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운와기담雲臥紀談

운와기담 下 25~27.

쪽빛마루 2015. 11. 4. 09:04

25. 장준(張浚 : 魏公)을 문안하러 가는 길에 / 겸수좌(謙首座)

 

 지난 날 대혜선사가 경산사에 주지로 있을 때 겸(謙)수좌를 영릉(零陵)으로 보내 장위공(張魏公)에게 문안을 드리게 하였는데 당시 죽원암주(竹原菴主) 종원(宗元)이라는 자가 동행하였다. 그는 겸수좌와 교분이 매우 두터웠는데, 그보다 도를 앞서 깨달았기에 겸수좌가 종원스님에게 말하였다.

 "평생동안 참선을 했고 많은 선지식들도 만나 보았으나 깨닫지 못하고 지금도 분주하게 돌아다니기만 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종원스님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길을 갈 수 없으면 참선도 할 수 없다. 평소에 공부한 것, 깨달은 일, 그리고 장령(長靈) · 원오(圓悟) ·불일(佛日) 이 세분 노스님이 너를 위해 설법한 것들을 모두 생각하지 말라. 내가 이제 너와 같이 가는 도중에 너를 대신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두 대신하겠지만 대신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일은 네 스스로 해야된다."

 "다섯 가지 일이란 무엇인가?"

 "옷입는 일, 밥먹는 일, 똥누는 일, 오줌싸는 일, 시체를 싣고 길 가는 일이다."

 겸수좌가 길을 반절도 못가서 갑자기 깨달으니 종원스님이 축하말을 하였다.

 "오늘 큰 일을 깨쳤으니 기쁘다. 나는 이미 청하공(淸河公 : 장위공)을 뵈었으니 그대 혼자 가시오. 나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리다."

 장위공은 일찍이 겸수좌가 깨달았음을 알고 그의 암자를 '자신암(自信菴)'이라 이름하고 암자에 대한 기록을 써 주었다.

 

 "내 호상(湖相)에 갔을 때 불일선사가 겸수좌를 보내왔는데 무림(武林)을 출발하여 형양(衡陽)까지의 험준한 3천여리 길에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오다가 도중에서 기연이 맞아 진리를 깨쳤다. 그를 한번 만나보니 기쁨이 넘치는 얼굴엔 가슴 답답한 병이 없는 듯하였다."

 

 이어 종원스님에게 서신을 보냈다.

 

 "내 영릉 땅에서 외롭게 살고 있을 때 경산 불일(대혜)선사가 겸수좌를 보내 안부를 물어 왔습니다. 종원스님은 불일선사가 회중에서 죽비(竹篦)화두를 들어주었을 때 마음에 먼저 깨친 바가 있었습니다. 스님이 의연히 겸스님과 함께 오다가 무주(撫州)와 신주(信州) 사이에 이르러 겸스님도 인연이 맞아 이제껏 공부해왔던 틀을 벗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종원스님이 기뻐하며, '내 이미 청하공을 뵈었다'하고 그 길로 곧장 동양사(東陽寺)로 돌아가 대중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나는 도의에 가까운 그의 행동을 가상히 여겨 이 글을 종원스님에게 보내면서 불법을 잘 보호해 줄 것을 격려하는 바입니다.

 

 소흥(紹興) 무오년(1138) 4월 23일 자암(紫巖)거사 장준 덕원(張浚德遠) 씀."

 

 겸수좌가 경산사로 돌아오자 대혜선사는 산등성이까지 나와서 그를 맞이하였는데 멀리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서, "이 놈이 뼈까지도 모두 바뀌었군!" 하였다.

 겸수좌는 뒷날에 건양(建陽)으로 돌아가 선주산(仙洲山)에 초가를 짓고 살았는데 그의 가풍을 들은 사람들이 기꺼이 귀의하였다. 시랑 증천유(侍郞 曾天游) 사인 여거인(舍人 呂居仁) 보학 유언수(寳學 劉彦脩) 제형(提刑) 주원회(朱元晦 : 朱子) 등은 편지로 도를 묻기도 하고 때로는 산속으로 찾아 오기도 하였다.

 주자에게 보낸 답서는 다음과 같다.

