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오가정종찬五家正宗贊

9. 부용 도해(芙蓉道楷) 선사/ 1042~1118

쪽빛마루 2015. 2. 7. 08:36

9. 부용 도해(芙蓉道楷) 선사

     / 1042~1118

 

 스님은 투자스님의 법제자로 법명은 도해(道楷)이며, 기주 자씨(沂州雌氏) 자손이다.

 처음 투자스님을 찾아뵈었을 때 물었다.

 “부처와 조사의 말씀은 집에서 늘 밥 먹고 차 마시는 일과 같은데 그 밖에 따로 학인을 위해 하신 말씀은 없었습니까?”

 “그대가 한번 말해 보아라. 나라에 천자가 칙명을 내릴 때 요순우탕(堯舜禹湯)의 성군을 빌려 말하지 않느냐?”

 스님이 무어라 대답하려는데 투자스님이 불자로 스님의 입을 때리면서 말하였다.

 “네가 뜻을 세워 여기 왔을 때 일찌감치 몽둥이 20대를 때렸어야 했다.”

 스님이 여기서 깨치고 공손히 절한 뒤 떠나려 하자, 투자스님이 말하였다.

 “이보게, 잠깐 이리 오게나!”

 스님이 돌아보지도 않자, “그대가 의심없는 경지에 이르렀느냐?”라고 물었으나 스님은 얼른 귀를 막았다.

 

 하루는 투자스님을 모시고 정원을 거니는데 스님에게 주장자를 전네주며 말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이 도리에 맞겠지!”

 “스님께 짚신을 드리고 지팡이를 드리는 것이 제 분수 밖의 일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행이 있지 않느냐?”

 “그 한 사람은 가르침을 받지 않습니다.”

 투자스님은 말을 그만두었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스님에게 말하였다.

 “빨리 오너라. 이야기를 끝내지 못했다.”

 “다시 말씀해 보십시오.”

 “묘시(卯時)에 해가 돋고 술시(戌時)에 달이 뜬다.”

 스님이 등불을 켜들고 오자 투자스님이 말하였다.

 “여기 올라오고 내려가고 할 때 한번도 빈 손인 적이 없구나!”

 “제가 가까이서 모실 때는 이렇게 해야 도리에 맞다 하겠습니다.”

 “누구집에서는 노비나 계집종이 없다더냐?”

 “스님께서는 연로하시니 시중들 사람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정성이 지극하구나.”

 “은혜에 보답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상당하여 말하였다.

 “대낮에 기타림(祇陀林)에 들어가니 밝은 달이 중천에 떠 있고, 한밤에 영취산에 올라가니 태양이 눈부시다. 까마귀는 흰 눈과 같고 외로운 기러기는 떼를 이루었는데, 무쇠개는 짖어대며 하늘을 날고 진흙소는 싸우며 바다로 뛰어든다.

 바로 이러한 때 시방의 사람이 모두 함께 모였으니 너와 내가 있을 수 있겠는가. 옛 부처 도량에서나 조사의 문하에서는 모두가 한쪽 손을 내밀어 왕래하는 학인들을 맞이하는데, 여러분이 한번 말해 보아라. 이렇게 하여 어느 쪽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를.”

 한참 잠자코 있다가 말하였다.

 “그림자 없는 나무를 심어 후인이 보도록 남겨두리라.”

 

 한 스님이 물었다.

 “오랑캐의 노래는 5음(五音)에 속하지 않아도 그 여운은 하늘까지 울린다 하니, 스님께서 한번 불러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무 닭은 야반삼경에 울고, 쇠 봉황은 새벽을 부른다.”

 “이렇게 되면 한 곡조 속에 천고의 운치를 머금었으니, 법당에 가득 찬 행각승이 모두 음율을 알겠습니다.”

 “혓바닥 없는 동자가 이 노래에 화답할 수 있을 것이다.”

 “솜씨 좋은 선지식은 사람과 하늘의 안목입니다.”

 “두 조각 입술을 다물고 나가거라.”

 

 대관(大觀 : 1107~1110) 초에 개봉부윤 이효수(開封府尹李孝壽)가 조정에 아뢰었다.

 “도해스님의 도행은 총림에 탁월하니 마땅히 그를 포상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임금(宋 · 徽宗)은 붉은 색 가사와 정조선사(定照禪師)라는 법호를 내렸다. 내시가 칙명을 받들고 오자 스님은 임금께 감사하는 뜻으로 절을 하고 자기 뜻을 말하였다.

 “지난날 출가할 때에 큰 서원을 세웠는데, 그것은 명리를 따르지 않고 오로지 성심껏 도를 배워 구족(九族)에게 도움이 될 것이며, 조금이라도 이 마음을 어길 때는 마땅히 목숨을 버리겠노라 하였다. 부모는 이 때문에 출가를 허락하였는데, 이제 만일 본심을 지키지 못하고 남몰래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면 불법은 쇠퇴될 것이다.”

