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긍당 언충(肯堂彦充)선사의 문장
긍당 충(肯堂彦充)스님은 만암 도안(卍菴道顔)스님에게 공부하였다. 성품이 예리하고 견식이 해박하였으며 고금의 일을 널리 통달하여 이런저런 많은 문장을 지었다. 그 가운데 전우(典牛)스님 어록의 서문을 받고자 간초거사(簡初居士) 우시랑(尤延之)에게 한 스님을 보내면서 지은 글(詞)이 있다.
민아산(珉峨山)아래 뿔 세 개 돋힌 호랑이가
남방에 뛰어드니 그 누가 업신여기랴
늑담사 문준노스님 눈에서 빛을 놓고
남몰래 손을 뒤로 돌려 삼만근짜리 활을 쏘니
한 방에 맞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그 후로 사람 깨물어도 이빨 보이지 않네
무령산(武寧山)에 40년을 살았으나
어찌 유독 강서의 길에만 눌러앉으랴
경산사 도독(塗毒)스님 한 차례 물려
여지껏 남은 이빨자국 설욕할 수 없네
제자를 비야성에 보내어
거사를 찾아 한마디 구하노니
거사가 칭찬을 해도 당장 벙어리될 것이오
거사가 욕을 해도 당장 눈이 멀 것이다
거사여! 칭찬도 욕도 미치지 않는 경지에서
그를 위하여 어록의 서문을 써주소서.
33. 꼿꼿한 성격 때문에 / 공안 조수(公安祖殊)선사
공안 수(公安祖殊)스님은 사천(四川) 사람이며, 그 또한 만암 도안(卍菴道顔)스님의 법제자이다. 그는 성격이 꼿꼿하여 아무도 그를 가까이할 수 없었다. 건도(乾道 : 1165~1173) 연간에 호상(湖湘)지방에서 도를 폈는데, 한번은 진영에 스스로 찬을 썼다.
달빛은 산골짜기를 비추고
개울 물소리는 절벽에 떨어진다
물빛 산빛깔 속에
나는 한덩이 썩은 나무토막
月色照山容 泉聲落斷崖
水光山色裡 一塊爛奇柴
늙은 학 메마른 터에
날개를 잘 접을 줄 알고
하늘에 등이 닿도록 솟아오르니
선계(仙界)의 천지도 비좁기만 하구나.
老鶴入枯地 善解藏羽翮
點著背摩天 壺中天地窄
34. 서암 순(瑞巖順)선사의 상당법어
서암 순(瑞巖順)스님은 수암 일(水菴師一)스님의 법제자이며 법호는 위당(葦堂)이다.
처음 지주(池州) 매산사(梅山寺)에 있을 때 일찍이 상당법어를 한 적이 있다.
"오늘은 5월 15일, 하룻밤 장마비가 주룩주룩 내렸는데, 숲 속의 도인들은 서로 만나 무슨 얘기 주고받는지 알 수 없구나. 만일 들어 말하면 가슴팍을 쥐어박고 뺨따귀를 갈겨 주어야지! 무엇 때문이냐고? 황금이 풀무간을 거치지 않고서는, 어떻게 선명한 빛이 날 수 있겠는가. 열흘에 입실하고 오일만에 법당에 올라도 못난 이놈들을 묻어 둘 곳이 없구나, 아! 이놈들은 끌어다가 끓는 가마솥에나 처넣자!"
뒷날 스님은 태주(台州) 서암사(瑞巖寺)에서 입적하였다.
35. 뒤를 이를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 만수 요수(萬壽了脩)선사
만수 요수(萬壽了脩) 스님은 민(閩)사람이다. 처음 응암(應菴曇華)스님에게 귀의하였다가 후일 상주(常州) 무석사(無錫寺) 혹암(或菴師體 : 1108~1179)스님을 찾아뵈었으며 삽주(霅州) 상방사(上方寺)의 주지로 나갔다가 쌍탑사(雙塔寺)로 옮겼다.
그 도가 미처 떨쳐지지 않았을 때, 도독(途毒智策)스님이 감상사(鑑上寺) 능인(能仁)선원에서 바리때를 들고 오문(吳門) 땅을 지나는데 많은 법우들이 소참법문을 청하자 요수스님은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며 말하였다.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이 눈먼 노새에게서 사라졌으니 설령 온누리 사람이 잡아 일으켜도 일으킬 수 없다. 그러므로 조계산으로 가는 길이 가시덤불로 하늘까지 닿았으며 소실봉 앞의 들녘에는 해골이 즐비하다. 편작(扁鵲)이 아니고서는 뼈속까지 병든 환자를 일으켜 세울 수 없을 것이며, 손무(孫武) 오기(吳起)가 아니고서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온전할 수 없는데 도독고(塗毒鼓)를 한 번 치니 그 소리를 들은 사람마다 목숨을 잃고 몸에 필요한 진액을 끊어버리니, 참다운 풍모가 되살아난다. 이러한 큰스님이 있다면 불법이 무너질까 두려워할 게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번 말해 보라. 팔을 흔들며 걸어가면서도 뭇 중생을 두루 비춘다는 말씀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석 자(尺) 되는 신령한 빛, 마갈타국에 명령을 행하니 온 성 안에 화기가 가득하여 봄날처럼 따뜻하다."
