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自敍)
내 처음 남민(南閩) 땅을 떠나 멀리 강표(江表)로 돌아 올 때, 분수에 맞게 기꺼이 초목과 함께 지내리라 생각하고, 성산(城山)에 풀을 베어 암자를 짓고 상서(尙書) 손중익(孫仲益)이 써 준 '운와암(雲臥菴)'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손씨는 다시 시 한 수를 보내왔는데 그 가운데
내 한 몸과 이 세상이 서로 맞지 않는데
구름은 한가로이 누워 날지 않네.
身世兩相違 雲閒臥不飛
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는 참으로 나를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높다란 정상의 매서운 추위란 늙은이가 살기에 알맞는 곳이 아니어서 8년을 살고는 나날이 병만 생기므로 곡강(曲江) 감산(感山)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운세가 이미 떠난 뒤라 세상과는 나날이 멀어지니, 때에 따라 잘 처신하면서 기력이 다하여 죽을 날만을 기다렸다. 때로는 소나무 언덕에 올라 무더위를 피하고 때로는 초가 처마 밑에서 포근한 햇살을 쪼이노라니 몸은 한가롭고 하릴 없었으며, 지나다가 들른 손님이나 친구가 있으면 이야깃거리가 없어 지난 날 보고 들었던 공경(公卿) 사대부와 옛 선승의 남기신 말과 뛰어난 발자취를 거론하여 물외(物外)에서 담소하는 낙을 삼아 왔다.
옛 사람이 말하지 않았던가? "얘들아! 잠깐 들은 것만으로도 귀에는 익숙해 진다"라고. 마침내 서로 주고 받았던 이야기를 기록하여 「운와기담(雲臥紀談)」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를 강호제현이 반드시 좋다고 하지만은 않을 것이며, 정수만을 뽑아 책을 만든다면 오히려 나의 허물을 더욱 가중시키는 일이 아닐까?
문자의 성품이 공하며 언어의 길이 끊어졌으니 내가 하루종일 이야기 했어도 이야기한 일이 없다고 생각해준다면 나의 뜻에 가깝다 하겠다.
운와암(雲臥菴) 노승(老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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