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꿈속에서 지은 시 한 수 / 굉지 정각(宏智正覺)선사
굉지 정각(宏智正覺)선사가 원통사의 주지로 있을 때 어느 날 꿈속에서 시 한 구절을 지었다.
빽빽한 솔밭길 아름다운 문에
희미한 달 아래 황혼녘 되어 이르렀네.
松徑蕭森窈窕門 到時微月正黃昏
이로부터 몇 해 동안 그 시를 까마득히 잊은 채 지내왔는데 건염(建炎 : 1127~1130) 연간에 오랑캐를 피하여 삿갓 하나를 쓰고 절강(浙江) 동쪽을 지나 천동사에 이르니, 때마침 천동사는 주지가 물러난 뒤였다. 스님이 배에서 내려 첫 새벽을 뚫고 산에 들어가니, 마치 날이 밝은 때처럼 빽빽한 솔밭길이 고요한데 가는 연기 아지랑이 속에 달빛은 싸여 있었다. 이에 갑자기 지난 꿈속의 시구(詩句)가 생각났다. 객사에 들어가 이름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스님들 가운데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 "장노사(長蘆寺) 노스님 아니십니까. 어떻게 여기에 오셨습니까?"하고서, 주사(主事)에게 알리고, 주사는 그 고을 부사(府使)에게 알리니 부사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부사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천동사의 주인은 바로 습주(褶州)의 고불이라고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부사는 곧 첩지(帖紙 : 임명장)를 내려 관리를 객사에 보내 천동사의 주지로 초빙하였지만 스님은 굳이 이를 거절하고 응하지 않았는데 객사의 스님들이 억지로 들쳐메고서 방장실로 들어갔다. 그곳에 30년 동안 주지하여 이로부터 조동의 종풍은 크게 떨쳤다.
참으로 사원의 주지가 되는 인연도 애초부터 정해진 것이기에 구차스럽게 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29. 개당할 때 스승의 은혜를 잊지 않다 / 원극 언잠(圓極彦岑)스님
원극 잠(圓極彦岑)스님은 태주(台州) 선거(仙居) 사람으로, 고고한 절조를 지녀 근세에는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운거 법여(雲居法如 : 1080~1146)스님에게 오랫동안 귀의하여 17년 동안 서사(書司)를 맡아보았는데 법여스님이 입적하자 지팡이 하나 들고 절강 땅으로 돌아와 도량사(道場寺)의 정당 명변(正堂明辨 : 1085~1157)스님에게 귀의하였다. 얼마 후 명변스님은 그를 수좌로 삼은 후 삽주(霅州) 변산사(卞山寺)의 주지로 나가도록 하였는데, 그곳은 석림(石林) 선생이 역(易)을 강의하던 곳이기도 하다. 명변스님의 생각으로는 이번 개당(開堂)에서 자기를 위하여 향을 올리리라 생각했었지만 언잠스님은 끝내 운거 법여스님의 법을 이으니, 총림에서는 그를 우러러보았다.
뒤에 스님은 여러 대찰(大刹)의 주지를 지냈지만 복받을 인연이 순탄하지 못하여 세상살이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이를 개의하지 않고, 일생동안 시주로 들어오는 재물에 눈길 한번 둔 일이 없었다. 그 후 상주(常州) 화장도량(華藏道場)에 은퇴하여 세상을 마쳤으며, 그의 어록 20권이 세상에 전해오고 있고 시랑(侍郞) 증중신(曾仲身)이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언잠스님은 장노 차암(長蘆且菴)스님의 영정에 찬을 썼다.
깊은 밤중에 해를 밀어서 내놓고
날 밝으면 달을 붙잡아 둔다
수미산 사부주(四部州)를 뽑아들어
한 톨의 좁쌀 속에 집어 넣는다
줄없는 거문고를 켜지만 이상곡(履霜曲)*이 아니며
오랑캐의 노래를 부르지만 백설곡(白雪曲)이 아니라
큰 대장장이는 끊어진 광맥의 금을 담금질하고
모진 방망이는 흠없는 구슬을 때려 부순다
동쪽 호수의 붉은 꼬리 잉어가
황금빛 무쇠 송아지를 낳는구나.
