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총림성사叢林盛事

총림성사 下 51~54.

쪽빛마루 2015. 9. 24. 13:55

51. 제방의 주지를 경계하는 글[垂誡文]을 짓다 / 운거 서(雲居舒)선사

 

 운거 서(雲居舒)스님은 「수계문(垂誠文)」을 지어서 총림에 퍼뜨렸는데 제방의 주지를 경계하는 내용이었다. 늙고 병든 이를 편안히 머물게 해야하며, 젊은 사람들만 골라서 머물게 하는 일은 교화에 큰 손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고사목(枯死木)과 노승은 산문의 한 경관이라는 이야기다.

 이 「수계문」과 관련지어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한 노승이 오문(吳門) 만수사(萬壽寺)를 찾아갔는데 그 곳 주지가 머물 것을 허락하지 않고 노승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늙었는데 어찌하여 작은 절을 찾아가지 않소. 당신같은 사람은 나무나 한 그루 심을 수 있을 것이오."

 노승이 응수하였다.

 "그대는 애당초 인연이 닿지 않아 주지가 되지 못했더라면 아마 도처에서 나무나 심고 있었을 것이다."

 주지가 부끄러워 대답하지 못하자 노승은 게를 써 놓고 떠나갔다고 한다.

 

강호에서 몇 차례나 소를 삼켰던 기백이던가

늙으니 비로소 모두가 근심이라는 것을 알았노라

권하노니 후생들이여 부지런히 노력하시오

보아라 나무 심을 날이 너희 앞에 있음을.

江湖幾度氣呑牛  年老方知總是愁

奉勸後生宜勉勵  看看種樹在前頭

 

 당시 태수 왕좌(王佐)가 이 소식을 듣고 모든 사찰에 명을 내려 머물려는 승려를 가리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그것이 소위 불종자(佛種子)를 단절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52. 금사여울목의 관세음보살상[金沙灘頭菩薩像]

 

 금사탄(金沙灘)의 관음보살상은 인도승이 주장자를 어깨에 멘 채 해골을 들고서 마씨(馬氏)의 여인을 돌아보는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그 동안 많은 찬이 써졌으나 그 중에 대동(大同)이라 불리우던 사명 도전(四明道全)스님의 찬이 가장 뛰어난 걸작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비로써 평등히 중생을 보시고

욕망으로 낚고 끌어주심은

쐐기로 쐐기를 뽑고

독을 독으로 다스리는 일

설흔 두 가지 응신의

보문(普門)을 다 갖추었지만

오직 이 하나의 기틀에

천 성인의 눈을 빼앗았네

 

구름같고 안개같은 머리결에

날아갈 듯 얇은 갑사를

온누리에 가로 깔고

허공에 닿는구나

신령한 해골은 금으로된 사슬이요

찬 모래는 옥을 묻어둔 듯한데

놀란 기러기 하늘 높이 날고

이지러진 조각달 앙상한 나뭇가지에 걸렸다.

 

等觀以慈  鉤牽以欲

以楔出楔  以毒攻毒

三十二應  普門具足

只此一機  奪千聖目

 

雲鬂霧鬟  輕紗薄穀

大地橫陳  虛空摩觸

靈骨鎖金  寒沙埋玉

驚鴻縹渺銀漢斜

缺月東西挂疎木

 

 나는 당시 단구(丹丘)에 있으면서, 이 글을 보고 다음과 같은 군더더기를 붙여 보았다.

 

먼저 욕망으로 낚아다가

뒤에 부처님 지혜 얻게 하니

이익이 있든 없든

원래 장삿속을 떠나지 않는구나

황금 영골 쇠사슬을 다시 들고왔을 때

한번 물어보자. 너 지금 어떤 얼굴 주둥이더냐?

 

아 하 하

라 라 리

세 가지 중 어느 것이 진짜냐?

눈썹 치켜뜨고 귀막고 보아라

원통(圓通)의 문호가 크게 열렸다

음 음

 

先以欲鉤牽  後令入佛智

有利與無利  元不離行市

黃金靈骨再挑來

試問汝今何面觜

 

阿呵呵  囉囉哩

三箇之中那箇是

剔起眉毛塞耳觀

圓通門戶堂堂啓

吽吽

 

 은산 찬(隱山璨)스님의 찬은 다음과 같다.

 

정숙하고 아리따운 모습에 머리결 날리며

뭇 사내를 속여서 법화경을 외우게 하였네

일단 해골을 메고 간 뒤로는

밝은 달 누구 집에 떨어졌는지 알 수 없어라.

丰姿窈窕髩欹斜

賺盡郞君念法華

一把骨頭挑去後

不知明月落誰家

 

 은산스님은 천주(泉州) 법석사(法石寺)의 주지를 지냈으며, 목암 영(木菴安永)스님의 법제자이다.

 

 

53. 황룡파와 양기파

 

 황룡(黃龍) · 양기(楊岐)두 파는 모두 석상 자명(石霜慈明)스님의 회하에서 나왔다. 처음에는 황룡스님의 도가 크게 떨쳐 자손이 대를 이어왔다. 그들은 모두 훌륭하여 옛날 마조(馬祖道一)스님 문하의 수효에 뒤지지 않았으며, 진정(眞淨克文)스님 이후 4대를 거쳐 도독(塗毒)스님에 이르렀다(眞淨克文~湛堂文準~典牛天遊~塗毒智策). 한편 양기스님에게서는 2대를 지나(楊岐方會~白雲守端) 법연(五祖法演)노스님이 있었다. 법연스님은 해회사(海會寺)에 있으면서 남당(南堂元靜)스님과 삼불[三佛 : 불감(佛鑑慧懃) · 불과(佛果克勤) · 불안(佛眼淸遠)]스님을 얻어 그 문호를 크게 넓혔으므로 천하에는 오늘날까지 양기파가 많게 되었다.

