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치문숭행록緇門崇行錄

제 7장 고상한 행[高尙之行]

쪽빛마루 2014. 12. 7. 14:42

제 7장 고상한 행[高尙之行]

 

 

고상한 행[高尙之行]

 

 

1. 총애를 피하여 산으로 들어가다[避寵入山]

 

 진(晋)나라에 도오(道悟)스님이란 분이 있었는데, 진(秦)의 요흥(姚興)이 그에게 승복을 벗고 자기를 보필해 달라고 졸랐다. 스님이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가까스로 빠져 나와서는,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에게 재물을 주는 자는 내 정신을 좀 먹게 하는 마구니이며, 나를 이름나게 하는 자는 내 목숨을 죽이는 자이다'라고 하더니 바로 그와 같구나."

라고 탄식하였다.

 그 후로 더욱 그림자를 바윗골에 숨기고 초식(草食)을 연명하며 오직 선정(禪定)을 닦으면서 일생을 보내었다.

 

 

2. 맑고 한가한 모습을 존경하다[衆服淸散]

 

 진(晋)나라 혜영(慧永)스님은 천태종의 종장(宗匠)인 혜원(惠遠) 스님과

함께 여산(廬山) 에 거처하고 있었다.

 진남장군(鎭南將軍)인 하무기(何無忌) 가 심양(尋陽) 군수가 되자, 호계(虎溪)에 머물면서 평소부터 존경하던 혜영과 혜원스님을 청하였다. 혜원스님을 모시고 있던 100여 명의 스님들은 모두 단정하고 엄숙하여 위엄이 있었다. 그러나 혜영스님은 누더기에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발우를 지닌 걸승(乞僧)의 모습으로 소나무 아래에 표연히 이르렀는데, 그 태도가 더없이 태연자약하였다. 하무기가 그런 혜영스님의 모습에 감탄하여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혜영스님의 맑고 소박한 모습은 혜원스님보다 더 훌륭합니다."

 

찬탄하노라

 

혜원스님을 시종했던 100여명의 스님들은

백련사(白蓮社)의 영현(英賢)들이었네.

그런데도 하공(何公)은 혜영스님을 높이 찬양하는구나.

요즈음의 승려들은

종을 거느리고 일산을 펴들며

온갖 물건이 든 상자를 걸머지게 하여

높은 사람의 문전에 드나들며

그들의 대열에 끼고자 한다.

이런 승려들을 하공이 보았다면

또 무엇이라고 탄식하겠는가?

 

 

3. 왕의 공양을 누리지 않다[不享王供]

 

 요진(姚秦)의 불타야사(佛陀耶舍) 가 고장(姑臧) 지방에 있을때, 진나라 왕인 요흥(姚興)이 사신을 보내어 스님을 초빙하고 후하게 선물하였으나 받질 않았다. 스님이 도착하였을 때는 왕이 직접 나아가서 영접하였다. 왕은 별도로 새 부서[省]를 신설하고 왕궁 뜰에 새로이 관사를 마련하여 갖은 물건으로 공양하였으나, 또한 받지를 않았다. 공양시간이 되면 걸식해서 한 끼만 먹을 뿐이었으며 의발와구(衣鉢臥具)가 3간의 집에 가득 찼어도 가지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요흥은 이것으로 성의 남쪽에 절을 지었다 한다.

 

 

4. 어가를 맞이하지도 전송하지도 않았다.[駕不迎送]

 

 제(齊)나라 승조(僧稠)스님은 문선제(文宣帝) 가 우위군(羽衛軍) 을 거느리고 절에 이를 때마다 작은 방에 편안히 앉아서 결코 영접하거나 전송하질 않았다. 제자들이 간언하자 스님이 말하였다.

