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행자 조경(祖慶)에게 써준 대혜스님의 게송
대혜 고(大慧宗杲)스님이 쌍경사에 주석할 무렵, 1,700명의 훌륭한 스님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가운데 조경(祖慶)이라는 행자가 있었다. 그가 모친의 제삿상을 차려놓고 대혜스님에게 송을 청하자 대혜스님은 그의 골상이 범상치 않음을 보고서 송 한 수를 지어 주었다.
저 하나를 꿰뚫고 나면
부처님도 수용하기 어려우니
호랑이가 길에 앉아 있노라면
여우 토끼는 저절로 자취를 감추게 되지.
透過那一著 佛赤不能容
猛虎當路坐 狐兎自潛蹤
조경은 20여 세의 어린나이로 남원사(南源寺)의 주지가 되어 세상에 나갔다가 도림사(道林寺)로 옮겼다. 어느 날 저녁 보지(寶誌 : 418~514)스님이 젓가락 20개를 주는 꿈을 꾸었는데 깨고 나서 그 뜻을 알 길이 없었다. 이때 추밀참정(樞密參政) 유홍보(劉洪父)가 금릉 태수로 부임하여 조경을 종산사(鐘山寺)의 주지로 맞이하였다. 그 후 20년 동안 그곳에서 주지를 지냈으며 중간에 화재를 당하여 새로 지었으니 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경원(慶元 : 1195~1200)연간 초에 불조(佛照德光)스님이 오봉산(五峰山 : 徑山)에서 육왕사(育王寺)로 옮겨가자 조경이 그 뒤를 이어 경산사의 주지를 하다가 2년 후에 입적하였다. 참으로 묘희스님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27. 시자에게 남긴 임종게 / 회암 혜광(晦菴慧光)선사
회암 광(晦菴慧光)선사는 설당 도행(雪堂道行)스님의 법을 이었다. 귀봉사(龜峰寺)의 주지를 하다가 천주(泉州) 법석사(法石寺)로 옮겨왔는데 이는 참정(參政) 주규(周葵)의 부름에 의한 것이다.
그는 임종 때 제자 원총(元聰)에게 송을 남겼다.
총림의 독종 원총시자야!
우리 종문을 일으키지 못하면 너에 가서 우리는 멸망하리
나는 편히 누워 아무런 근심 없으니
총아! 너는 수시로 도독고를 울려라.
叢林毒種元聰侍者 尀耐吾宗滅汝邊也
吾今高枕百無憂 聰汝時撾塗毒鼓
원총은 그 후 오랫동안 밀암(密菴咸傑)스님에게 귀의하여 경산사의 수좌로 있다가 홍주(洪州) 보은사(報恩寺) 주지로 세상에 나왔으며, 뒤이어 운거산(雲居山), 은정사(隱靜寺), 설봉사(雪峰寺)등으로 옮겨다니다가 만년에는 칙명으로 경산사의 주지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회암스님이 부질없이 그를 인가한 것이 아니라고들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자비를 실천하신 설당스님께서 남긴 음덕이라 하겠다.
