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총림성사叢林盛事

총림성사 下 40~43.

쪽빛마루 2015. 9. 24. 13:32

40. 암호(菴號)와 도호(道號)에 관하여

 

 암호(菴號) · 당호(堂號) · 도호(道號) 따위를 옛스님들은 으레 지어 가진 적 없고, 그들이 머물던 곳이 그대로 불리웠으니, 이를테면 남악(南嶽) · 청원(靑原) · 백장(百丈) · 황벽(黃檗) 등이 그런 예이다. 암호나 당호의 시호는 보각 조심(寶覺祖心)스님이 황룡사의 일을 그만두고 회당(晦堂)으로 물러나 주석하니 사람들이 이를 계기로 '회당스님'이라 일컬은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영원(靈源) · 사심(死心) · 초당(草堂)스님이 모두 회당스님 문하의 훌륭한 제자로서 서로 법 받아 이어왔고, 진정(眞淨克文)스님은 회당스님과 함께 황룡 스님의 문하에서 같이 배출되었기에 다같이 운암(雲菴)이라 하였으며, 각범(慧洪覺範)스님은 운암스님의 제자이기에 적음 감로멸(寂音甘露滅)이라 자칭하였다.

 그리고 도호(道號)는 그의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고 또는 그의 고향으로 삼는 경우도 있고 또는 공부할 때 깨친 계기로 도호를 삼는 경우도 있고 또는 늘 하던 도행(道行)으로 알려지는 경우 등이 있다. 이 모두가 어떤 근거에 의해 호를 짓는 것이니 어찌 구차스럽게 스스로 지었겠는가.

 그러나 지금의 형제들은 이제 겨우 대중으로 들어와 향상 일착자(向上一着子)는 꿈 속에서도 보지 못하고서 저마다 도호 먼저 지어놓고 그 근원은 보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할당 혜원(瞎堂慧遠)스님이 결제를 시작하면서 소임자[知事]에게 물었다.

 "올 여름엔 부채가 얼마나 마련됐느냐?"

 "5백 자루입니다."

 "또 암자 5백 채가 생기겠군!"

 아마도 선승들이 부채를 얻자마자 암자 이름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마다 모두 크게 웃었다.

 나는 어머니의 꿈속에 한 범승(인도승)이 달을 이고와서 던져준 후에 태어났으므로 이로 계기로 '고월(古月)'이라 스스로 호를 지었고 '안온면(安穩眠)'으로 불렸다. 이는 각범스님이 '감로멸'이라 부른 것을 따른 것이다. 이 안온면과 감로멸은 「유마경」과 「보적경(寶積經)」에 근거한 말이다. 그러므로 귤주 소담(橘州少曇 : 1129~1197)스님은 나를 위하여 '고월설(古月說)'을 지어 주었다.

 

만고의 장천(長天)도 하루아침의 풍월(風月)이라

옛사람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이를 모방하여 써 본다.

도융(본서의 저자)스님이 태어나기 전날 밤

그의 어머니 꿈 속에 달 하나를 얻었으니

이것은 아들 낳을 상서였지

요즈음 사람들 모방을 버리지 못함은 부끄러운 일

도융스님은 모친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고

아울러 옛사람을 잊지 않고

'고월'이라 암자 이름을 지었으니

이는 욕된 일이 아니다.

 

 나의 은사 도독(塗毒)스님께서도 네 구절의 게송을 지어 주셨다.

 

만고의 허공에 떠있는 저 달에

어찌 밝고 어둠이 있었을까

이 마음 원래 일체이기에

어느 곳에서나 신령스러이 빛나도다.

萬古長空月  何曾有晦明

此心元一體  隨處燭精靈

 

 

41. 욕심을 경계하는 글 / 안정군왕(安定郡王)

 

 안정군왕(安定郡王 : 趙令衿)의 호는 초연(超然)거사이다. 잠깐 동경(東京)에 있을 무렵, 불교[空宗]에 뜻을 두어 장령 수탁(長靈守卓)스님을 찾아뵙고 깨친 바 있었는데, 그 후 어느 사건에 연루되어 강서 땅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북방 오랑캐의 침공으로 동경이 함락되자 종실의 여러 왕중에는 두 왕(휘종 · 흠종)을 따라 북쪽으로 끌려간 자가 많았지만 거사는 유배로 인하여 이 화를 면하였다. 마침내 삼구(三衢)에 살면서 시랑 풍지도(馮至道)와 설당 도행(雪堂道行)스님 등과 속세를 초월한 교류를 맺었다. 구주지방 사람들이 불교를 믿게 된 것은 이를 계기로 비롯되었다.

