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대장경에 편입된 명교스님의 저술들
명교 숭(明敎契崇 : 운문종) 선사는 명도(明道 : 1032~1033) 연간에 예장(豫章) 서산(西山)의 구양방(歐陽昉)에게서 그의 집에 소장되어 있는 책을 빌려왔다. 봉성원(奉聖院)에서 그 책을 보다가 드디어 불교의 오계(五戒)와 십선(十善)이 유교의 오상(五常)과 통한다는 사실을 알고 「원교론(原敎論)」을 지었다.
당시 구양 문충공(歐陽文忠公 : 脩)은 당(唐)의 한창려(韓昌黎 : 韓愈)를 흠모하여 불교를 배척하였고, 우강(盱江)의 이태백(李泰佰)도 그러한 부류였다. 숭선사는 그의 저서를 가지고서 세차례나 이태백을 방문하여 유가와 불가의 일치점을 논하고 그의 학설을 반박하였다. 이태백은 스님의 격조높은 문장을 좋아하고 훌륭한 논리에 승복되어 문충공에게 서신을 보내 숭선사를 추천하였다. 얼마후 스님은 항주(杭州) 영은사(靈隱寺)에 머물면서 「정종기(正宗記)」와 「정조도(定祖圖)」를 저술하여 서울로 올라갔다. 가던 도중 개봉부(開封府)를 지나는 길에 부윤(府尹) 왕소(王素 : 仲儀)에게 편지를 보내자 왕소는 황제에게 문서[箚子]를 올렸다.
"저는 지금 항주 영은사의 승려 설승이 저를 통하여 올리려는 글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선문에서 법을 전해온 조사스님들의 계통이 분명하지 못하여, 얄팍한 지식을 가진 교학자들이 제각기 전법에 대한 기록을 고집하여 고금에 잦은 시비를 불러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대장경을 찾아 따져 보고 선문 조사들의 내력을 빠짐없이 적었습니다. 그 중 번거로운 것은 삭제하고 요점만을 발췌하여「전법정종기(傳法正宗記)」12권과 「정조도(定祖圖)」한 장을 그려 옛 전기의 오류를 바로잡았고, 아울러「보교편(輔敎編)」에 주석을 달아서 한 부(部) 세 권으로 찍어내었습니다. 이것들과 함께 상소 한 통을 폐하께 올리고자 하는데, 이는 결코 폐하의 은총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며 저에게 잘 올려달라 하였습니다.
저는 조금이나마 불교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터라 그의 저술을 살펴보니 결코 억설이 아니며 매우 치밀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정사를 살피시고 남은 시간에 불법의 희열을 깊이 얻으셨습니다. 그러니 이 책을 보시고 혹시라도 취할 만한 것이 있다면 중서성(中書省)에 내려 자세히 읽어보도록 하고 이를 대장경 목록에 넣게 해 주십시오."
인종황제는 그 책을 보고 왕소의 말을 수긍하여 중서성에 내려 보냈다. 승상(丞相) 한위공(韓魏公)과 참정(參政) 구양문충공(歐陽文忠公)은 그 책을 보고 서로 감탄해 마지 않았으며, 경전을 찾아가며 사실을 고증해보니 조금치도 오류가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스님에게 명교대사(明敎大師)라는 법호를 내려 스님의 공을 높이 샀으며 그 책을 대장경에게 넣도록 하였다.
중서성의 문서(箚子)는 다음과 같다.
"권지개봉부윤(권知開封府尹) 왕소(王素)가 아뢰기를, 항주 영은사의 승려 설승이「전법정종기」와 「보교편」3권을 지었다 하니 전법원(傳法院)에 명하여 이 책을 대장경에 수록 하도록 하라."
이 문서를 전법원에 보내 이 내용에 따라 처리하게 하였다.
숭선사의 격조높은 문장과 지극한 이론은 훌륭하게 교화를 베풀 만하였고, 게다가 이 책을 올려 대장경에 수록되게 하였으니, 불법의 기강을 유지한 그의 공로는 세월이 가도 시들지 않을 것이다. 아! 우리들은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할 책이니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가 누리는 이 복이 다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를 어찌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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