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행[慈物之行]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행[慈物之行]
1. 고통을 참으며 거위를 보호하다[忍苦護鵝]
부처님 당시에 어떤 비구가 구슬 세공하는 기술자의 집 문전에 걸식을 하게 되었다. 그 때 기술자는 왕에게 바치려고 구슬에 구멍을 뚫고 있었다. 스님을 위해 구슬을 두고 공양드릴 음식을 가지러 간 사이 우연히 구슬이 땅에 떨어졌는데, 마침 거위가 그걸 삼켜버렸다. 그 기술자가 돌아와 비구에게 음식을 공양하고 구슬을 살펴보아도 보이질 않자, 비구가 훔쳤으리라 의심하였다. 비구는 거위의 생명을 보호하느라 마음대로 매질하도록 맡겨 두었다. 피가 흐르는 지경에 이르자 거위가 와서 피를 핥고 있으므로 기술자는 노여움을 옮겨 거위까지 쳐 죽여버렸다.
비구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슬픈 눈물을 흘리자 기술자는 괴이하게 여겼다. 이에 비구가 그에게 까닭을 말해주자, 기술자는 그만 감동하여 참회하고 절을 하였다.
2. 오리를 보호하느라고 물을 안 마시다[護鴨絶飮]
진(晋)나라 승군(僧群) 스님은 청빈하게 절개를 지키며 나강현(羅江縣)의 곽산(藿山) 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이 산은 바다 가운데 있었으나 깊이가 몇 길이나 되는 발우처럼 움푹 패인 돌구덩이에서는 시원한 샘물이 솟아나왔다. 암자와 그 돌우물 사이에는 작은 시냇물이 있었는데, 여기에 외나무다리를 놓고 이를 오가며 물을 길었다.
하루는 오리 한 마리가 날개가 꺾인 채 외나무다리에서 움직일 줄을 모르고 있었다. 스님은 지팡이를 들어 쫓으려 하다가 오리가 다칠까 두려워 물을 긷지 않고 되돌아갔다. 끝내 스님은 마실 물이 떨어져 죽어버렸다.
찬탄하노라
중생의 생명을 위해 자기 몸을 잊었으니
대자비로 크게 구제하심이 이보다 지극할 수 없으리라.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오리의 생명을 살리느라
괴로움을 참은 것은 옳다 하겠지만
자기 목숨마져 없앤 것은
지나침이 없다 할 수 있겠는가?
아-아, 도인(道人)읕 가죽 주머니인 이 몸을
꿈 · 허깨비 · 물거품 · 그림자로 볼 뿐이다.
실로 중생에게 이익이 된다면
육신을 콧물이나 침처럼 버린다.
호랑이나 매에게 먹이로 주어버리는 것도
모두가 이 마음 때문이다.
어찌 육신을 집착하고 아끼는 범부가 헤아려 알겠는가?
3. 죽을 짐승을 사다가 기르다[贖養生命]
진(陳)의 법랑(法良 : 507~581)스님은 서주(徐州) 패현(沛縣) 사람으로 대명사(大明寺) 보지(寶誌)스님에게 나아가 선(禪)을 배우고 율(律) · 논(論)에도 정통하였다. 명예가 경기지방에 진동하자 법을 들으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신도들에게 받은 시주물은 경전 · 불상 · 탑 · 사원을 조성하는데 사용하거나 가난하고 액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붙잡힌 짐승을 보면 즉시 사들고 돌아와 길렀는데, 거위 · 오리 · 닭 · 개가 우리 안에 가득 찼었다. 이들은 스님이 잠을 자거나 쉬는 것을 보면 모두가 고요하게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스님이 노닐 때는 모조리 일어나 울고 짖는 소리가 북 치고 피리 부는 소리보다 시끄러웠으니, 과연 마음이 통하는 경계라 하겠다.