법좌에서 내려오자 도독스님은 그의 손을 잡으면서 말하였다.
"나는 혹암(或菴)이 죽은 후로 그의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우리 조카가 있었구나!"
그 후로 요수스님의 도는 오(吳)땅에 널리 퍼졌다.
36. 대중공양으로 임무를 삼다 / 소암 요오(咲菴了悟)스님
소암 오(咲菴了悟)스님은 소주(蘇州) 상숙(常熟) 사람이다.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여 처음 무암 법전(無菴法全)스님을 찾아뵈었다가 뒤에 구주(衢州) 오거사(烏巨寺)의 밀암(密菴咸傑)스님을 찾아뵈었다. 순희(淳熙 : 1174~1189) 연간에 냉천사(冷泉寺)에 수좌로 있었는데 오로지 대중 공양에 마음을 다하였다. 당시 큰 흉년이 들었는데 밀암스님이 탁발 행각을 간 후 돌아오지 않자 소임자는 그가 돌아오면 공양하기로 약속하였다. 이에 요오스님은 산문에 앉아 기다리다가 모두 안으로 들어가 먼저 공양하도록 하였다. 밀암스님이 돌아오자 소임자가 이 일을 알리니 밀암스님은 요오스님을 보고서 불쾌한 빛을 보였다. 이를 계기로 그곳을 떠나면서 말하였는데 그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게 손가락 만한 사원이 있다면
마음을 다하여 오호(五湖)의 스님들을 공양하리라.
但得院子如揲大 盡情供養五湖僧
그 후 한 계절이 지나지 않아 구주(衢州) 상부사(祥符寺)의 주지가 되었고, 그 밖의 여러 곳의 주지를 지내면서 과연 대중공양으로 자기 임무를 삼았다.
37. 고목 조원(枯木祖元)선사의 대중법문
안산(鴈山) 고목 원(枯木祖元)선사는 묘희스님의 법제자이다. 한번은 송으로 대중 법문을 하였다.
안산 고목의 실다운 선(禪)은
예리하고 참신한 말주변에 있지 않네
뒷짐지고 갑자기 뽑아버리면
큰 고래 달을 삼켜 하늘에 파도가 닿는다.
鴈山枯木實頭禪 不在尖新語句邊
背手驀然拈得著 長鯨呑月浪滔天
38. 위산 법보(潙山法寶)선사의 게송
위산 법보(潙山法寶)선사 또한 대혜(大慧)스님의 법제자로서, 총림에서 잔뼈가 굵었다. 만년에 대위사(大潙寺)에 머물면서 송을 남겼다.
팔십 노인 힘겹게 비단 공을 굴리는데
굴리고 또 굴리며 그칠 줄 몰랐네
이제는 천봉 꼭대기로 굴리며
위산의 수고우(水牯牛)를 타고 앉으리.
八十翁翁輥繡毬 輥來輥去不知休
如今輥向千峰頂 坐看潙山水牯牛
39. 문장가 동산 혜공(東山慧空)스님
동산 혜공(東山慧空)스님은 복주(福州) 사람이다. 처음에는 초당 선청(草堂善淸)스님을, 뒤에는 묘희스님을 찾아뵈었는데 묘희스님은 그의 용모와 기개가 뛰어남을 보고서 마음 속으로 붙잡아 두고자, 그의 초상화에 찬을 써 주었다.
혜공은 나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나는 혜공의 아픈 곳을 찔러주니
아픈 곳은 가려웁고 가려운 곳은 아프구나
수많은 성인과는 길을 같이 못한다 하나
어떻게 납승들과 함께 쓰리오
누가 아랴. 빗자루 대통 속에 전통(錢筒)이 없고
쑥대밭에 기둥감이 없음을
지금은 저마다 자기를 몰라
말주변 없고, 콧물 흘리는 추한 늙은이를 마음대로 그려서
벽 모퉁이 후미진 곳에 걸어둔 채
밤낮으로 도루파 · 필력가 · 침수교향을 사르며
칠대(七代)조사에게 공양을 올리네.
그러나 혜공스님은 뜻을 바꾸지 않고 끝내 초당스님의 법을 이으니, 총림에 뜻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우러러보았다.
혜공스님은 문장을 잘 지었으며, 그의 「동산외집(東山外集)」이 세상에 널리 유행되고 있다. 그 문집 가운데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내가 사람을 떠나 보낼 때엔
'잘가라'는 말 한마디 뿐
다소곳이 여러 소리 듣고자 하면
고함쳐서 쫓아버린다
이제와선 또다시 글 써달라 청하니
병든 매에게 여우와 토끼를 잡으라는 격이지
스님네들이여, 스님네들이여, 아는가 모르는가?
단정히 앉아 자리나 지킨다면 끝날 날 없을 것이니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이나 주우러 가려므나
늑담과 백장이 강서 땅에 있다 하니
차산 도승(次山道昇)스님이 유암사(幽巖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혜공스님의 문집을 간행하여 강절(江浙)지방에 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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