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소자유(蘇子由)의 게송들
영빈선생(穎濱先生) 소자유(蘇子由)는 한때 균양(筠陽) 땅에 유배되어, 진정(眞淨克文)스님과 깊은 교류를 나누었다. 그는 일찍이 두 수의 송을 지어 향성사(香城寺) 순(上藍順)스님에게 올렸다.
끝없이 많은 일을 녹여
다해서 하나의 마음을 만들었으나
그 마음마저 두지 않고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르렀구나.
融却無窮事 都成一片心
此心仍不有 從古至如今
보일 듯 하다가 다시 없는 듯
몇 차례 서로 만나 웃음을 지었던고
여기엔 머리도 꼬리도 없으니
몇자 몇치를 헤아리지 마오
동파노인을 알고자 하는가
당당한 사나이로다
요즘들어 이 일을 알고나서는
문서 따위는 아는 체도 하지않았네.
如見復如亡 相逢咲幾場
此間無首尾 尺寸不須量
欲識東坡老 堂堂一丈夫
近來知此事 也不識文書
당시 소동파도 유배지에 있었다. 소자유가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져 그가 사는 곳을 '동헌(東軒)'이라 이름 지었다는 말을 듣고 시를 지어서 놀려 주었는데, "동헌 장로를 수북이 담아 왔다[盛取東軒長老來]"라는 구절이 있다. 소자유가 이에 대하여 답하였다.
"설령 수북이 담아 와도 아무 쓸모없고 설당(雪堂)엔 원래 노스님이 계시는 곳[縱使盛來無用處 雪堂自有老師兄]"
또 한번은 도연명(陶淵明) 시에 화운(和韻)하였다.
중원 땅에 불법이 전해지자
유학자들은 얘기하는 것마저 부끄러워하였지만
그 공덕 보이지 않는 가운데 펼쳐 있으니
어찌 그 당시를 잊으오리까
이곳은 더러운 풍습으로 뒤범벅되어
흐리멍텅 이름난 스님이 없어
살림살이나 도닥거리며 가산만 지키려 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앉아서 의심하게 만드네
술 고기 나쁜 줄도 모르면서
어떻게 생사를 떠난다고
우리 민 땅엔 이런 풍조 만연하여
불사란 생각할 수조차 없네
영특한 아들 많이 낳아
부처님의 보응이 너를 속이지 않았다하나
때로 바른 법안을 지닌 스님이
한번 나오셔서 이를 밝혀 주리
누가 그 고을의 부호라고 말하는가
바라건대 나의 이 시를 읊조려보오.
佛法行中原 儒者耻論玆
功施冥冥中 而何負當時
此方舊染雜 渾渾無名緇
治生守家室 坐使斯人疑
未知酒肉非 寧與生死辭
熾然吾閩中 佛事不可思
生子多穎悟 得報不汝欺
時有正法眼 一出照曜之
誰謂邑中豪 請誦我此詩
6. 3교의 가르침 / 광록대부(光祿大夫) 조형(晁迥)
광록대부(光祿大夫) 조형(晁逈)은 불경과 그 밖의 서적들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만년에는 「법장쇄금(法藏碎金)」을 저술하였으며, 유 · 불 양가에 널리 유행되었다. 그의 말은 교화에 큰 도움을 끼쳤는데 그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유교에서는, 뜻있는 선비라면 학문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불서에서도 '학문이 없는 자는 그 도리를 분별하지 못한다. 만일 그 말만을 이해하고 되는대로 자포자기를 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유 · 불 · 도 3교의 서적을 대략 훑어보니,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뜻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다. 유교의 「주역(周易)」에서는 '군자는 덕업을 닦는다[君子進德修業]'하였고 도교의 「노자(老子)」에서는 '으뜸 선비는 도를 깨치고 부지런히 이를 실행한다[上士聞道勤而行之]'고 하였다. 또한 불교의 「보적경(寶積經)」에서는 '마치 큰 용이 할 일을 다 마치고 무거운 짐을 벗어 제 물을 얻은 것과 같다[猶如大龍 所作已辨 捨於重擔 殆得已利]'고 하였다.
나는 이로 인하여 이 3교를 빠뜨림없이 참구해 보니, 비록 그 문구들이야 서로 다른 점이 없지 않지만 덕이 반드시 학문에서 나온다는 데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에 더하여 7 · 80 노령에 이르도록 그 뜻이 심오하여 무궁히 이르게 될 것이다."
맨 마지막의 한마디는 만겁토록 바뀔 수 없는 말이라 하겠다.
7. 산 제사를 받고 입적하다 / 대원 지(大圓智)선사
대원 지(大圓智)스님은 사명(四明) 땅 사람이며, 도림 요일(道林了一)스님의 법제자이다. 요일스님은 우산 법거(祐山法㝒)스님을, 법거스님은 황룡 혜남스님을 친견하였으니 대원스님은 몸소 황룡파의 종지를 얻은 셈이다. 「황룡삼관송(黃龍三關頌)」과 「염고(拈古)」를 지었는데 그 법어들은 총림에 성행하였다.
처음 묘희스님은 그의 성품이 털털하여 절 일을 돌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그를 썩 좋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염고」를 보고서 마침내 의자를 만지작거리면서 "참으로 황룡을 정통으로 전한 것이다"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염고집」 뒤에 큰 글씨로 4구게송을 썼다.
칠불의 명맥과
모든 조사의 눈동자가
이 어록을 보기만 한다면
모두 앞에 나타나리.