4. 자비와 공경으로 보시하다[悲敬行施]
수(隋)나라 영유(靈裕 :518~605) 스님은 정주(定州) 거록(鉅鹿) 사람으로 15세에 조군(趙郡) 응각사(應覺寺)에 출가하였는데 경론에 널리 통하여 명성이 온 나라에 자자하였다. 그의 보시행은 자비와 공경을 함께 하였으니, 가사(袈裟)로 은혜를 보답한 것이 천 벌도 넘었으며, 병을 앓아 치료받고자 하는 자들에게 베풀어 준 약도 계산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맛 좋은 음식을 얻었다 하면 반드시 먼저 스님께 공양하였고, 길을 막는 축생에게도 일찌기 꾸짖거나 침을 뱉지 않았다. 나아가서는 어린아이를 책망하고 대중을 훈계하는 일에서도 자기를 지칭할 때는 아무개라고 이름을 쓰고, 상대방에겐 인자(仁者)라는 존칭을 쓰며, 간절하고 뼈아프게 타일렀으므로 듣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5. 바다를 사들여 방생터를 만들다[買放生池]
수(隨)나라 지자대사(智者大師 :538~597)는 바닷가에 살았으므로 매일 같이 백성들이 물고기를 잡아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곳은 그물이 4백여 리나 이어 있었으며, 강과 시냇물에 설치한 통발이 60여 군데나 되었다. 스님은 속으로 이를 불쌍히 여기다가 신도들에게 받은 시주물로 바닷가 한 모퉁이를 사들여 방생지(放生池)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를 진(陳)나라 임금에게 표문(表文)으로 아뢰자 임금은 칙명을 내려 물고기 잡는 것을 금지시켰다.
또한 비(碑)를 세우고 국자제주(國子祭酒)인 서효극(徐孝克)에게 조서를 내려
비문을 짓게 하였는데, 내용이 매우 슬프고도 맑아서 보는 사람들이 슬픈 마음으로
잘못을 깨닫고 감화된 경우가 많았다.
6. 귀를 잘라 꿩을 구제하다[割耳救雉]
수(隨)나라 지순(智蕣)스님은 조주(趙州) 사람으로 북쪽 정산(亭山)에 노닐다가 그 산중에 암자를 지었다. 하루는 어떤 사냥꾼이 꿩을 쫓고 있었는데, 그 꿩이 스님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스님이 놓아주기를 간곡히 권하였으나 사냥꾼은 들어주질 않았다. 그리하여 귀를 잘라 그에게 주자 사냥꾼은 깜짝 놀라 깨닫고서 활을 던지고 꿩을 놓아주었다. 이 일로 여러 마을에서 사냥하는 생업을 버리게 되었다. 스님은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을 볼 때마다 흐르는 눈물이 얼굴에 가득 찼으며, 옷을 벗어주고 음식을 줄여 보시하는 등 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찬탄하노라
맹자가 말하기를
'지극한 정성에는 감동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는데,
지순 노숙(老宿)에게서 이를 증험하겠구나.
7. 가난을 구제하러 관청에 나아가다[濟貧詣官]
수(隨)의 보안(普安 : 530~609)스님은 서울 경양(涇陽) 사람으로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이 불법을 탄압하자 종남산(終南山) 편재곡(편梓谷) 에 은거하였다. 몸을 돌보지 않고 고행을 하였는데, 혹은 풀밭에서 몸을 드러내놓고 모기들에게 피를 보시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널린 시체 사이에 누워 있으면서 호랑이나 표범에게 보시하기도 하였다.
이 때 나라에서는 스님 한 명 잡아오는 데 비단 10필을 현상금으로 내린다 하였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 스님을 잡으러 찾아오자 스님은 기꺼이 그를 위로하고 깨우쳐 주며 이렇게 말하였다.
"가난에 쪼들린 그대 모습을 보고, 마침 내 몸을 주려던 참이었다네."
그리고는 그를 위해 음식을 차려주고 함께 서울로 들어갔다.
황제가 말하기를,
"나라 법이 각박하여 승려를 민간에 허락하지 않는데도, 그대가 오히려 민간의 딱한 처지를 도왔구료. 승려를 산중에서마저 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면 쫓아낸들 어디로 가겠는가?" 라고 하며 스님을 산으로 들어가도록 풀어주었다.
8. 전염병이 도는 곳에 몸소 가다[躬處癘坊]
당(唐)나라 지암(智巖)스님은 단양(丹陽) 곡아(曲阿) 사람이다. 지혜와 용맹이 남보다 뛰어나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의 직책을 갖고 있었으며, 술주머니를 늘 활 머리에 걸고 다녔다. 그 후 완공산(浣公山)에 들어가 보월(寶月)스님에게 출가하였다.
하루는 지난날 같은 군인이었던 자사(刺史) 엄찬(嚴撰) · 장작(張綽) 등이 스님이 출가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방문하게 되었다. 심산에서 고적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스님에게 말하였다.
"낭장(郎將)께서는 광기가 도셨는가, 무엇 때문에 이런 데 있는고?"
스님이 응수하였다.
"나는 미쳤다가 깨어나려 하네만, 그대들은 바로 지금 미친기가 발동하려 하네."
석두성(石頭城)에 전염병 든 사람의 방으로 가서 그를 위해 설법해 주고 고름을 짜고 더러운 것을 씻어 주는 등 매우 자상하게 살펴주었다. 영휘(永徽) 연간(650~655)에 전염병이 도는 곳에서 임종하였는데 안색이 변치 않고 열흘이 지나도록 특이한 향기가 진동하였다.
