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나호야록羅湖野錄

15. 경책문 / 회당(晦堂)선사

쪽빛마루 2015. 8. 21. 13:33

15. 경책문 / 회당(晦堂)선사

 

 황룡암(黃龍庵) 주인은 처음 남(南)선사의 유언을 받들어 산사의 주지를 맡아오다가 12년이 지난 후 법회가 한창 성할 때 의연하게 소임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는 서원(西園)에 살면서 그의 선실을 회당(晦堂)이라 이름하고 “내가 그만둔 것은 세상일이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불법을 하고자 한다” 하고는 문 위에 글을 써 붙였다.

 

 “선 공부하는 이들에게 고하노니, 이 도를 캐려 한다면 반드시 스스로 봐야지 남에게 대신하게 해서는 안된다. 때때로 인연을 간파하여 환희의 경지에 들어가거든 나를 찾아와 털어놓고 옳은지 그른지, 깊은지 얕은지를 평가 받으라. 아직 밝히지 못했거든 다만 쉬어버려라. 그러면 도가 저절로 실현될 것이니, 고생고생 앞으로 달려나간다면 점점 더 마음만 복잡해질 뿐이다. 말을 떠난 이 도리는 스스로 긍정하는 데 있지, 남의 깨달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밝혀야만이 바야흐로 무량겁을 내려온 생사의 근본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만일 말을 떠난 도를 보게 되면 일체의 성색과 언어 시비 이외에 다른 법이 없음을 볼 수 있으나 말을 떠난 도를 보지 못하면 눈앞의 차별 인연을 가지고 도를 얻었다고 짐작할 것이다. 이런 이는 눈앞의 그림자를 오인하여 자기도 모르는 결에 쓸데없는 법을 만들어 내니 결국은 자신을 속이고 심력을 낭비할까 걱정이다. 밤낮으로 사욕을 극복하고 정진하여 행부좌와 미세한 생각을 관찰하되 별달리 마음 씀이 없어야 한다. 오랫동안 이렇게 하다 보면 자연히 들어갈 길이 생기는 것이며, 아침저녁 배워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만일 이와같이 자세히 참구하지 못할바에는 차라리 남은 생을 경문이나 읽고 맡겨진 일을 하며 보내느니만 못하다. 또한 불법을 어지럽히고 비방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일없는 사람이 되어 노년을 보낸다면 더 이상은 굴레가 없을 것임을 내 감히 보장하는 바이다.
 그밖에 지금부터는 초하루 · 보름 두 차례만 방장실에 들어올 것이며, 이외의 방문을 사절한다.”

 

 소흥(紹興) 경신(1140)년 겨울, 남탕(南湯) 공(空)선사의 처소에서 이 글[牓]을 얻었는데, 공선사는 사심선사의 법제자이므로 회당선사가 평소 하던 일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는 분이다. 그러나 공부하는 이가 법을 갈구해야 비로소 열어 보여 주었으니, 초하루 · 보름을 정해놓은 것은 아마도 이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