 

 "하루 24시간 중에 일이 있을 때는 일을 하고 일이 없을 때는 이 한 생각에 머리를 돌려 화두를 들어야 합니다. 한 학인이 조주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조주스님은 이에 대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화두를 가지고 오직 들기만 할 뿐 생각해서도 안되고 천착해서도 안되며 알음알이를 내서도 안되고 억지로 맞춰서도 안됩니다. 이는 마치 눈을 감고 황하를 뛰어 넘는 것과 같아서 뛰어 넘을 수 있을까 없을까는 묻지 말고 모든 힘을 다하여 뛰어 넘어야 합니다. 만일 진정으로 뛰어 넘었으면 이 한번에 백번 천번 모두 뛰어 넘을 수 있지만 뛰어 넘지 못했다면 오로지 뛰는 일에만 몰두할 뿐 득실을 논하지 말고 위험을 돌아보지 말고 용맹스럽게 앞으로 향할 뿐 다시는 헤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의심하고 주저하며 생각을 일으키면 영영 멀어집니다."

 

 겸수좌는 출산상(出山相)에 찬을 썼다.

 

갈대 숲속 까치집에서 이룬 일이라곤

쑥대머리 때묻은 얼굴로 산을 내려온 것 뿐

만일 도를 깨쳐 이제 성불했다 한다면

무엇하러 저자거리에서 낡은 짚신을 신고 있소.

蘆膝鵲巢成底事  蓬頭垢面出山來

若言悟道今成佛  當甚街頭破草鞵

 

 즉심즉불(卽心卽佛)에 대해 송하였다.

 

어느 집 밥뭉치를 빈 대들보에 걸어놓고

어린 아이에게 쳐다만 보게 하더니만

꾸러미를 풀고 보니 타버린 재 부스러기라

보자마자 어린 아이 명줄이 끊어졌네.

誰家飯挂空梁  指與小兒令看

解開見是灰囊  當下命根便斷

 

 또한 형양(衡陽)을 가는 길에 동행에게 이런 글을 주었다.

 

하늘을 비추는 달빛에 옛 집이 밝은데

형양 땅 봄빛은 누굴 위해 푸른가

모를래라. 오산에 눈 덮힌 후에

평생을 신나게 지낸 사람 몇이나 될까.

月照天心古館明  衡陽春色爲誰靑

不知雪擁鼇山後  慶快平生有幾人

 

 대혜선사가 지난 날 경산사에 주지로 있을 때 내리신 법어들은 겸수좌가 형양에서 편집한 것이다. 겸수좌는 유보학(劉寳學)의 청으로 건주(建州) 개선사(開善寺)에 주지를 맡아 나간 적이 있다.

 

 

26. 고사(故事)에 밝았던 수단(守端)스님

 

 남해(南海) 수단(守端)스님은 자가 개연(介然)으로 인품이 고고하고 강직하여 엄히 계율을 지켰다. 그는 경서나 역사를 널리 섭렵하여 탐구하지 않은 책이 없었고 고금의 사례를 상고하여 근거있는 행동을 했으므로 총림에서는 그를 '단고사(端故事)'라고 불렀다. 또한 시에 능하여 우아하면서도 내용있는 시를 쓰려고 힘썼는데 석분암(石盆菴)시는 다음과 같다.

 

암자의 편액을 처음 하사받아 나무에 걸었는데

나무가 부러지고 암자를 수리한 일 몇 번이었던가

돌 동이엔 몇 되박의 물 줄지 않았고

야채는 때를 만나 번지르르 기름이 흐른다

동자는 천자의 물음에 얼굴 바로 쳐다보고

노스님의 마음은 조사와 짝하였네

내 어정거리며 높은 자취 생각하니

깊은 골에 구름 덮인 초나라 가을일세.

 

菴額初頒挂樹頭  樹摧菴朽幾經脩

石盆不減數升水  野菜時添一筋油

 

童子面承天子問  老師心與祖師儔

我來蹭蹬思高躅  萬壑雲橫楚甸秋

 

 스님이 불수암(佛手巖)에 은거할 때 당시 태평관(太平觀)을 감독하던 홍간의(洪諫議)가 쌀을 시주하고 소(疏)를 지었다.

