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나호야록羅湖野錄

27. 겸손과 지조를 갖춘 스님 / 세기(世奇)수좌

쪽빛마루 2015. 8. 21. 13:15

27. 겸손과 지조를 갖춘 스님 / 세기(世奇)수좌

 

 성도부(成都府)의 세기(世奇 : 임제종 양기파)수좌가 처음 서주(舒州) 용문사(龍門寺)에 있을 때였다. 한번은 좌선을 하면서 졸고 있다가 개구리 떼 우는 소리를 듣고서 정발판(淨髮版 : 머리 감으라고 알리는 판) 소리로 착각하고는 막 달려가는데 누군가가, 이는 개구리 소리지 정발판 소리가 아니라고 알려주었다. 이에 세기수좌는 번뜩하는 것이 있어 방장실을 찾아가 자세히 말씀드렸다. 그러자 불안(佛眼)선사가 "라후라(羅喉羅)의 고사도 듣지 못하였느냐" 하는데, 기수좌가 갑자기 말을 막으며 "스님께서 굳이 말씀하실 것 없습니다. 제가 돌아가서 스스로 생각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하였다. 얼마 후 깨달은 바 있어 게송을 지었다.

 

잠결에는 목판소리가
깨고보니 개구리 울음
청개구리 울음과 목판소리가
묏부리에 함께 울리네.

夢中聞版響  覺後蝦嘛啼

蝦嘛與版響  山嶽一時齊

 

 이 일을 계기로 더욱 참구하여 결국 심오한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불안선사가 여러차례 같이 절 일을 보자고 천거하였으나 그는 극구 사양하였다.
 "저의 얕은 공부로 어떻게 남의 모범이 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남의 결박을 풀어주는 일은 마치 금 바늘로 눈에 낀 막을 긁어내는 것과 같아서,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눈동자까지 다치게 됩니다."
 불안스님은 그를 가상히 생각하여 게송을 지었다.

 

도란 사양할 줄 아는 데 있고
겸손은 자기를 돌이켜 본 데서 비롯되는 것
이미 청운 위에 있는 줄을 모르고
또다시 대중 속에 몸을 숨기려 하는구려.

有道只因頻退步  謙和元自慣回光

不知已在靑雲上  猶更將身入衆藏

 

 그의 겸손과 지조를 불안스님의 게송에서 엿볼 수 있다. 경박하게 떠벌리며 남의 스승이 되려는 사람들이 기수좌의 고매한 기상을 듣는다면 부끄럽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