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총림성사叢林盛事

총림성사 上 14~19.

쪽빛마루 2015. 9. 24. 11:23

14. 하늘을 꾸짖는다[罵天]는 호를 가진 스님 / 불등 수순(佛燈守珣)선사

 

 불등 순(佛燈守珣)스님의 호는 매천(罵天), 호주(湖州) 안길(安吉) 사람이다. 불감(佛鑑慧懃)스님의 법제자로 화산사(禾山寺)의 주지를 지냈다.

 어느 날 법상에 오르자 한 스님이 물었다.

 "'빈중빈(賓中賓)'이란 무엇입니까?"

 "나그네의 길은 하늘처럼 멀기만 한데, 문에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바다처럼 깊구나."

 "'빈중주(賓中主)'란 무엇입니까?"

 "먼 길손 떠나보낼 때, 집 떠나던 생각이 나는구나."

 "'주중빈(主中賓)'이란 무엇입니까?"

 "서로 만나 말에서 내리지 않는 것은 제각기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

 "'주중주(主中主)'란 무엇입니까?"

 "하루아침에 조사의 명령을 시행하니 어느 누가 앞에 나설까?"

 "'빈과 주[賓主]'에 향상사(向上事)가 있습니까?"

 "향상사를 가지고 물어 보아라."

 "향상사란 무엇입니까?"

 "큰 바다가 만일 스스로 만족하면 모든 강물은 아마 거꾸로 흐르리라."

 그 스님이 절하자 수순스님은 말하였다.

 "이는 내(珣上座)가 30년 동안 공부해서 얻은 것이다."

 

 

15. 시기를 받다 / 개복사 영도자(寧道者)

 

 개복사(開福寺) 영도자(寧道者 : ?~1113)는 흡주(歙州) 사람이며, 오조 법연(五祖法演)스님에게 공부하였다. 법연스님은 그의 고상한 뜻과 뛰어난 식견을 보고서 항상 대중 앞에서 그를 칭찬하고는 그에게 당사(堂司) 소임을 맡겼다. 그런데 도반들이 그를 시기하여 밤중에 산길로 끌고가서 이야기 끝에 때려서 얼굴에 상처를 입히니, 영도자는 대중법회에 나가지 못하였다. 법연은 이 소식을 듣고 몸소 찾아가 문병을 하고 물었다.

 "듣자하니 그대가 한 떼거리 놈들에게 봉변을 당했다던데, 어찌하여 방장으로 찾아와 억울함을 씻고 나에게 알려서 그놈들을 쫓아내지 않았느냐?"

 그러나 영도자는 차마 그 사실을 밝히지 않고 말하였다.

 "이는 제 스스로 다친 것이지, 다른 일에 관계된 것은 없습니다."

 오조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나의 인욕이 그대만 못하다. 뒷날 어느 누가 그대를 어찌할 수 있겠느냐?"

 뒤에 영도자는 개복사의 주지가 되어 회하에 500명의 대중을 수용하였다. 입적할 때에는 미리 입적할 날을 정해 놓고서 가부좌한 채 열반하였으며, 월암 선과(月菴善果 : 1079~1152)스님에게 법을 전했다. 월암스님은 대중의 밑바닥에 묻혀 있었기에 아무도 그를 알지 못하였지만, 원오(圓悟克勤)스님만은 그를 알고 있었기에 후일 그가 세상에 나가도록 도와주었고, 송을 지어 전송하였다.

 

흡산노인의 말후구를

명명백백 사절당(月菴이 주석한 곳)에 몸소 전하니

바른 법령 행하는데 그 기상 늠름하여

북두성에 쏘는 칼빛 하늘에 번뜩이네.