 "옛날에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는 일곱 걸음을 걸어 나가 왕을 영접하고 그로 인해 7년 후에 복이 감한 왕으로 하여금 나라를 잃게 하였다. 내가 진실한 덕이 그에게 미치지 못하면서도, 감히 껍데기인 형상이나마 스스로 속이지 못하는 것은 황제께서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세상에서는 그를 조선사(稠禪師)라 불렀다.

 

 

5. 귀한 사람과 결속하여 노닐지 않다[不結貴遊]

 

 양(梁)나라 지흔(智欣 : 446~506) 스님은 단양(丹陽) 사람인데, 경전의 의미를 깊이 연구한 학승으로 유명하였다. 영명(永明) 말년(485), 태자가 때때로 동전(東田)에 행차하여 자주 절에 왔다. 스님은 그럴 때마다 병을 핑계하여 종산(鐘山)에서 마음 넉넉하게 지냈다. 이렇듯이 스님은 홀로 한가히 지낼 뿐, 부귀한 사람과 사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다 선물이나 시주물이 들어오면 쌓아두지 않고 그것으로 자기가 머무는 사찰을 고쳐 짓는 데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6. 도적에게 길을 안내하지 않다[不引賊路]

 

 수(隨)나라 도열(道悅)스님은 형주(荊州) 사람으로 항상 「반야경(般若經)」을 지송(持頌)하며 옥천사(玉泉寺)에 살았다.

 주찬(朱粲)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가 절에 들어와 양식을 빼앗고 또 사람을 해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러자 주찬의 무리는 스님을 놓아주고 길을 인도하라고 행패를 부렸다. 몇 걸음 발을 옮기더니 스님은 땅에 주저앉으며 말하였다.

 "나는 사문이지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 한낱 허깨비 같은 몸을 그대의 흰 칼에 맡기노라"

 주찬은 스님의 고상함을 거룩하게 여기고는 풀어 보내주었다.

 

 

7. 조정에서 여러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屢徵不就]

 

 당(唐)나라 때 자장(慈藏)은 신라국(新羅國) 사람이다. 그윽한 수행의 덕이 높아 모든 사람들이 믿고 존경하였으므로 왕이 여러 차례 대궐로 불렀으나 산에서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왕은 크게 노하여 대신에게 이번에도 나오지 않으면 왕명을 거역하는 죄로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했다. 칼을 가지고 간 대신이 왕의 말을 전하고 하산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자장은 태연히 이렇게 말하였다.

 "차라리 하루만이라도 계율을 지키며 살지언정 파계(破戒)하고 평생을 살기를 원치 않는다."

 스님을 죽이지 못하고 간 대신이 이 사실을 빠짐없이 아뢰자 왕은 크게 감탄하였다.

 

 

8. 차라리 죽을지언정 일어나지 않다[寧死不起]

 

 당(唐)나라 선종이 4년(四祖)인 도신(道信 :580~651) 스님은 황매산(黃梅山)에서 30여 년을 머물렀다. 정관(貞觀 : 627~649) 연간에 태종이 3 번이나 조서를 내려 장안으로 오라 하였으나 번번히 병을 핑계하고 거절하였다. 황제는 사자에게 칙명을 내리기를,

 "다시 일어나지 않거든 그의 머리를 베어 오라."

고 하였다. 스님은 목을 내밀고 칼을 받겠다 하였으나 사자는 차마 베지 못하고 이 사실을 아뢰니, 태종은 탄복하여 진기한 보물을 하사하고 그의 뜻대로 따라주었다.

 

찬탄하노라

 

엄자릉(嚴子陵)이 광무제(光武帝)를 거절하고

충노(沖老)가 인조(仁祖)를 사양함은

절개 있는 선비의 일상사라 하겠으나

흰 칼날의 위협에도

뜻을 꺾지 않았다는 소리를

아직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저 하늘 날아가는 붉은 봉황을

바라볼 순 있어도 따라가지는 못하나니

도신스님이 그런 분이며

자장스님이 그런 분 아닌가?