 그는 일찍이 남악(南嶽) 법륜사(法輪寺) 성행당(省行堂)의 기문(記文)을 지은 바 있는데 이는 뛰어난 걸작이었으며, 또한 '욕심을 경계하는 글[戒欲文]'을 지은 적이 있는데 여기에 수록한다.

 

 "내가 생각해 보니 세상사람들이 태고 이후 크나큰 고뇌를 지니고서 몸과 마음을 어지럽히면서도 여기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크나큰 괴로움이란 곧 음욕(淫欲)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 음욕의 고뇌란 정신을 어둡게 하고 목숨을 해치며 덕성과 도덕을 잃게 하고 수행을 방해한다.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자기 마음이 어느새 산란해지고 바르지 못한 견해가 일렁거리며, 환경과 인연의 유무에 관계없이 깨끗하고 더러운 곳도 가리지 않고 갑자기 전도망상을 일으켜 더러운 짓을 마음대로 한다.

 청정한 눈으로 본다면 거기에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그러나 망상의 티끌은 끝없이 구르고 애욕의 불길은 타오르니, 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노소 귀천을 막론하고 그와 같은 해를 입지 않은 자는 일찍이 없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재물을 탐하고 벼슬을 쫓다가 뜻이 이루어진 다음엔 색욕에 탐닉하기 때문이다.

 또한 승려든 속인이든 온갖 잡념이 찬 재처럼 사라져도, 오로지 이 한가지 일만은 흔히 마장(魔障)에 걸리거나 번뇌를 갖게 되며, 심하면 요사스런 일과 도적질을 일삼기도 하고 나라가 기울어지고 집안이 망하는 경우까지 있다. 혹 어떤 가족들은 화목하다가도 이 색욕으로 인하여 다투기도 하고, 백년해로를 맹세한 부부 사이에도 색욕으로 인하여 헤어지는 경우가 있다.

 참으로 색욕이란 사람을 무너뜨리는 근본으로 사람에게 지대한 피해를 준다. 그 간교함, 투기, 속임수, 현혹이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모든 업장은 끊기 쉬우나 이 괴로움은 없애기 어렵다. 참으로 색욕을 모두 없애면 도를 이루지 못할 게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남녀 이근(二根)은 애당초 분별이 없지만 간사한 생각이 일어나면 서로가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습관되어 이에 얽매임으로써 드디어 사모하고 그리워하여 꿈속에서까지도 놀라는 괴로움, 재물을 낭비하고 가산을 탕진하는 괴로움, 남을 이간하고 원수를 맺는 괴로움, 또는 형별을 받고 질병에 고생하는 괴로움을 당하여 마침내 요절하는 불행에까지 이르는데도 끝까지 그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 그것이 더럽고 청정한 인(因)이 아님을 명백히 알면서도 마치 불나비가 스스로 불속으로 뛰어들어 제 몸을 태우는 격이다.

 여래께서는 분명히, '정욕을 끊지 못하고 성인의 도를 구함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애정이 재난의 실마리임을 알아야 한다. 여인의 교태와 아양은 사람을 죽이는 도적이며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이며 지옥에 들어가는 씨앗이다. 이는 사람을 그르치고 덕을 손상시키고 목숨을 잃게 한다. 항상 모든 장소에서 남자니 여자니 하는 생각을 끊고 진실을 깨치면 누가 애욕에 얽히는 고통을 받겠는가

 또한 우리의 육신이란 더럽고 추악한 것이라서 무너지고 나면 모두 백골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애욕의 경계에 더이상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꿈속에서도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신령한 식[靈識]이 있는 모든 중생들에게 널리 바라노니, 싫어서 버릴 생각을 내되 원수를 생각하듯 멀리 떠나고 큰 불덩이를 대하듯 가까이해서는 안되며 화급히 피해야 한다. 마침내 참회하는 마음을 한번 내면 얽매인 사슬이 스스로 풀린다. 그리하여 더러움이 변하여 법신(法身)을 얻고, 음욕의 불꽃은 흩어져 지혜가 되어 서로서로 교화하며 다함께 청정도를 수행하여 안락행을 깨닫게 되어지이다."

