다. 그러나 요즘 승려들은 일반신자가 지키는 계(戒)도 못지키는데,
율의(律儀)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위산스님도 '지지작범(止持作犯)은 처음 발심한 수행자들의 수행지침이다. 그러나 처음의 발심은 부처님의 심종(心宗)을 전하는 천리 길의 첫걸음으로서, 첫걸음을 내딛지 않고 천 리길을 갈 수 없다. 또 옛 사람들은 계율을 지키고 도를 배우는 것이 수행의 근본이라 생각했다'고 하셨읍니다.
또한 근성(根性)이 둔해서 평생 수행을 했는데도 도안(道眼)이 밝아지지 않으면,계의 힘으로라도 도념(道念)을 잃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내세에는 도를 이루기가 쉽습니다. 계의 중요성을 거론한 경전으로는「능엄경(楞嚴經)」.「원각경(圓覺經)」을 들 수있는데, 모두 대승원돈(大乘圓頓)의 중요한 밀씀입니다. 의심스런 부분이 있으면, 다시 한번 검토해 보십시오. 그 가운데서는 수행의 근본을 계라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도 계는 기초이고, 도는 집이라고 하였는데, 이 두 가지가 없다면 이 한 몸을 어디에 의탁하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근기에 맞게 방편을 말한 것이므로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에게 계율지키게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편 예컨대 백장(百丈)스님은 허다한 위의(爲儀)와 예법(禮法)을 세우셨읍니다. 스님은 사소한 일상 생활에 이르기까지도 빈틈없이 계율을 만드셨읍니다, 이것을 달마대사의 사람의 본성을 바로 가리키는 종지에 비교할 때, 이상할 것은 조금도 없읍니다.
어떤 사람은 '대중이 한 곳에 모여 살면서부터 총림에는 예법이 없어서는 안되게 되었다'고 예법의 세세함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계율이 총림예법의 근본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근본없이 지엽(枝葉)만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선배 스님들도 '아아 ! 도체(道體)를 잃으면 계의 힘이 소멸하고, 계의 힘이 소멸하면 총림의 예법도 잃게 된다. 그리고서 어떻게 천하의 인심을 다시 도(道)로 돌아가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금일 제자들에게 계율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고 했는데, 모두 진실한 말씀입니다. 그대가 공연한 질문을 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소리를 지껄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그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는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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