 

 

9. 세번이나 조서를 내려도 가지 않다[三詔不赴]

 

 당(唐)의 분주(汾州) 무업(無業 :760~821)스님은 협서(狹西) 옹주(雍州) 사람이다. 목종(穆宗)이 좌가승록(左街僧錄) 인 영부(靈阜)스님에게 영을 내려 조서를 가지고 무업스님에게 가서 그를 일어나게 하라 하였다. 스님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빈도가 무슨 덕으로 임금을 여러번 번거롭게 하겠는가. 그대는 먼저 떠나도록 하라 나는 즉시 뒤따라 가리라."

 그리고 나서 목욕하고 좌구를 펴고 앉더니 문인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의 견문각지(見聞覺知) 하는 성품은 태허공(太虛空)과 수명이 같고, 일체의 경계는 본래 스스로가 공적(公寂)하건만, 미혹한 사람은 이를 알지 못하고 즉시 경계에 현혹되어 끝없는 생을 유전한다. 일체가 공적함을 항상 알면 어떠한 법에도 망정(妄情)을 내지 않으니,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 말을 마치자 단정히 앉아서 한밤이 되자 돌아가셨다. 영부스님이 되돌아가 이 사실을 아뢰자 황제는 크게 공경하고 찬탄하면서 시호를 대달국사(大達國師) 라 하사하였다. 스님은 현종, 목종의 양조(兩朝)를 지내오면서 3번이나 조서를 받았으나 가질 않았던 것이다.

 

 

10. 조서가 이르러도 일어나지 않다[詔至不起]

 

 당(唐)나라 나융(懶融 :594~657) 스님은 금릉(金陵) 우수산(牛首山)에 은거하고 있었다. 황제가 그의 명성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알현하라고 불렀다. 사신이 가자 스님은 땅바닥에 앉아서 쇠똥에 불을 지펴놓고 주워 온 토란을 구워 먹고 있었는데, 추위로 콧물이 턱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천자께서 조서를 내리셨읍니다. 존자께서는 일어나십시오."

 나융스님은 한찬을 바라보더니 되돌아보지도 않았다.

 사신은 웃으며 말하였다.

 "콧물이 턱에까지 이르렀읍니다."

 나융스님은 말하였다.

 "나에게 무슨 공부가 있어서 속인을 위해 콧물을 닦겠는가?" 황제는 그 말을 듣고 그 기이함을 찬탄하더니 그 뒤에 상을 후하게 하사하고 표창하였다.

 

 

11. 위험을 무릅쓰고 스님을 구하다[冒死納僧]

 

 당(唐)의 법충(法沖)스님은 농서(壟西 성기(成紀) 사람이다. 정관(貞觀 :623~649) 초에 개인적으로 출가하는 자는 극형(極刑)에 처한다는 칙령이 있었다. 이때 역양산(嶧陽山)으로 많은 스님들이 도망와서 난을 피하였는데 식량이 다 떨어졌다. 법충스님이 주(州)의 지사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출가한 일이 죽을 죄라면 내 몸으로 받겠소. 다만 도를 위해 양식을 베풀어주면 마침내는 복과 불법의 도움을 얻을 것이오."

 지사는 그 뜻을 높이 여기어 법을 어기면서도 널리 구해주었다.

 

 

12. 속인의 초대에는 가지 않다[不赴俗筵]

 

 당(唐)나라 도광(韜光) 스님은 영은산(靈隱山) 서쪽 봉우리에 띠집을 짓고 살았다. 자사(刺史)인 백거이(白居易)가 음식을 갖추어 놓고 그를 맞으려 하자. 스님은 게송으로만 답례하고 가지 않았다. 그가 답한 시 중에,

 

석장을 집고 감히 성시(城市)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놀란 꾀꼬리가 화려한 누각에서 지저귀는 것을 염려해서라네

하는 귀절이 있으니, 그의 고상한 경지가 이와 같았다.