28. 강원에 있는 원오스님에게 처음 행각을 권하다 / 승상 범백재(范伯才)
원오(圓悟克勤)스님이 처음 성도(成都) 강원에 있을 때, 승상 범백재(范伯才)가 스님의 그릇이 비범함을 보고서 장편의 글을 지어, 그에게 남방으로 행각의 길을 떠나도록 격려해 주었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물을 보려거든 더러운 연못물을 보지 말라
더러운 연못물에 사는 고기와 자라는 천하기도 하다
산을 오르려거든 낮은 산일랑 오르지 말라
낮은 산엔 초목마저 흔치 않다
물을 보려거든 곧장 넓은 바다를 보고
산을 오르려거든 곧바로 태산 정상에 올라가거라
얻은 바 적지 않으려니와 보는 바 드높으리
이처럼 힘을 다함이 헛 노력이 아니라
남방엔 다행히도 부처 뽑는 곳 있나니
그곳에서 오묘한 뜻을 깨침이 좋으리라
후일 큰그릇 되어 무너진 기강 바로 잡는다면
대장부 출가의 뜻 저버리지 않게 되리
대장부여! 머뭇거리지 말라
어이하여 헛된 이름을 위하여 몸을 망치려 드는가
즐겁게 떠들며 놀 때는 고생 많지 않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덧없는 세월 흘러간다
성도 땅이란 더구나 번화한 곳이니
이곳에 오래 머무는 건 계집과 술의 유혹 때문
우리 스님은 본디 티끌 세속 벗어난 인물이니
악착스런 소인배와 어울려 묻히려 하겠는가
우리 스님 다행히 높은 뜻이 있으니
결코 흙탕물에 헛딛지 않으리라
그대는 보지 못하였나
배를 삼키는 고기는 작은 여울에 몸을 숨기지 못하고
아름드리 나무가 어찌 벌거숭이 동산에 살 수 있겠나
붕조(鵬鳥) 한번 나래치면 구만리 날아가는데
제비며 갈매기 따위와 함께 날으려 하는가
쏜살같은 천리마로
옛 가지 연연하는 뱁새를 본받지 마오
설령 그대가 수많은 경전을 논하여도
선종의 두번째 기틀[第二機]에 떨어지리라
흰 구름은 본디 높은 누대 그리워하여
아침 저녁 자욱하게 잠시도 흩어지지 않는 것은
온 백성 염원하는 비를 내려주기 위함일세
그때가 되면 한가히 산을 나오게나
그대 또한 보지 못하였나 형산의 아름다운 옥석은
뛰어난 옥공을 만나기 전엔 덤풀 속에 버려져 있었음을
그당시 초나라를 떠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진나라의 열 다섯 성보다도 값이 높았겠는가.
29. 사대부들이 쓴 큰스님의 어록서문[士大夫序尊宿語]
이 나라의 사대부로서 당시 큰 스님들의 어록에 서를 쓴 분 중에 참신한 문장가로는 산곡(山谷 : 黃庭堅) · 무위(無爲 : 楊次公) · 무진(無盡 : 張商英), 이 세 사람을 앞설 사람이 없다. 오늘에 이르러선 촉 땅 풍당가(馮當可)가 종문에 깊은 조예가 있으며, 그가 지은 석두 자회(石頭自回)스님 어록의 서문은 강호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의 서문은 아래와 같다.
5조(五祖 : 法演)스님은 만년에 남당(南堂元靜)스님을 만났다. 남당스님의 거칠고 사나운 성미는 혜근(佛鑑慧懃)스님과 청원(佛眼淸遠)보다도 더 심하였고, 기세는 하늘에 닿고 땅마저 비좁았으며, 대수(大隋 : 사천성에 있음)땅에서 노년을 보냈다. 그의 제자 자회도인은 망치질하고 돌 다듬던 솜씨로 그 높고 견고한 남당의 문을 쳐부수었다. 그가 쏟아낸 힘은 너무나 커서 단 한번의 망치로 곧장 뚫고 나간 후 조어산(釣魚山)으로 돌아와 좌정하니, 그의 가파른 절벽은 스승보다도 열곱이나 험준하였으며, 비상같은 독은 입에 넣을 수 없었다.
그의 문도 언문(彦聞)이 다시 눈 깜박할 사이에 스승의 남은 독을 모두 거둬다가 여러 총림에 뿌렸다. 나는 후세 사람들이 편치 못하고 스스로 나딍굴어질까 두려웁다. 그러므로 그의 독약에 표지를 붙여, 뒷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바이다.
진운야노(縉雲野老)는 서를 쓰다.
30. 무구거사(無垢居士) 장구성(張九成)의 법문
무구거사(無垢居士) 장구성(張九成)은 묘희스님에게 공부하여 큰 깨침을 얻었고 종지를 보는 눈이 분명하였다. 일찍이 노대가(老大家)로서 큰소리를 쳤다.*
3승 12분교(三乘十二分敎) 8만 4천여 권의 경전이라도 이 사람 면전에서는 제대로 침 한번 뱉지 못하고, 10신 10주와 10행 10회향과 등각 묘각이라도 이 사람 면전에서는 단 한 차례도 앞에 내놓지 못한다. 다년간의 사냥한 과보로 다섯마리의 범을 키웠더니 그들이 사해를 누비면서 당(唐)나라에 일본에 또는 신라에다 똥 오줌을 뿌렸다. 그러자 천지가 칠흑처럼 어둡고 해와 달이 분주하며 수미산이 겹겹이 솟아오르고 사해에 파도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들은 부질없이 거문고 가락을 고르며 잠시 앉아 있으니 그들의 얼굴과 주둥이를 보면 영락없이 무식한 촌놈인데도 그들의 기용(機用)은 모진 바람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 천둥번개 번쩍이고 뇌성벽력 진동하는 가운데 피리불며 활활타는 불을 끌고 간다. 아차! 이게 무슨 쓸데없는 짓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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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卍자속장경 주(註)에서는 이하의 글은 6조스님에 대한 장구성의 글이라 한다.