夜半推出日輪
天明把住桂轂
拈將四部洲
放在一粒栗
奏無絃而非履霜之樂
唱胡歌而非白雪之曲
大冶煆絶鑛之金
痛鎚碎無瑕之玉
東湖赤梢鯉魚
生出金毛鐵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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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곡(履霜曲) : 남녀사랑의 노래.
30. 상당법문 / 혼원 담밀(混源曇密)스님
혼원 밀(混源曇密 : 1120~1188)스님이 자택산(紫籜山)의 주지로 있을 때 상당법문을 하였다.
"구름덮인 산은 아득하고 아름드리 나무는 울창한데, 옛 집은 가물가물하고 총림은 적막하구나. 나 혼원이 여기에다 가시나무를 심고 찔레 덤풀을 깔아 바깥과 굳게 막아 놓았으니 어느 누가 감히 바른 안목을 훔쳐볼꼬? 갑자기 한 놈이 나타나 여기서 몸을 돌려 숨을 쉰다면 진한 차 서너 잔을 대접하겠다. 그 뜻은 쟁기 끝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뾰족한 청산의 험한 길에서 푸른 하늘이나 볼 일이다. 공공연히 말해주지 않았다고 하지 말라!
봄 날씨 따뜻하고 꾀꼬리 지저귀는데 다시금 절벽 위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를 듣노라. 봄 산에 싸인 푸른 빛 속을 느릿느릿 걸어서 돌아올 땐 저 멀리 나는 새와 누가 함께 할꼬? 이렇게 돌아오는 한마디를 무어라 부를까. 팔굽혀 베개삼고 누워 저녁 종소리를 듣노라."
31. 승려를 업신여기는 형조관리에게 따끔한 편지를 쓰다 / 부정공(富鄭公)
정국공(鄭國公) 부필(富弼)은 투자 수옹(投子修顒)선사에게 공부하며 제자의 예를 다하였고, 인품이 신중하며 마치 처음 배우는 사람같았다. 뒷날 비부(比部 : 刑曹)의 우두머리 장은지(張隱之)가 그의 세력을 빙자하여 승려들을 업신여기자 정국공은 마침내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선가(禪家)의 사람들은 보통, 첩경으로 하지 않고 번잡스럽게 설명하는 것을 보면 그것을 '갈등(葛藤)'이라 하여 이를 천하다고 나무라기도 하며 마침내는 갈등가를 지어 문집에 게재하기도 한다. 나 부필은 일찍이 그 까닭을 생각해 왔는데 오늘 그대와 함께 생각해 보려하니, 어떻겠소?
세속의 선비와 승려들의 본성(本性)이나 식견이야 애당초엔 터럭끝만의 차이가 없겠지만 그들의 사적(事蹟)은 매우 다른 점이 있다. 우선 승려는 어릴 적에 출가하여 오랫동안 불경을 보면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부처에 관한 일들이다. 머리를 깎은 뒤에는 도반과 짝을 지어 행각하며 가고 싶은 곳에 가서 참선하고 도를 묻는 이외엔 대중생활을 한다. 견문이 해박하고 핵심적인 데다가 한없이 귀와 눈으로 보고 듣는다. 이렇게 해서 도가 성숙되다가 어느 날 눈 밝은 스승의 지적을 받고 그자리에서 견처가 생기면 그 때는 자신이 이제껏 보고 들은 바를 가지고 스스로 증거를 삼으니, 어찌 명백하고 통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 세속의 선비들이란 어릴 때부터 세속 일에 젖어 살다가 커서는 아내를 두고 자식을 기르며 생활을 꾀하고 벼슬길로 나아가기에 바쁘니, 경전 류는 일찍이 손에 잡아보지도 않는다. 설령 한가한 시간에 경전을 읽고, 즐긴다 해도 이야기 밑천이나 삼기 위해서일 뿐이니, 어떻게 그 깊은 진리를 깨칠 수 있겠는가. 