 

찬탄하노라

 

 일찌기 고덕(古德)이 조정에 있는 귀한 사람의 연회에 초청된 것을 거절하여 읊은 게송에 이런 귀절이 있다.

 

어제는 오늘 가겠다 기약하였더니

문을 나서 지팡이에 기대어 다시 생각해 보네.

승려는 산골짜기에 거처함이 합당하며

나라 선비의 잔치에 감은 마땅치 않네

 

 이는 도광스님의 고상한 경지와 앞뒤를 가릴 수 없으니 같은 바퀴자국에서 나온 듯하다. 아, 이 두 게송은 납자라면 아침 저녁으로 한 번씩 읊조려야 옳으리라.

 

 

13. 가사와 법호를 받지 않다[不受衣號]

 

 당(唐)나라 전부(全付 :881~946)스님은 오군(吳郡) 곤산(崑山) 사람으로, 어느날 남탑용(南塔涌) 스님을 뵙고 심지(心地)를 밝힌 바 있다. 그 뒤에 청화선원(淸化禪院)에 머물자, 전당(錢唐)의 충헌왕(忠憲王)이 사신을 보내어 자가사(紫袈裟)를 하사 하였다. 이에 전부스님은 소장(疎章)을 올리고 애써 사양하였으나, 사신이 거듭 내왕하자 또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겉치레로 사양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후세 사람들이 나를 본받아 자기의 욕심을 펼까 염려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런 뒤에도 왕이 순일선사(純一禪師) 라는 호를 하사하였는데 스님은 다시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4. 하사한 가사를 끝내 사양하다[力辭賜紫]

 

 오대(五代) 시대의 항초(恒超 877~949) 스님은 범양(范陽) 사람으로, 개원사(開元寺)에 머물면서 경론을 20 여 년이나 강론하였다. 그 동안에 고을 목사(牧使)와 사신들이 저마다 명함을 디밀며 뵙고자 하였으나, 스님은 대부분 동자에게 명함을 거두라 하며 직접 만난 사람이 퍽 드물었다. 이때에 군수 이공(李公)이 조정에 아뢰고 자의(紫衣)를 하사하려 하자, 이를 시(詩)로써 사양하였는데,

 

맹세코 경론을 전수하다 죽을지언정

명리에 오염되어 살지는 않겠노라.

 

라는 귀절이 있었다. 이공이 다시 다른 사람을 시켜 권면하였으나, 스님은 확고한

그 뜻을 결코 바꾸지 않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다시 오면 나는 저 노룡(盧龍)땅 변방 밖에 있으리라."

 상국영왕(相國瀛王)인 풍공(馮公) 도 그의 명성을 듣고 편지를 보내 우호관계를 맺으려 하자 항초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빈도가 일찍 부모를 버리고 뜻을 극복하며 수행한 이유는 본디 미륵보살께서 이름을 알아주시옵기를 기약한 것이지, 헛되이 조정의 재상들에게 전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읍니다. 어찌 헛된 명예와 들뜬 이익에 마음을 머물도록 하겠읍니까?"

 이 말을 들은 풍공은 그를 더욱 존중하여 조정에 표문(表文)을 올리고 억지로 자의(紫衣)을 하사하였다. 스님이 돌아가시던 날에는 천악(天樂)이 허공에 가득하였는데, 이는 그가 도솔천에 환생한 분명한 증거이리라.

 

찬탄하노라

 

황금빛 가사를 몸에 두르고

재상의 문전에서 사교하는 일은

범부나 깊이 원하면서

그것을 얻지 못할까 염려할 뿐이다.

전부, 항초 두 스님께서는

두번 네번 굳게 사양하면서

자신을 더럽히는 일인 양 여겼다.

맑은 바람 천고(千古)에 부니

진실로 불길같이 치닫는 마음을 식히고

명리에 취한 눈을 깨웠다 하겠다.

