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소동파가 경구(京口)에 와서 불인(佛印)스님을 만남
소동파(蘇東坡)가 경구(京口)에 왔을 때, 불인(佛印了元)스님이 강을 건너 그를 찾아가자 동파가 말하였다.
"조주(趙州從諗)스님은 왕이 찾아와도 선상에서 내려오지 않았는데, 오늘날 금산사 스님은 무슨 까닭에 강을 건너 찾아왔소?"
이에 불인스님은 송을 지어 답하였다.
그 옛날 조주스님 겸손이 부족하여
선상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두 임금 맞았지만
대천사계 그대로가 선상인
금산의 무량한 모습만이야 하겠는가
趙州昔日欠謙光 不下禪牀接二王
爭似金山無量相 大千沙界是禪牀
63. 공주(贛住)사람 증문청공(曾文淸公)
문청공(文淸公) 증기(曾畿)는 공주(贛州) 사람이며 보문각시랑(寶文閣侍郞) 증천유(曾天游)의 아우이다. 종문에 관하여 공부를 많이 하였으며 심문 운분(心聞雲賁)스님과 세속을 벗어난 친구이기도 하다. 그는 세존의 '염화시중(拈花示衆)'에 대하여 송을 지었는데 강호에서 많이 음미한다. 송은 다음과 같다.
꽃가지 드는 모습 모두 다 보았지만
가섭존자 까닭없이 크게 웃었다
이로부터 봄빛이 모두 새어나가니
붉은 복사꽃 새하얀 배꽃이 인간 세계에 가득하여라.
華枝拈起大家看 迦葉無端却破顔
從此春光都漏泄 桃紅李白滿人間
또한 심문스님의 초상화에 쓴 찬은 다음과 같다.
이분이 심문노인인가 하니
고요히 말이 없고
심문노인이 아닌가 하니
그 모습 엄연하구나
보아하니 없는 것도 아니고
듣자하니 있는 것도 아닌데
이와 같이 보노라면
심문노인이 아니지
是心聞叟 寂然無聲
非心聞叟 儼然其形
視之非無 聽之非有
能如是觀 非心聞叟
64. 무주(婺州) 영응사(靈應寺)의 강주
무주(婺州) 영응사(靈應寺)강주 법정(法淨)스님은 후배에게 주지를 빼앗기고 섭승상(葉丞相)에게 이 사실을 알려 구원을 청하였다. 그러자 섭승상이 다음과 같은 회신을 보내왔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신 정성에 감사드립니다. 스님과 저는 지난 세상부터 인연이 있고 한 고향 사람임을 잘 알고 있으며 누가 물으면 같은 고향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나는 스님의 본분이 강백이며 영응사에 주지하는 40년 동안에 기왓더미만 쌓여있던 곳을 아름다운 사원으로 가꾸었고 금어(金魚)와 북소리가 일년내내 그치지 않게 했으므로 사원의 공양을 일으켰다고 자부할 수 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힘들여 짓는 보전(寶殿)이 준공되려는 즈음에 파계승 후학이 탐욕과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켜 교묘한 계략으로 스님의 자리를 빼앗았으려 한다하니, 스님으로 하여금 빛나는 그 일을 끝까지 원만히 이루게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일은 세간의 생각으로 논한다면 까치집에 비둘기가 사는 격으로서,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스님의 본분으로 말한다면 나의 몸도 나의 것이 아니며 모든 법이 한낱 꿈이요 환상이니, 영응사라 하여 어찌 오래도록 스님 혼자만의 생활터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옛사람이 말하기를 '머물 땐 외로운 학이 소나무 꼭대기에 차가운 날개를 쉬고 있는 듯하고 떠날 땐 조각 구름이 잠깐 세상에 스쳐가듯 한다'고 하였으니, 떠남과 머뭄에 깨끗이 처신한다면 무슨 매일 것이 있겠습니까.
머물려 해도 머물 것 없어야 바야흐로 떠나고 머물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물며 물 한 모금 쌀 한 톨도 모두 전부터 생에 정해진 인연이니, 떠나가고 멈추는 일 또한 어찌 사람의 일이라 하겠습니까. 굳이 같다 다르다를 고집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만일 이처럼 경계를 명백히 깨닫지 못한다면 맨 끝에 가서 진창에 빠지는 꼴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번에 떠나시거든 푸른 소나무 아래 밝은 창가에 편히 앉아 꼼짝하지 않고 자신의 생사대사 인연을 깨닫는다면 정말로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만일 태수에게서 도움을 빌리려 한다면, 그것은 겨드랑이에 태산을 끼고 바다를 뛰어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만법이 모두 공(空)임을 깨닫는다면 스님에게 있어선 범인이 성인으로 탈바꿈되는 전기가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렇지 않다면 허리춤을 싸 쥐고 어서 저 신부(新婦)나 맞으러 가십시오."
65. 혼원 담밀(混源曇密)스님의 게송
혼원 밀(混源曇密 : 1120~1188)스님은 태주(台州) 사람으로 구산 미광(龜山彌光)스님의 법제자이다. 속가에 있을 때 몹시 가난하였으나 분수를 지키며 떠벌이지 않았다. 그가 부산사(浮山寺)에서 대사산(大舍山)으로 옮겨가는 길이 속가를 지나는 길이라 형제들과 서로 만나게 되었는데, 시종들에게 그의 생가에 가지 못하도록 주의시키고 한두 사람만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자기 형을 보거든 절대로 인사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자기의 본분을 돌아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송을 지었다.