31. 장산 찬원(蔣山贊元)스님의 법제자들
장산 원(蔣山贊元 : ?~1086)스님은 자명(慈明 : 石霜楚圓)스님의 법제자이다. 찬원스님은 후일 설두 법아(雪竇法雅)스님에게, 법아스님은 자각 선인(慈覺善印)스님에게 법을 전하였고, 혼융 연(混融然)스님은 실로 이 법통을 이었다. 그는 건도(乾道 : 1165~1173) 연간에 금릉 천희사(天禧寺)의 주지로 있었다. 당시 치선 원묘(癡禪元妙)스님은 보령사(保寧寺)에, 대선 요명(大禪了明)스님은 장산사(蔣山寺)절의 주지로 있었는데 요명스님은 연스님이 황룡(黃龍慧南) · 양기(楊岐方會)스님의 직계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그를 박대하였다.
한번은 공식석상에서 서로 언쟁을 하였다. 연스님은 논변이 민첩하였으므로 요명스님이 큰 곤경을 겪게 되었는데 치선스님의 도움으로 화해하였다. 연스님의 도량은 여느 사람보다도 뛰어났으나, 너무 일찍 세간에 나와 여러 총림의 문호를 두루 다니지 못하여 종안(宗眼)이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총림에서는 그를 박대하는 이가 많았다.
후일 그는 남화산(南華山)에 주지하다가 오양산(五羊山)에서 입적하였다. 임종시 깨끗히 해탈하였고 그 고을 사람들이 침향목(沈香木)을 쌓아 다비를 하였는데 적지않은 기적이 있었다.
연스님은 나와 같은 고향 사람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그의 스승 자각(慈覺)스님을 위하여 지은 수준높은 제문이다.
건염 3년(1129),
내 갑자기 미친병으로
복두건 눌러 쓰고
허리띠 잡아 매고
깊은 밤 스승의 뜨락에서 도적질하다가
스승에게 붙잡혔지만
이미 아무 물건도 없어
공연히 3배만 올렸네
그 후로 물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분한 마음 적지 않구나
누군가 혹 스승을 욕하기를
'늙어 중얼거리지 못하고
전혀 깨친 바 없다'고 하면
나는 곧 머리 들고
하늘을 우러러 의심한다
누군가 스승을 칭찬하기를
'그의 도는 부처를 뛰어넘고
도량은 바다보다도 드넓다'고 하면
나는 곧 지팡이 쳐들고
그의 머리를 갈겨 부순다
이런가 저런가 하며
잘못 안 사람 많구나!
삼가 박주(薄酒)한잔을 올리오니
스님이여! 크게 한번 웃으소서.
스님의 제자 대기(大驥)스님은 순희(淳熙) 연간에 구주(衢州) 영요사(靈曜寺)에 주지를 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마침 부역법(賦役法)을 시행하여 이절(二浙)과 강회(江淮) 및 처주(處州)지방에 모두 차출을 명하였는데 대기스님은 구주(衢州) · 무주(婺州) · 처주(處州) 세 고을의 비구 비구니와 도사(道士)를 모두 이끌고 조정에 찾아가 이를 면제받도록 하였다. 오늘날의 모든 승려와 도사들이 국가의 부역에 나가지 않고 평안을 얻게 된 것은 대기스님의 힘이었다. 뒷날 머리를 깎고 법복을 입은 중이라면 마땅히 그 연유를 알아야 할 것이다.
대기스님은 후일 천태산 평전사(平田寺)의 주지를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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