 

 

15. 왕궁을 즐겁게 여기지 않다[不樂王宮]

 

 후당(後唐) 정변(貞辨 : 863~935) 스님은 중산(中山) 사람이다. 스님은 각고의 정진을 하면서 피를 뽑아 경전을 쓰기도 하였다. 이 때 병주(幷州)에서는 외부 승려를 용납하지 않았으므로 스님은 들판 밖으로 나가서 옛 무덤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무제(武帝)가 사냥놀이를 하고 있을 때 스님은 무덤에서 나왔다가 깃발이며, 말, 수레들을 보고는 다시 무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무제는 스님을 사로잡아 그 까닭을 묻고 무덤 속을 조사해 보니, 풀로 만든 방석과 책상, 벼루, 소초(疏鈔)만이 널려져 있을 뿐이었다. 무제는 스님을 왕부(王府)에 들어오게 하고 공양하였으며, 관태후(管太后)도 깊이 우러러 존중하였는데, 스님은 마침내 태후께 호소하며 말하였다.

 "본래 이 몸은 불법 배우는 것을 소중하게 여겼읍니다. 이렇게 왕궁에 오래도록 머무는 것은 마치 수갑을 차고 있는 것과 다름 없읍니다."

 그러자 황제는 그가 자유롭게 살도록 놓아주었다.

 

 

16. 추천서를 소매 속에 넣다[袖納薦書]

 

 송(宋)의 설두 중현(雪竇 重顯 :980~1052) 스님은 지문 조공(智門祚公)에게 법을 얻었다. 한번은 스님이 절동(浙東) · 절서(浙西) 두 지방에 유람하려 하자, 학사(學士)인 증공(曾公)이 말하였다.

 "영은산(靈隱山)은 천하의 명승지이며 그 곳 산선사(珊禪師)는 나의 친구입니다."

 그리고는 편지를 써서 중현(重顯) 스님을 추천하여 주었다. 스님은 영은산에 이르러 3년간을 대중 가운데 숨어 살았다. 얼마쯤 지나서 증공이 절서 지방에 명(命)이 있어 갔던 길에 영은산으로 중현스님을 방문하였는데, 대중 가운데는 아는 이가 없었다. 그 때에 대중이 천여 명이나 살았으므로 관리를 시켜 승적을 모두 뒤지게 하였다. 마침내 중현스님을 찾아내어 지난날 주었던 추천서에 대해 묻자, 스님이 소매 속에서 이를 내어 놓았는데 봉함(封緘)이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스님이 말하였다.

 "공의 뜻은 갸륵합니다. 그러나 행각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구하는 것이 따로 없는데 감히 추천이나 영달을 바라겠읍니까?"

 증공은 크게 웃었고, 산선사(珊禪師)는 이로써 중현스님을 기이하게 여겼다.

 

찬탄하노라

 

요즈음 사람들은

귀한 벼슬아치의 편지를 얻으면

귀한 구슬을 얻은 듯 여기며

밤낮으로 써주기를 구한다

이는 설두스님의 가풍을 들어보지 못해서이리라.

나는 설두스님이 염창(拈唱)한 종승(宗乘)이

번갯불이 걷히듯 우뢰가 진동하듯 하며

덕산(德山), 임제(臨濟)의 모든 노숙(老宿)들에

양보하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겼더니

그의 평생을 상고해 보니

그 그릇과 도량이 원래 범상치 않았었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자신부터 사랑하지 않으면 안되느니라.

 

 

17.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고 버리다[葉書不拆]

 

 송(宋)나라 무녕(武寧)의 혜안(慧安)스님은 원통 수(圓通秀) 스님과 함께 철벽 같은 마음으로 천의(天衣)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혜안스님은 무녕(武寧)의 황폐한 마을 부서진 사원에서 외롭게 30여 년을 지냈고, 원통스님은 조서에 응하여 법운사(法雲寺)에 거처하였는데 그 위광(威光)이 매우 빛났다. 하루는 원통스님이 편지로 혜안스님을 초청코자 했으나 스님은 이를 뜯어보지도 않고 버렸다. 시자가 그 까닭을 묻자 스님이 말하였다.