七佛命脈 諸祖眼睛
但看此錄 一切現成
이를 계기로 학인들은 바야흐로 두 분 스님의 묘용처(妙用處)가 애당초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지(智)스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종고 묘희의 경지는 예전의 암두(巖頭全奯), 사심(死心悟新)스님에게 뒤지지 않으니, 백대의 스승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아직껏 이 노승과 그 일로는 맞딱뜨려보지 않았는데, 만일 이 노승을 한 차례만 만난다면 앞 뒤가 끊기게 해주리라."
그러나 두 스님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지선스님은 석상산(石霜山)에서 세상을 마쳤는데 열반하기 10일 전에 미리 제자들에게 살아서 제사를 받고 법좌에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여기에서 대혜 묘희스님이 사람을 가볍게 인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8. 묘도도인(妙道道人)의 법문
묘도도인(妙道道人)은 연평(延平) 황씨(黃氏)의 딸이다. 여러 큰스님을 두루 친견한 후 경산(徑山)에서 묘희스님을 찾아뵈었다. 한번은 묘희스님이 방장실에서 어느 스님에게 묻기를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자 그 스님은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마침 묘도도인이 문밖에서 이 말을 듣고 환하게 깨친 바 있어 묘희스님께 아뢰자 "화살이 뽕나무에 꽂혔는데 닥나무에서 즙이 나왔군!"하며 깨친 바를 인가해 주었다.
후일 그는 홍복사(洪福寺)의 개당 법문에서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선이란 뜻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니, 뜻을 세우면 종지에 어긋난다. 도란 공훈과는 동떨어지니, 공을 세우면 도의 분수를 잃게 된다. 소리 밖의 말을 생각 속에서 구하지 말고 조용(照用)의 기틀을 지니고 불조의 감추(鉗鎚)를 쥐고서 부처가 있는 곳에선 서로 손님과 주인 되고 부처가 없는 곳에서는 바람이 냉랭하다. 마음이 편안하고 생각이 태연하면 메아리는 순조롭게 소리에 화답하니, 말해보라. 이와 같은 사람은 어느 곳에 있는가를……"
한참동안 말없이 있다가 송하였다.
도롱이 걸치고 천 봉우리 밖에 비껴 섰다가
오노봉 앞 채소밭에 물줄기 끌어주다.
披簑側立千峰外引水澆蔬五老前
또다시 설법하였다.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내렸다 하는 잘못은 눈뜨고 침상 위에다 오줌싸는 격이요, 현성 공안을 함부로 쓰는 것은 꾀 많은 계집아이가 정조를 잃은 격이라, 도무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것이며, 신령한 거북이가 꼬리를 질질 끄는 일이다.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라' 함은 허공에 못질하는 것이요, 부서진 집을 떠난다 해도 오히려 썩은 물 속에 잠겨있는 용과 같은 꼴이다. 깊은 물을 쏟고 높은 산을 무너뜨리는 한마디를 어떻게 말할까? 거령(巨靈 : 黃河의 水神)이 손을 올리는 것은 대단찮은 일이나 화산(華山)을 천겹만겹 산산조각 내었노라."
후일, 수암(水菴師一)스님은 한 스님이 이 법문 거론하는 걸 보고서 손을 이마 위에 얹고 먼곳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이 일은 남녀 등의 상(相)에 관한 것이 아니다. 수많은 대장부들이 10년이고 5년이고 대중 가운데 살며 캐보아도 알지 못한 경지이다. 그는 비록 여인이지만 의젓이 대장부의 일을 해내었으니, 수많은 엉터리 장로들보다도 훨씬 낫다."
9. 간당 행기(簡堂行機)선사의 살림살이
간당 기(簡堂行機)선사는 처음 요주(饒州) 완산사(莞山寺)에 주지로 있었는데 17년 동안 화전을 일구어 밭갈이를 하면서 갖은 고초를 맛보았다. 스님이 살던 곳은 사방이 자연 그대로의 상태였으므로 적막함을 즐길 수 있었으며, 세상의 부귀영달에 마음 쓰지 않고 베옷과 나물밥으로 변함없는 절개를 지켜 왔다. 이에 세상에서는 그를 '기도인'이라 불렀다. 뒤에 스님은 구강(九江) 원통사(圓通寺)에 살며 차암(此菴景元 : 1094~1146)스님의 도를 크게 폈다. 그의 대중법문은 다음과 같다.
"원통사엔 생약가게를 열지 않고 다만 죽은 고양이 머리를 판다. 그 값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먹기만 하면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지."
그곳에서 태평선원(太平禪院)의 은정암(隱靜庵)으로 옮겨갔는데 비록 대중은 많아도 부엌 · 창고 등은 쓸쓸하였으나 대중들은 아무도 이를 불평하지 않았다. 절의 소임을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황룡 노스님의 법을 따라 새벽 죽공양이 끝나면 바리때를 걸어놓고 승당에서 시자에게 목탁을 치게 한 뒤 "누가 무슨 소임을 맡아주기를 바란다"고 하면, 어느 누구도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혹시라도 명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여기 나의 회중에서 일을 맡지 않고 네가 어디 가서 일을 맡겠느냐?"라고 꾸짖었다.
아! 선배들은 그 도가 높아 사람 쓰는 것이 이처럼 쉬웠는데 어찌하여 오늘날엔 수없이 빌고 절하여도 맡을 생각이 없고 오히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니, 괴롭습니다, 부처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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