歙山老人末後句  的的親傳四絶堂

正令已行風凜凜  斗間劍氣燭天光 

 

 

16. 원오스님에게 귀의하다 / 응암 담화(應菴曇華)선사

 

 응암(應菴曇華 : 1103~1163)스님은 처음 장산(蔣山) 원오(圓悟)스님의 회중에 귀의하여 차암 경원(此菴景元 : 1094~1146)스님과 도반이 되었다. 경원스님이 처주(處州) 연운사(連雲寺)의 주지로 있을 무렵, 담화스님이 호구 소륭(虎丘紹隆 : 1077~1136)스님의 회중에 있다가 연운사를 찾아갔다. 처음 찾아왔는데도 경원스님은 그를 곧장 수좌를 시켰다가 얼마 뒤에 입승을 시키고는 법상에 올라 설하였다.

 "서하(西河)에 사자가 있다고 하더니만 이 연운사엔 호랑이(호구 소륭)새끼가 나타났다. 몸소 사나운 호랑이 굴 속에 있다가 나오니, 털무늬가 또렷하고 발톱과 이빨이 모두 갖추어 있다. 아직은 많은 무리를 놀라게 할 수는 없지만 이미 소 잡아먹을 뜻이 있다. 그는 양기종의 법령이 땅에 떨어져 자취가 없어질까 염려하여 무쇠 같은 등뼈를 한껏 곧추세우고 스승과 함께 기염을 토하고 있다. 여러분들은 누군지 알겠느냐. 눈이 가락지같이 큰 사람, 바로 우리 앞에 서있는 이 사람이다."

 스님은 뒷날 묘엄사(妙嚴寺)의 주지가 되었다. 호구(虎丘)스님을 위하여 향을 태우고 그 후 10년 동안 줄곧 그곳에 머물렀는데, 그의 도는 묘희스님과 견줄 만하였다. 시랑(侍郞) 이호(李浩)는 오랫동안 스님과 교류하였는데 일찍이 스님의 영정에 다음과 같은 찬을 썼다.

 

일생을 쉬지 않고 분주하더니

주지가 되자마자 문득 벗어버렸네

오늘날 또다시 영정 위에 나왔구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알겠도다.

平生波波挈挈  纔得箇院子住便打脫

而今又向幀子上出來  知他是死是活

 

17. 수견송(水筧頌) / 목암 안영(木菴安永)선사

 

 목암 영(木菴安永 : ?~1173)선사는 복주(福州) 장성자(章聖者)의 제자로, 유학을 버리고 불교에 귀의한 사람이다. 그는 사제 안분(安分)스님과 도반이 되어 양서암(洋嶼庵)의 나암 정수(懶菴鼎需 : 1092~1153)스님을 찾아뵙고 모두가 크게 깨쳤으며, 이를 계기로 '수견송(水筧頌 : '수견'은 물을 끌어오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홈통)'을 지었다.

 

가파른 만길 벼랑길을 돌아들면서

물을 지고 달빛 받으며 몇번이나 쉬었던고

이 하나 홈통 속에 하늘로 통하는 구멍을 돌려놓으니

사람 스스로 편안하고 물 스스로 흐르는구나

路繞懸崖萬仞頭  擔泉帶月幾時休

箇中撥轉通天竅  人自安閑水自流

 

 묘희스님은 이 송을 보고서 "정수에게 이런 아들이 있었다니, 양기의 법도가 아직까지 쓸쓸하지 않구나!"라고 감탄하였다.

 뒤에 안영스님은 고산사(鼓山寺)의 주지를 지내니 강절(江浙)지방의 스님들이 모두 영(嶺)으로 들어갔다. 송원(松源崇岳 : 1132~1201), 무용(無用淨全 : 1127~1207), 식암(息菴達觀 : 1138~1212)등 여러 큰스님이 모두 스님 회하에 있었으며 후일 천남사(泉南寺)에서 열반하였다.

 

 

18. 묘희스님에게 참구하다 / 직도자[一庵善直]

 

 직도자(直道者)는 안주(安州)사람이다. 처음 회응봉(回應峰)아래 계신 묘희스님을 찾아뵙자 묘희스님이 물었다.

 "스님은 어디 사람인가?"

 "안주사람입니다."

 "내가 듣자하니 너희 안주 사람들은 씨름을 잘한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이 말에 직도자가 곧바로 씨름할 자세를 취하자 묘희스님은 다시 말을 이었다.