 그리고는 글[表]을 지어 굳이 사양하였으나, 휘종은 개봉부윤에게 명을 내려 칙령을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굳이 뜻을 바꾸지 않아서 어명을 거역하였다. 하여 죄를 받게 되었다. 임금의 명으로 형관(刑官)에게 보내지자 형관은 스님의 진심을 알고 있는 터라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고 물었다.

 “평소에는 병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소.”

 “병이 있다 말하면 법적으로 형을 받지 않게 됩니다.”

 “이미 후의를 잘 알고 있지만 거짓말을 하고는 내 마음이 불편하오.”

 그리고는 담담하게 형을 받고 유배를 떠나자 뒤따르는 사람들이 마치 저잣거리에 모여드는 것처럼 많았다.

 스님은 유배지 치주(淄州 : 山東省)에 이르러 집을 빌려 살았는데 학인들이 더욱 모여들었고, 그 이듬해 겨울 “편할대로 하라”는 사면령을 받고서 부용산에 암자를 지으니,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운집하여 조동종의 종풍을 크게 펼쳤다.

 

 대중에게 말하였다.

“이 산승은 이렇다 하게 수행한 것이 없는데도 송구스럽게 총림의 주인이 되었으니, 어찌 가만히 앉아 사원의 재물을 소비하며 옛 성인의 부촉을 싹 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옛분들이 주지하시던 법도를 그대로 본받아 여러분과 의논하고 결정코저 하노라.

 다시는 산을 내려가지 말 것이며, 마을에 공양을 나가지도 말고, 화주를 보내지도 말 것이다. 오직 절 밭에서 생산되는 것을 360등분하여 하루에 1등분씩 사용하되 사람 수에 따라 늘이거나 줄이지 않겠다. 밥을 지을 만하면 밥을 짓고 모자라면 죽을 끓이며 그것도 부족하면 미음을 끓일 것이다. 새로 들어오는 스님들과 서로 인사할 땐 차만 끓일 뿐 그 밖에 음식물을 덮히거나 불을 지피는 일이 없게 하라. 차마시는 방은 한 군데만 설치하여 각자각자 사용하되 힘써 인연을 줄이고 오로지 도를 깨치는 데 힘써라.”

 스님이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온 후 형관이 얼굴에 먹물자국을 없애려 하자 스님이 말하였다.

 “이는 먼저 임금께서 님기신 자국인데 어찌 없앨 수 있겠는가.”

 황제는 이 말을 듣고서 말하였다.

 “이 노인이 죽을 때까지도 꼬장꼬장하겠구나.”

 

 영원 유청(靈源惟淸)스님이 스님의 영정에 찬을 썼다.

 

엄동설한 폭설이 내리면

그때서야 송죽의 절개를 보니

아름다운 풀 싱싱한 꽃은

모두가 조화신공을 완성하는데

세간의 영화를 훔친다면

실로 은혜를 저버리는 일일세.

嚴天大雪  始見松筠

媚草夭花  亦成造化

苟竊世榮  實孤恩者

 

찬하노라.

 

꼬장꼬장한 고집쟁이 노승이여!

등뼈가 무쇠로 생겼구나

 

 

나라의 칙명에 요순우탕을 빌릴 것 없는데

조동의 종풍에 회호(回互)하는 편정(偏正)을 어찌 가리랴

 

 

참으로 의심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얼른 두 귀를 막아버리며

솜씨좋은 선지식이라 하자마자

두 조각 입술을 닫고 나가는 것이 좋겠다 하였네

 

 

오랑캐 노래에는 음율이 없는데

야반삼경에 나무 닭이 운다고 말하지 말라

조사 문하에 공훈이 끊어지니

부질없이 손 내밀어 그림자 없는 나무를 심게 하였네

 

 

동행한 사람은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 하니

부질없이 그에게 지팡이 가져와라 짚신 가져와라 하였고

오거나 가거나 언제나 맨손이라 해도

누구 집엔들 종놈과 계집종 없겠나

 

석녀는 베틀에서 짜고 목인(木人)은 비단을 펼쳐 보이는데

옛 보따리 뒤져보니 분명코 집안의 보물이요

진흙소가 바다로 들어가고 무쇠개는 하늘을 나는데

아름다운 법문을 널리 드러내는구나

 

가뿐한 스님의 그림자 치주로 떠나가니

송죽같은 절개는 눈과 서리 몇 번이나 우습다했던가

반듯한 자태로 임금의 신표[漢節]갖고 돌아오니

부용화는 몸소 비 이슬 같은 은택을 맞았노라

 

 

죽도 좋고 밥도 좋으니

삼백예순날 밥짓는 살림살이 말해주고

스님이든 속인이든

3만 6천 도량에 선상을 마주하고 꿈 이야기 꽃피웠네

 

휘늘어진 백발에

옛 임금의 유묵을 지킨 일 오히려 새롭고

아름다운 풀과 싱싱한 꽃이 조화공 완성함을 보니

세간의 영화를 훔친다면

얼굴에 땀이 비오듯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