 

 "태평관의 관리 홍추(洪芻)는 삼가 공양미를 희사, 불수암 개연(介然)선사에게 올리나이다. 불수암 불이대(不二臺)는 여산의 최고가는 경치인데 행인(行因)선사가 떠나신 후 주인이 누구인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선사께서 이곳에 오셔서 걸망을 풀고 머무신 후 그림자가 산 밖을 나가지 않은 지 오래이고 자리에 눕지 않는 때도 있었습니다. 거사들은 이 소문을 듣고 즐거워 했고 속세 사람들은 높은 기상을 바라보며 물러서기도 하였습니다. 방안에는 먼지가 일어나는 쌀독이 있고 부뚜막 치워주는 사람조차 없으며 양식이라고는 애당초 설익은 풋콩도 없으니 누가 다섯 말의 밥을 차려 놓겠습니까? 저는 이제 하루 한끼의 식량을 공양코자 한달에 쌀 세 말을 보내오니, 그 양이 도연명(陶淵明)의 녹보다도 적지만 서왕모(西王母)의 천도(天桃)를 찾아 헤매는 동방삭(東方朔)보다야 많습니다. 반드시 하늘무리가 마련한 공양이 있을 터이고 들사슴도 꽃을 머금고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다리 부러진 솥에 마른 솔개비를 주워 폭포수로 밥을 짓고 머리를 흔들며 읊조리는 곳에 밝은 달을 부수고 맑은 바람을 휘저으리다. 방장실은 비록 침상 하나 둘 만큼 비좁으나 갸냘픈 허리 둘레는 세가지 대나무 촘이나 되겠습니까? 앞으로는 이 불이대에 공양드리는 사람이 없으리니 누가 식량을 이어주는 무리가 되겠습니까? 도리어 내 그대에게 양식을 주는 것이니 훌륭한 불법을 이어 가소서."

 

 불수암은 여산 북쪽에 있으며 당나라 때 행인(行因)선사가 살았었다.

 

 

27. 호탕한 변(辯)선사

 

 소주(蘇州) 변(辯)선사는 처음 궁융사(穹窿寺) 원(圓)선사에게 공부하여 깨친 바 있었는데 서울에 들어와 천령사(天寧寺) 원오(圓悟)선사의 회하에서 더욱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한번은 대혜선사가 선자(船子華亭)화상이 협산(夾山)스님을 지도한 화두를 송하였다.

 

강어구에서 노 한 대로 알음알이 없애주니

이후로 협산의 기개 하늘을 찔렀네

세치 낚시 바늘을 떠나서는 소식 없더니

홀로 바다에 철선을 띄웠노라.

驀口一橈除作解  從玆夾嶺氣衝天

離釣三寸無消息  獨向滄溟泛鐵船

 

 변(辯)선사가 그 운에 따라 송하였다.

 

합당한 착어로 선자화상 응수했으나

땅을 파서 하늘을 찾는 격

설령 노 끝에서 확철대오 한다해도

낡고 물 새는 화정의 배란다.

合頭著語醻船子  恰似掘地覓靑天

直饒楫下通明徹  也是華亭破漏船

 

 변선사의 인품은 거칠고 호방하여 총림에서는 그를 '변추(辯麤 : 덜렁이 변선사)'라 하였다. 한번은 사위의(四威儀)에 대해 게송을 지었다.

 

산길을 걸음

숲사이를 뚫고 새들은 어지럽게 나는데

종종 산승의 살생하려는 마음 더해지니

원숭이는 놀라 깊은 구덩이에 빠졌네

 

산 속에 머뭄

밀실에 단정히 앉았으나 생각은 끝없어

가련하다 궁한 귀신이여, 출가자의 집에서

소금을 찾고보니 식초가 없구나

 

산 속에 앉음

두 발 포개 가부좌 하노라니 맷돌 같구나

짚신이 몇천 켤레나 닳았던가

그래도 온 몸이 모두가 허물일세

 

산 속에 누움

그루터기 베고 누워 환히 깨치니

금강의 바른 눈알이 튀어 나왔구나

우주에 이 소식을 아는 이 없어.

 

山中行  穿林野鳥亂縱橫

往往山僧殺心重  猿猱驚得墮深坑

 

山中住  密室儼然念無數

可憐窮鬼出家兒  覓得鹽來又無醋

 

山中坐  疊足跏趺似推磨

草鞵踏破幾千雙  惹得通身都是過

 

山中臥  榾䂐枕頭豁然破

突出金剛正眼睛  宇宙知音無一箇

 

 그후에 세상에 나왔으나 한차례도 개당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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