 

 

42. 사감(思鑑)이 간행한 전등록

 

 전(傳 : 孟子)에 의하면, "모두 「서경(書經)」 글을 믿는다면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이 두루 퍼진 것은 무슨 까닭일까? 유가(儒家)의 경전이나 사서(史書)는 으레 감본(監本)이 있어 의미를 고증해보고 나서 확정한다. 그러나 우리 불가의 대중이 무식한 자는 항상 많고 유식한 자는 항상 적은 까닭에 흔히 억측과 편견으로 고쳐나간다. 따라서 마침내는 옛 성인의 현묘한 뜻을 잃게 되니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이를테면 소흥(紹興 : 1131~1162) 연간에 사명산(四明山)에서 「전등통요(傳燈統要)」의 재판을 찍었는데 이를 쌍계사(雙溪寺)의 못난 승려 사감(思鑑)이 주관하여 모연(募緣)한 것이다. 사감은 원래 학식이 없어 잘못된 것이 매우 많았으니 이는 참으로 불법문중의 큰 죄인이다.

 아! 이 책은 이 나라(宋代) 문공(文公) 양대년(楊大年)이 칙명으로 오승(吳僧) 도원(道原)을 위하여 교정한 책인데 하루아침에 망령되고 못난 이의 손에 의하여 내용이 바뀌어졌으니, 이를 두고 '수료학(水僚鶴 :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자라는 비유)'이라 하는 것이다. 총림에서 뜻 있는 자라면 이 사실을 몰라서는 안된다. 마땅히 귤주(橘州) 호주(湖州)의 강원[學庠]에 있는 두 원본과 대조하여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43. 유게(遺偈)를 손수짓고 열반하다 / 치선 원묘(癡禪元妙)선사

 

 치선 묘(癡禪元妙)선사는 무주(州) 사람이다. 어려서 강원에 있을 무렵 이미 깨친 바 있어 곧 선종으로 돌아서 당대의 큰스님을 두루 찾아뵈었다. 오랫동안 석실 광(石室光)선사의 불자회중(佛子會中)에 있다가 항주(杭州) 영석사(靈石寺)주지로 세상에 나갔고, 중축(中竺) 보령사(保寧寺)로 옮겨 석실의 법을 이었으며, 석실스님의 영정에 찬을 썼다.

 

나는 그대의 선(禪)을 높여줄 수도 없고

나는 그대의 도를 높여줄 수도 없지만,

손 하나 눈 하나를 높여

따로이 우리 가문을 좋게 하리라.

我也不重你禪  我也不重你道

但重一雙手眼  別得儂家恰好然

 

 원묘스님은 타고난 성품이 소탈하고 얽매임이 없었다. 상당법문이나 소참법문 때에는 반드시 청원(靑原)스님 회하의 많은 스님들의 사적을 앞세워 말하였다. 융흥(隆興) 건도(乾道 : 1165~11736) 연간에 그의 도가 널리 세상에 알려져 묘희스님과 우열을 다투었다.

 그의 법을 이은 제자로는 무학 침(無學忱) · 이암 심(已菴深)스님이 있는데 그 모두가 총림에 뛰어난 인물들이며, 이 밖에도 가암 충(可菴衷)스님이 있는데 어린 나이로 경산사에 있으면서 대혜스님이 입적하시자 장례를 주관하였다. 당시 묘희(妙喜)스님은 동당(東堂)에 있었는데 갑자기 가사와 주장자를 그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석 자의 까만 주장자 여기에 있으니

여기에는 터럭만큼도 정식(情識)이 용납되지 않는다

부처님, 마귀, 범인, 성인을 모두 쳐버려야만이

비로소 금강의 눈동자가 나타나리라.

三尺烏藤本現成  箇中毫髮不容情

佛魔凡聖俱搥殺  方顯金剛正眼睛

 

 원묘스님은 후일 가흥(嘉興) 상부사(祥符寺)에서 입적하였는데 입적할 날짜를 미리 정해놓고, 유게(遺偈)를 손수 지어 당시의 관리 · 승려 · 속인들과 작별하고 미련없이 열반하였다. 게송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왕범지의 버선을 이미 벗었으니

옆으로 끌든지 거꾸로 끌든지 마음대로 하여라.

王梵志已脫

一任橫拖倒拽

 

 스님은 참으로 대자유를 얻은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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