자취를 숨기고 옛 집을 찾아드니
초가삼간엔 씨앗도 뿌리지 않았네
어떻게 이 미천한 기질로
진동하는 우레소리를 깨달았을까?
조를 심은 곳에 콩이야 나지 않겠지만
납을 들었는데 그것이 금이었구나
다만 한걸음 잘못 디뎠을 뿐
끝내 신음 속에 떨어지지 않았네.
托迹來蓬屋 三椽種不深
如何微賤質 也解震雷音
種粟不生豆 拈鉛却是金
只因誤失脚 終不落沈吟
총림에서는 모두 그의 고매한 식견에 탄복하였으니 저 왕씨니 조씨니 이씨니 장씨니를 사칭하는 무리들과 함께 말할 수 있겠는가.
66. 견용공(甄龍公)의 문장
고(故) 감부(監部) 견용문공(甄龍文公)이 용상소(龍翔疏)를 지어 담밀(曇密)스님을 청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3사람이 양서암(洋嶼菴) 대혜(大慧)스님의 관문을 뚫었을 때도 스님께서는 그 중에 으뜸이셨고, 2천리의 황매산(黃梅山) 유배길에도 그 곁에 있었으니, 이를 정법(正法)으로 공선(公選)에 뽑혔다 하겠습니다. 스님의 발꿈치는 높고 스님의 눈은 영롱하여 자택사(紫擇寺)에서 일어나 홍복사(鴻福寺)에서 선을 설하니 여러 총림에선 산처럼 우러러 보았습니다. 석교를 지나 칠민(七閩) 땅으로 바리때 들고갈 때는 일만 납승이 구름처럼 뒤따랐습니다. 지난 날 여섯 큰 스님이 중주(中州)에 계셨으므로 이제(二淛) 지방에 좋은 사찰 많으니 다음 번 임명때는 스님을 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외로운 양서암에서 양봉(兩峰 : 紫籜 · 鴻福寺)의 주지가 되니 화두는 어디에나 있고, 일구(一句)로 삼요(三要)를 함축하니 많은 눈들이 휘둥그래집니다."
뒷날 담밀스님은 칙명을 받아 정자사(淨慈寺)의 주지가 되었다.
67. 상전 범경(象田梵卿)선사
소흥(紹興 : 1131~1162) 연간에 상전 범경(象田梵卿)선사는 수주(秀州) 화정 전씨(華亭錢氏) 가문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원통 법수(圓通法秀)와 투자 의청(投子義靑 : 1032~1082)스님을 찾아뵈었고, 뒤에 조각 상총(照覺常總 : 1025~1091)스님을 뵙고 깨쳤다.
상당하여 말하였다.
"봄은 저물어 꽃잎은 어지러히 붉은 비 되어 흩날리는데 남북으로 오가는 길손은 돌아갔느냐? 깊은 숲사이 두견새 우는데 내 집이 없으니 어디로 돌아가며 시방 불국토는 어이 서로 의지하는가? 이 늙은이에게 참 소식이 있노라. 어젯밤 삼경녘 달이 연못 속에 있더구나."
68. 백호광명에 싸여서 / 자은 법사(慈恩法師)
자은(慈恩)법사는 당(唐)나라 울지(尉遲)장군의 아들로, 열살의 어린나이에 「전책(戰策)」을 저술하니 그의 부친은 이를 장하게 여겼다. 현장(玄奘 : 602~664)은 꾀를 써서 그를 출가시켜 교종을 크게 일으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지은 「전책」을 훔쳐 내어 현장법사의 어린 행자에게 외우도록 한 후 행자를 데리고 울지를 방문하자 그는 자기 아들이 글을 잘 짓는다고 극구 칭찬하였다. 이에 현장스님이 한번 보자 하여 읽어보고는 이런 글은 이 어린 행자도 외울 수 있는 글이라고 하였다. 울지는 깜짝 놀라 행자에게 외우도록 하니 과연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이에 울지는 버럭 성을 내며, 이놈의 자식이 옛 글을 가지고서 나를 놀렸다면서 당장 죽이려 하자 현장스님이 그에게 말하였다.
"불법에 중생을 구제하는 법이 있습니다. 만일 이 아이를 구하지 못하면 나는 불제자가 아닙니다. 이 아이를 출가시키면 어떻겠습니까?"
울지는 그의 말을 따라 아들을 출가시켰다. 현장스님은 그를 제자로 얻었는데 그는 곧 큰스님이 되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자은스님이 천자와 마주앉아 논강할 때마다 천자는 그에게 옥가락지를 하사하였으며, 천자를 뵐 때에도 예의를 갖추지 않았고 출입할 때는 경론(經論)과 술과 안주, 그리고 여인을 실은 수레 3채를 뒤따르도록 하였다.
도선(南山道宣 : 596~667)스님은 그를 존경하면서도 한편 그를 의심하였고, 자은법사도 도선스님을 소승(小乘)이라고 얕보면서도 그에게 신선이 공양한다는 이야기를 의심해 왔다. 어느 날 도선스님을 방문하여 특별히 신선의 공양을 받아보자고 요구하였으나 진종일 이야기하여도 신선의 공양은 보이지 않다가 법사가 돌아간 뒤에야 공양이 비로소 왔다. 도선스님이 "어찌하여 때 맞추어 가져오지 않았는가?"라고 신선을 꾸짖자, 신선이 말하였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오늘 스님과 대승보살이 이야기할 때, 백호광명이 온누리에 가득하여 들어올 길이 없었습니다."
그 후로 도선스님은 마음을 다해 그를 존경하였다. 이로써 대승의 경지는 작은 근기를 지닌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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