9. 배의 종기를 입으로 빨다[口吮腹癰]
당(唐)나라 지관(智寛)스님은 포주(蒲州) 하동(河東) 사람으로 「유마경(維摩經)」 과 「보살계본(菩薩戒本)」을 항상 지송하더니 천신(天神)이 방을 에워싸는 경계를 보았다.
성품이 자혜(慈惠)로와 병든 사람 보살피기를 좋아하였는데, 이 일에는 승속(僧俗)의 신분이나 거리의 원근(遠近)을 따지지 않았다. 환자를 치료해 줄 사람이 없으면 즉시 수레로 자기 방에 싣고 와 몸소 환자를 치료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배에 종기를 앓는 환자가 있었는데 고름이 빠져 나오지 않았으므로 입으로 그것을 빨아내어 드디어는 완치되었다.
그 후 요감(袅感)이 반역을 일으켰는데 스님까지 연루되어, 서촉(西蜀) 지방에 유배되었다. 길을 떠날 때 주는 돈(財帛)은 모두 받질 않고 노새 한 마리에 경전을 실었을 뿐이었다.
길을 가다가 보섬(寶暹)이라는 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발이 부르터서 길 가에 누워 있었다. 스님은 노새를 주어 타게 하고 자신이 경전을 걸머졌다. 때에 흉년을 만나서 미음죽을 끓여 배고픈 사람에게 먹여주고 옷을 벗어 입혀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혹은 옷을 자르기도하고, 음식을 줄이기도 하여 남을 도우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교화를 권하여 그들을 염불하도록 인도하였다.
10. 뭇 쥐들을 기르며 은혜를 베풀다[惠養群鼠]
당(唐)나라 혜의(慧意)스님은 발우 속에 남은 음식을 방안의 쥐들에게 먹여 주었다.
그리하여 방안에는 100여 마리의 쥐들이 있게 되었는데 모두 잘 길들여져서 다투어 달려와 음식을 먹었다. 스님은 병든 쥐를 어루만져주기까지 하였다.
11. 이불을 같이 덮으며 개를 기르다[氈被畜狗]
당(唐)나라 지개(智凱)스님은 단양(丹陽) 사람으로 항상 3론(三論)을 강론하였다.
정관(貞觀) 원년(627)에 여요현(餘姚縣) 소룡천사(小龍泉寺)에 머물렀다. 당시 남쪽 월(越)나라 지방 풍속에는 개가 새끼를 낳으면 길가에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스님은 이를 가련히 여겨 데려다 길렀는데, 30~50마리에 이르렀다. 이불을 같이 덮고 함께 누워 있으면서도 더러움을 싫다 하지 않았다.
12. 더러움 질병도 싫어하지 않다[穢疾不嫌]
당(唐)의 도적(道積)스님은 촉(蜀)지방 사람으로 익주(益州) 복감사(福感寺)에 머물렀는데 성품이 인자하였다. 전염병이든 자가 있었는데 살이 썩어 문드러져 더러운 냄새가 심하여, 냄새를 맡은 사람은 코를 싸 쥐었다. 스님은 그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갔다 주면서 행동과 마음이 전혀 다르지 않았다. 혹은 같은 그릇에다가 음식을 먹기도 하였으며, 때때로 옷을 기워 주고 빨래도 해 주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까닭을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향기와 악취는 마음으로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이다. 내 어찌 마음을 둘로 하겠는가? 여기에 의지하여 연마할 뿐이다.
13. 질병을 간호하다 보살을 친견하다[看疾遇聖]
당(唐)의 지휘(智暉) 스님은 중운사(重雲寺)에 머물면서 목욕탕[溫室]을 새로 짓고
스님들에게 목욕을 시켜 주며 물도 주고 약도 공급하였다.
어떤 비구가 백나병(白癩病)이 걸렸는데 대중들은 그를 싫어 하였으나 지휘스님만은 안마하고 씻어 주면서 평상시와 같이 대해 주었다. 문득 신비한 빛과 좋은 향기가 퍼지므로 의아해 하는데, 홀연히 백나병 걸린 비구는 간 곳이 없었다.
찬탄하노라.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열반(涅槃)한 뒤에
병든 사람 공양하기를 좋아하라" 하셨는데
이는 그러한 이들 중에 성현이 많은 까닭일세.
지금 중운(重雲=智暉) 스님이 깨닫게 된 인연 또한
바로 이런 경우라 아니할 수 없네.
고금에 이런 일이 매우 많지만
우선 한두 경우를 소개하여
병든 사람을 혐오하고 버리는 자에게 권면하노라.
