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나호야록羅湖野錄

12. 부필(富弼)의 편지

쪽빛마루 2015. 8. 21. 13:07

12. 부필(富弼)의 편지

 

 부정공(富鄭公 : 弼)이 호주(毫州)를 다스릴 때 화엄 옹(華嚴顒)선사를 맞아하여 그의 관할구역에 묵도록 하고 심법을 물어 깨달음을 얻은 후에 작별하였다. 그후 옹선사의 편지에 답서를 보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불법을 물을 수 있는 것은 필시 전생의 인연이지 금생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셨으니 참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가 스님을 만난 것은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잊었던 일을 하루 아침에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는 반드시 생사의 고해에서 벗어날 것이니 이는 예사로운 만남이 아니며, 아무리 해도 말로는 모두 표현할 수 없습니다. 스님께서야 나같은 사람을 수없이 얻는다 하더라도 당신의 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저 한사람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화엄법회에서 늙고 병든 속인 하나가 나왔다 한들 스님에게야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소위 쓸모없게 되었다는 말이 이런 경우인가 봅니다. 저도 항상 옛스님들께서 처음에 은사스님을 시봉할 적에 으레 20 · 30년, 적게는 십여년동안 날마다 도를 듣고 법문을 들은 뒤에야 비로소 철두철미하게 깨달았다는 사실을 새겨 봅니다. 생각컨데 저는 두차례 스님의 돌보심을 받았고, 그때마다 두 달 동안 법문을 들었습니다. 또한 남보다 총명하여 얼마의 공부를 이루었다고는 하나, 만일 스님의 좋은 방편과 힘든 꾸지람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그 가장자리라도 엿볼 수 있었겠습니까? 내 몸이 부서져 뼈가 가루가 된다 해도
보답할 수 없습니다. 언제 다시 뵙게 될지 모르겠고 밤낮으로 잊지 못하는 마음뿐입니다."

 

 아! 옛날 부처님께서 "부귀를 누리면서 도를 배우기는 특히 어렵다"고 하셨다. 더구나 신하로서 가장 높은 지위에 이르렀고 공명을 한몸에 지닌 그가 도를 이루었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의 서신에서 옹선사를 높이 받들면서 스스로 예사로운 만남이 아니라고 한 말이 어찌 남을 속이는 말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