 "나는 처음 원통스님에게 빼어난 기운이 있으리라 여겼는데 지금에야 그의 어리석음을 알겠다. 출가한 사람이라면 무덤 사이나 숲 아래서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일대사를 결판내야 한다. 그런데 까닭없이 팔방으로 통하는 번화한 거리에 큰 집을 지어놓고 수백명의 한가한 놈들을 기르고 있구나. 이는 참으로 눈뜨고 침상에 오줌을 싸는 격이니, 내가 무엇 때문에 다시 그를 대하겠는가?"

 

찬탄하노라.

 

원통스님은 대중이 많았고

혜안스님은 홀로 있었으나

이는 서로의 입장을 바꾸면 모두가 그러했으리라.

혜안스님이 원통스님을 비난하고 꾸짖었던 것은

세상의 완악하고 어리석은 무리들이 모여 있는 것을

경책하였을 뿐이다.

미루어 보건대

그나마 한가한 놈을 기르는 것은 그래도 옳다 할지라도

요즈음에 길러지는 것들은 부질없이 바쁜 놈들이니

하물며 무엇을 말하겠는가?

 

 

18. 사신을 마주하고 발우를 태워버리다[對使焚鉢]

 

 송(宋)나라 혜련(慧璉) 스님은 장주(漳州) 사람이다. 황우(皇祐 : 1049~1053) 연간에 황제께서 화성전(化城殿)으로 불러 질문함에 답하였는데, 황제의 뜻에 맞았으므로 대각선사(大覺禪師)라는 호를 하사 받았다. 스님은 계율을 매우 엄하게 지켰는데, 한번은 임금이 사신을 보내 용뇌발우(龍腦鉢盂)를 하사하자, 사신 앞에서 이를 태워버리며 말하였다.

 "우리 불법에서는 무색의 옷을 입고 질그릇 발우에 음식을 먹습니다. 이 발우는 법답지 못하므로 쓸모 없읍니다."

 사신이 되돌아가 이 사실을 아뢰자 임금은 가상히 여기고 오래도록 찬탄하였다.

 

찬탄하노라

 

스님은 발우를 태우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없었으며,

영조(英祖)는 아뢰는 말을 듣고도 노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른자 '엄자릉(嚴子陵)선생이 아니었다면

광무제(光武帝)의 위대함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요

광무제가 아니었더라면

선생의 고상함을 이루지 못했으리라' 한 것이니

종문(宗門)의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총 평

 

 위에서는 임금에 대한 충성을 기록하였고, 여기에서는 고상한 행동을 기록하였다. 고상한 행동이 옳다고 하여 곧 임금에게 충성한 것은 잘못인가? 그렇지 않다. 어떤 것을 지켰는가를 되돌아 보면 될 뿐이다. 도가 바위굴에 가득하면 명성이 조정에까지 들리어, 위로는 임금을 제도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제도하니, 법을 널리 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올바른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애석한 것은 대도를 이루지 못하고 자신을 굽혀 영화를 구하는 자들이니, 불문에 수치를 끼칠뿐이다.

 아-아, 출가자가 되어 진실로 도로써 자신을 소중하게 하여 국왕과 대신으로 하여금 천하에 도를 즐기며 세력을 잊은 스님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찬탄하고 존경하게 한다면 그 충성도 많다 할 것이다. 어찌 반드시 임금을 대하여 법문을 하는 것만을 충성이라 하겠는가?

 남양충국사(南陽忠國師)는 총애가 7대 조정에 뻗쳤고, 무업(無業) 스님은 세 번의 조서를 힘써 사양했던 것이 서로의 위치와 경우는 동일하지 않지만, 그 도와 충성이 같다는 것을 이로써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