14. 길을 갈 때 우선 비질부터 하다[行先執箒]
당(唐)나라 혜빈(慧斌 :574~645)스님은 연주(兗州) 사람으로 경론을 박식하게 연구하였다. 그 후 오로지 선(禪)을 닦아 자비로 구제하는 일에 힘썼다. 여름에 길을 갈 때면 항상 작은 벌레를 다칠까 봐서 비를 잡고 우선 쓸어냈다. 또한 시주물을 얻는대로 아무도 모르게 보시하였으며, 갖가지 착한 일을 하고도 누설하지 말라 경계하였다.
15. 걸인을 도와 구제하다[贍濟乞人]
당(唐)나라 담선(曇選) 스님은 고양(高陽) 사람으로 흥국사(興國寺)에 거처하였는데 자비로 구제하기를 좋아하는 성품이라 재물을 쌓아두질 않았다. 큰 가마솥을 걸어두고 걸인들이 얻은 음식을 다 넣고 죽으로 만들어, 그들을 모두 앉혀놓고 스스로 알맞게 떠 먹도록 하였다. 그들의 남루한 옷차림에 수척한 얼굴을 보면 마음 아파하며 눈물을 떨구며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하곤 했다. 스님은 자기도 거지들과 함께 죽을 받아 먹으며, 여러 해 동안을 그렇게 살았다.
16. 계율을 베풀고 방생하다[施戒放生]
오대(五代) 때 영명 연수(永明延壽 : 904~975) 스님은 영명사(永明寺) 에 15년 동안 거처하면서 제자 1천7백명을 출가[得度] 시켰다. 천태산(天台山) 으로 들어가서는 1만여 사람에게 계(戒)를 주어 득도시켰으며 항상 7중(七衆 :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 · 사미 · 사미니 · 식차마나)에게 보살계(菩薩戒)를 주었다. 밤에는 귀신에게 음식을 보시하고 모든 생명들에게 방생을 베풀었다. 하루 12시간 도를 실천하였으며 여력이 있으면 「법화경(法華經)」 1만 3천부(部)를 지송(持誦)하였다.
개보(開寶) 8년(975) 12월 26일, 향을 사르고 대중에게 고하더니, 가부좌를 맺고 앉아서 열반하였다.
17. 자기 몸처럼 병을 간호하다[看病如己]
송(宋)나라 고암(高庵 : 1074~1132) 스님은 운거사(雲居寺)에 살 때 어떤 납자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면 연수당(延壽堂 :늙고 병든 이를 보살피는 간병실)으로 옮겨놓고 마치 자기 몸에 병이든 것처럼 걱정하였다.
아침 저녁으로 병 문안을 하고 몸소 약을 달여서 먼저 맛을 본 후에 환자에게 먹였다. 혹 날씨가 조금이라도 차가우면 그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옷은 한 벌뿐이 아닌지?" 하고, 혹 더워지면 그의 기색을 살피면서 "너무 덥지는 않느냐?" 하였다. 그러다가 죽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있고 없는 것을 묻지 않고 절의 비용으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뤄주었다.
찬탄하여 말한다.
경전에서도 8가지 복 중에서
간병(看病)이 제일이라 하셨으니
진실로 집 없는 납자가
세상 외톨이로 병고에 시달림을
불쌍히 여기심이 아니겠는가?
승방(僧坊)의 주지로서
병든 사람이 그에게서 조리하지 않고
죽은 사람이 그에게 염하지 않게 한다면
어찌 자비로운 도라 하겠는가?
모든 주지는 고암스님을 본받아야 하리라.
총 평
유학(儒學)의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는 사람의 4단(四端)이나, 그 가운데에서 인(仁)이 으뜸이 된다.
불교의 자(慈) · 비(悲) · 희(喜) · 사(捨)는 부처님의 4무량심(四無量心)이지만, 자(慈)가 우선이 된다.
자비로운 마음이 없다면 박하다문(博學多聞)과 신통삼매(神通三昧)가 있다 해도 모두가 마구니의 장난(業)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자비와 위엄을 함께 씀이 부처님의 도인데, 무엇 때문에 자(慈)만을 중요시 하는가?" 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사람은 살리고 죽이는 것이 모두가 인(仁)이며, 받아들이고 꺾어버리는 것 모두가 자(慈)임을 모른다 하겠다. 드러난 행동은 위엄이지만 그 실제는 자비인 것이다. 위엄스러우면서도 자비를 잃지 않는 이것을 큰 자비(大慈悲)라 하고, 모자간에 따뜻한 사랑과 끈끈한 은혜를 그냥 자(慈)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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