 "호남 사람이 물고기를 먹으면 호북 사람에겐 뼈다귀만 돌아간다 하더라."

 직도자가 물구나무를 선 뒤 나가버리자 다시 말하였다.

 "차갑게 식어버린 잿더미 속에 콩알 만한 불씨가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직도자가 마침내 묘희스님의 회하를 떠나 강절지방을 지나갈 때, 삼구(三衢)땅의 승(陞) · 식(式)이라는 두 사람과 동행한 적이 있었다.

 후일 금릉 보령사(保寧寺)의 주지를 지냈고, 묘희스님의 법제자가 되어 불법을 크게 떨쳤다. 유수(留守)인 승상(丞相) 진준경(陳悛卿)이 여러 절의 주지를 모아 다회(茶會)를 연 자리에서, "'유구무구(有句無句)'는 등나무가 나무에 얽힌 것 같다"라는 공안을 들어 여러 주지에게 이를 비판하도록 하였다. 여러 주지들은 모두가 교묘한 말로 승상의 비위를 맞추려 하였지만 오직 스님만은 맨 끝에서 다음과 같이 송하였다.

 

장씨도 기름을 짜고

이씨도 기름을 짜지만

혼신의 힘을 쓰지 않고

위에만 토닥거리는구나.

張打油  李打油

不打渾身  只打頭

 

 진준경은 매우 좋아하였으며, 얼마 되지 않아 직도자는 장산(蔣山)의 주지로 옮겨가게 되었다.

 

 

19. '정신없이 바쁜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다 / 혹암 사체(或菴師體)선사

 

 혹암 체(或菴師體 : 1108~1179)스님은 태주(台州) 황암(黃巖) 사람이다. 타고난 성품이 거칠고 소탈하여 무슨 일이든지 닥치는대로 도맡아보니 위아래 도반들이 '체란요(體亂擾 : 정신없이 바쁜 사체)'라고 불렀다.

 호국사(護國寺)에서 차암 경원(此菴景元)스님에게서 공부하였는데, 어느 날 나한전에서 수행하다가 갑자기 창고 아래에서 얻어맞는 행자의 비명소리를 듣고 훤히 깨쳤다. 곧바로 경원스님에게 달려가 말하니, 스님은 "이 막둥이가 앓다가 이제사 땀이 났구나!"라고 하였다. 얼마 후 그에게 지객(知客)을 맡기고 그 후 도전(塗田)의 화주로 보내면서 송을 지어 전송하였다.

 

어린아이 정수리에 세 개의 눈알을 달고서

팔꿈치에 험인(驗人)부적 열어젖히며

몽둥이로 죽이고 살리는 일 대단할 것 없으니

바다 건너 대장부가 되어 돌아와야 하느니라.

豎亞頂門三隻眼  放開肘後驗人符

杖頭殺活無多子  截海須還大丈夫

 

 그 후 할당(瞎堂慧遠 : 1103~1176)스님에게 귀의하여 호구사(虎丘寺)의 수좌로 있다가 소주(蘇州) 각보사(覺報寺)의 주지로 나아가 차암(此菴景元)스님의 법을 이으니 그의 법이 크게 떨쳤다. 그 후 초산(焦山)으로 옮겼는데 군수 시랑(侍郞) 증중궁(曾仲躬)이 항상 그에게 도를 물었으며, 스님이 입적했을 때 돌 벼루를 전해 주자 증시랑은 게를 지어 조문하였다.

 

외짝신으로 나는 듯 서풍을 따라가니

걸망 안에 아무것도 없네

벼루를 남겨두고 나더러 쓰라 하지만

늙은이 몸엔 허공을 가를 필력이 없구려.

翩翩隻履逐西風  一物渾無布袋中

留下陶泓將底用  老來無筆判虛空

 

 스님의 열반 게송은 다음과 같다.

 

쇠나무에 꽃이 피니

수탉이 알을 낳네.

일흔 두 해 만에야

요람의 줄을 끊누나.

鐵樹開華  雄鷄生卵

七十二年  搖籃繩斷

 

 스님은 참으로 임제종의 싹[種草]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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