또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모든 이는 제각기 그들의 일에 매여 있어 그들이 선림법석이 있는 줄을 알고서 설령 그곳을 찾아가 참구하고 싶다한들 어떻게 갈 수 있으며, 어떻게 도반과 짝이 되어 산사를 행각하며 참선하고 도를 물을 수 있으며, 대중과 함께 해박한 견문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만에 하나 눈 밝은 스님을 어느 계기로 만날 수 있다 하여도 아무런 공부가 없는 터에 얼마나 들을 수 있으며 얼마나 얻을 수 있겠는가? 묻는 것도 없이 보고 들은 것으로 스스로 증거를 삼고, 더이상 널리 묻거나 깊이 연구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겨우 한 두마디 듣고 그것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눈은 높아 은하수를 바라보고 콧대는 하늘 끝에 닿도록 거드름을 피운다. 제 스스로 '나는 부처와 조사를 뛰어넘었으며 수많은 성인이 모두 나의 발 아래 있노라'고 으스대며 불경이나 선종의 서적은 한번도 보지 않은 채 그것만으로 갈등이라는 비난을 피하려고들 한다. 그러나 이 부필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배우지 않으려면 그만이겠지만 만일 몸과 마음을 결택하기 위하여 배운다면 빈틈없이 치밀하게 탐색해야 할 것이다. 철두철미하게 뼈속에 사무치도록 깨달아 모든 것이 그대로 완전한 맑은 광명으로서 한 점 티끌도 가리우지 않도록 한 다음에야 비로소 나는 그대에게 고개를 숙이리라.
은지여! 이 일은 결코 하찮은 게 아니다. 당장에 무시이래로 있어 온 생사의 뿌리에서 벗어나 생사를 관장하는 염라대왕과 맞서야지, 사람들의 쓸모없는 말을 듣고 참선을 배울 것이라고 자신을 속여서는 안될 것이다.
그대에게 만복이 깃들기를 빌고 빌면서 부필은 비부(比部) 집사(執事)에게 글을 띄우노라."
32. 어제는 숲 속의 나그네, 오늘은 법당의 주지 / 초당 선청(草堂善淸)선사
초당 청(草堂善淸)선사는 회당(晦堂祖心)스님을 친견하여 깨친 바 있었으며, 그 후 강제(江淛) 지방을 두루 돌아다닌 후, 여산(廬山) 늑담사로 진정(眞淨克文)스님을 찾아뵙자 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왔느냐?"
"하강(下江)에서 왔습니다."
"무엇을 가져왔느냐?"
"스님께선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모든 것이 다 필요하다."
그러자 선청스님이 좌구를 들어올리니 진정스님이 말하였다.
"쓸모없는 세간살이로군!"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아닙니까?"
"한번 꺼내놔 보아라."
선청스님이 좌구를 내동댕이치고 나가버리자 진정스님은 크게 놀랐다.
뒷날 선청스님은 황룡사의 주지로 나아가 상당법문을 하였다.
"어제는 숲 속의 나그네더니 오늘 아침엔 법당 위의 주지로다. 버리고 취하는 게 모두 나에게서 비롯되니 만상 가운데 홀로 나의 몸이 드러나네."
그 다음해에 주지에서 물러나 절 동편 모퉁이에 암자를 짓고 오랫동안 그곳에서 지내다가 다시 주지가 되어 상당법문을 하였다.
"초당에서 6년 동안 숨 죽이고 살면서 마음 잊고 바깥 경계 고요하여 모든 인연 비웠노라. 정해진 업이란 어디에서 생겨나 예전처럼 나에게 조사의 종지를 잇게 하는지 알 수 없구나."
그후 조산(曹山)과 소산(疏山)등의 주지를 지냈으나 대부분 늑담사에서 살았다. 그때의 나이 이미 83세였으나 여러 곳의 큰 선비와 뛰어난 도인이 모두 그에게 귀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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