 소흥(紹興 : 1131~1162)말에 도독 스님이 입적하자 쌍경사(雙徑寺)는 대(代)가 바뀌게 되었다. 육왕사(育王寺) 불조(佛照德光)스님은 절에 들어오자 맨 먼저 전 주지의 부도에 가서 제사를 올렸는데 서기 의섬(書記義銛)스님이 제문을 지었다. 대중들이 그 제문의 내용이 공정하다 추대하기에, 여기에 기록하여 후세의 학인으로 하여금 조종(祖宗) 유파(流派)의 내력을 알리고자 하는 바이다.

 

 "예전에 자명 노스님은 황룡스님과 양기스님, 두 제자를 두셨으니 마치 한 몸에 왼손 오른 손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자손들이 여러 유파로 나뉘어 가면서 각기 가문의 대를 이어갔는데, 전우(典牛天遊)스님은 늑담(泐潭 : 湛堂文準)스님을 등지지 않았으며, 묘희스님(양기파)을 스승처럼 존경하였습니다.

 이 덕광은 실로 묘희스님의 법제자이옵고 암주(巖主 : 전주지)께서는 전우(典牛)스님의 뒤를 이었으니, 비록 출신이 다르다 하지만 다행히 오늘 이곳 주지로 교체받았습니다. 도의(道誼)가 있는 곳엔 생사를 막론하고 잊을 수 없으며 또한 그 유래를 따져보면 모두 자명스님의 한 집안 사람입니다.

 암주께서는 평소 도덕이 뛰어나고 논변이 훤출하여 학인을 지도함에 큰 수단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세상에 정평이 나 있는 터이니 여기에 군소리를 더하여 스님의 원식(圓識)을 더럽히고 싶지 않습니다.

 삼가 음식을 마련하여 대중을 거느리고서 스님의 부도 앞에 나아가 한 차례 제사를 올리오니, 암주시여! 강림하소서."

 

 

54. 웃으며 이야기하다가 입적하다 / 귤주 소담(橘洲少曇)스님

 

 귤주(橘洲) 소담(少曇)스님은 사천(四川)사람이며 별봉 보인(別峰寶印)스님의 사제이다. 학문이 해박하여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며 이 나라의 승려로는 각범(慧洪覺範)스님 이후 오직 소담스님을 꼽고 있다. 촉(蜀) 땅 무위산(無爲山)에 주지로 있다가 억울한 누명을 입어 강주(江州)로 왔는데 승상 사위공(史魏公)이 그의 학문을 존경하여 명주(明州) 장석사(仗錫寺)의 주지로 추천하였다. 처음 그 절에 들어갈 때 사승상은 친히 전송까지 하였고, 그 후 승상은 다시 죽원사(竹院寺)를 지어 스님을 맞이하고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므로 별봉 스님이 금산사에서 설두산으로 옮겨올 때 제방에서 하나의 소(疏)를 소담스님이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설두산의 주지도 좋고 취봉산(翠峰山)의 주지도 좋으니, 노형은 마땅히 자신의 가슴 속에 물어보고 단정할 일이오. 불법을 위해 오는 것인가, 아니면 주지자리를 위해 오는가를.

 이번 걸음은 사람들이 생각지 못한 일이겠으나 동산(東山) 직계 4대 법손으로 부끄러움이 없으니, 마치 서호(西湖)에 눈 개인 봉우리를 바라보는 것 같소. 오직 마음이 같고 도가 같고 출처가 같으면 그만이지 그곳이 불계(佛界)든 마계(魔界)든 중생계(衆生界)든 따지지 마시오. 그렇게 되면 새로 부임한 유봉사(乳峰寺) 스님의 명성은 오 · 월(吳越) 땅에 전해질 것이며, 도 값은 민 · 아(泯峨)산처럼 무거울 것이오.

 해문국(海門國)에 머문 지 12년이 넘도록 파도가 일렁이듯한 법문으로 8만 4천 게송을 설하니, 태산처럼 우뚝하고 군영처럼 당당하오. 푸른 파도를 타고 이무기를 놀려주기보다는 혜장(蕙帳)에 의지하여 원숭이며 학을 벗삼는 게 좋으리니, 저 난초같은 우정을 생각하여 그곳에 한 떨기 우담바라를 피워주기 바라오. 그러나 사자(獅子)의 가문이 아니라 생각한다면 마땅히 족속을 끌어 안아야 하겠지만, 빨리 돌아와 이곳 동문의 마음을 달래 주시오."

 

 이 글은 강호에 널리 전해졌다.*

 그러나 소담스님은 타고난 성품이 평범하고 진솔하여 구애받는 일이 없었다. 죽원사에 있을 때, 하루는 또다시 태수 임시랑(林侍郞)의 술청을 받아 불려 갔다. 태수는 "술꾼 담스님, 경계를 뛰어넘어 무위(無爲)에 안주하여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빈정거렸으니, 스님이 무위사(無爲寺)에 머문 적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소담스님은 끝까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시 한낱 총림의 스님으로서 단구(丹丘)에서 2년간 지내다가 보규사(寶奎寺)로 돌아왔다. 어느 날 그는 목욕을 한 후 옷을 갈아입고 사위공(史魏公)을 초청하여 평소 자신의 행적 기록 등을 웃으며 이야기 하다가 입적하였다. 이에 성중의 사람들이 그의 장례를 치루었으며 다비 후 무수한 사리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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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자득 혜휘(自得慧暉)스님이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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