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한가위에 도반에게 보낸 게송 / 단봉 원(短蓬遠)
단봉 원(短蓬遠)선사는 평생 동안 잠자리를 펴지 않고 밤낮으로 고목처럼 앉아 정진하였으므로 '원 쇠말뚝[遠鐵橛]'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여항(餘杭) 영수사(永壽寺)에서 법을 폈으며 명극(明極慧祚)스님의 법제자가 되었다. 어느 추석날 도반스님에게 게송을 보냈다.
한 점 외로운 빛은 허공에 사무치나
그 자체는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어디든지 가는구나
삼라만상 머금은 빛이요 조개 속의 진주라
천 강에 그림자 드리우니 당나귀는 우물 속을 들여다 본다
마조스님 달 구경할 때 향배(向背)를 잃었고*
장사스님 활용처는 이름과 자취가 끊겼으니*
납승은 당장에 표방하는 뜻을 모두 잃고
일곱을 토하고 셋을 삼키나 모두 스스로 여여하구나.
一點孤明徹太虛 體無盈缺任方隅
光含萬象珠懷蚌 影落千江井覷驢
馬祖翫時迷向背 長沙用處絶名摸
衲僧直下忘標旨 吐七呑三總自如
이 게송은 결코 하찮은 붓장난이라 할 수 없다. 뒤에 오문(吳門) 승천사(承天寺)에 주지하였는데, 하루는 상당하여 설법하였다.
"승천(承天)의 한마디는 말이 있기 전에 주어진 것이다. 달마스님도 이 뜻을 모른 채 짚신 한 짝을 들고 되돌아갔다."
그 이튿날 아무런 병 없이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그 당시 광동곡(明光東谷)스님 또한 도행(道行)이 높았는데 그와 힘을 합하여 동상종(洞上宗 : 曹洞宗)을 일으켜 세우니 조동종에 사람이 없다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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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조스님이 달구경하다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좋겠느냐?"고. 지장(智藏)스님은 공양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고, 회해(懷海)스님은 수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普願)스님은 소매를 흔들며 가버렸다. 이제 마조스님이 말하였다. "경(經)은 장(藏)으로 들어가고 선(禪)은 해(海)로 돌아갔는데 보원만이 사물 밖으로 뛰어났구나."
* 장사스님이 하루 저녁에 앙산스님과 달구경을 하는데, 앙산스님이 "사람마다 모두가 이런 일이 있건만 활용하지 못할 뿐이다" 하니 장사스님이 "그대 마음대로 활용해 보시오" 하였다. 앙산스님이 "스님은 어찌 활용하시겠소?"하고 물으니 장사스님이 앙산스님을 얼른 걷어차서 넘어뜨렸다. 앙산스님은 "스님은 당장에 호랑이가 되었군요"하였다.
34. 개로일(開爐日) 상당법문 / 석전 법훈(石田法薰)선사
석전 훈(石田法薰)선사는 미산 팽씨(眉山彭氏)이다. 가정(嘉定 : 1208~1225) 연간에 고봉사(高峰寺) 주지로 나오니, 절은 낡고 승려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고원(高原), 무준(無準), 즉암(即庵), 중암(中巖), 석계(石溪), 등 여러 스님이 그를 추천한 후에 그들의 뜻을 따른 것이다.
화로를 지피는 날[開爐日] 상당하여 설법하였다.
"고봉의 문호는 차갑게 식어버린 재 같은데, 그대들에게 감사드리오. 한 겨울 자그마한 불씨가 마저 꺼지기 전에 우리 모두 힘을 써서 불어 봅시다."
석전(石田)스님이 오문(吳門)의 고봉사에 주지할 때의 쓸쓸함은 법창사(法昌寺) 보다 더했다. 분녕사(分寧寺)에 있을 때, 화로불 지피는 날을 맞이하여 고원스님 등 덕망 높은 노스님이 모두 모였는데 다시 말하였다.
"힘을 합해 북을 쳐서 열여덟 진흙 사람을 위하여 설법하는 것이 약간 낫겠다."
35. 혼원 담밀(混源曇密)선사의 대중법문
임안부(臨安府) 정자사(淨慈寺)의 혼원 밀(混源曇密)스님은 천태 노씨(天台盧氏) 자손이다. 천남(泉南)에 갔다가 교충(敎忠) 광 회암(光晦庵) 스님을 찾아뵈었는데 그가 바로 대혜(大慧)스님께서 '선 장원(禪狀元)'이라 부르던 인물이다. 혼원스님은 오래 머물면서 그의 도를 모두 전수받았으며 후일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그렇게 해도 그것은 땅을 파며 푸른 하늘을 찾는 일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니 허공에서 뼈를 찾는 일이다. 석가모니불은 가사와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마하대가섭에게 맡기셨으니 돈을 꾸어 돈놀이하고 물을 바꾸어 물고기를 길렀도다.
세존께서 금란가사를 전수하신 이외에 무엇을 따로 전하셨는가 하는 물음에 문 앞의 찰간대를 거꾸러뜨리라 하였으니 큰 길로는 가지 못하고 남몰래 뒷거래를 했구나. 안팎, 그리고 중간에서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전혀 찾지 못했다 함에 그대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었다 하니 재산을 다 몰수당했다가 뜻밖에도 주춧돌 아래서 황금을 찾았구나. 덕산스님의 몽둥이와 임제스님의 할이다. 할은 아전이 백성을 골탕먹이는 것이 관청에서 골탕 먹이는 것보다도 한 술 더 뜨고 혈육 친척이 도리어 의리로 맺은 친구보다 못한 격이다. 허리춤에 찬 달력이 오래 되었으니, 거북 등을 지지며 기왓돌을 던져 점쳐볼 필요가 없다. 양기(楊岐)스님의 '세 발 달린 당나귀'가 그대들의 콧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운문(雲門)스님의 '검은 옻칠 먹인 죽비'가 납승의 명근(命根)을 끊는다. 동승신주(東勝神州)에 불이 나서 제석천왕의 눈썹을 태웠고 서구야니(西瞿耶尼) 사람들은 참을 수 없어 연신 소리치며 떠벌리는구나. 초순 삼십일일, 중순 초하루, 하순 7일에 바리때를 걸어놓고 주장자를 놓아두었다. 산하대지와 일월성신이 석달을 안거(安居)하며 제불보살과 축생 · 나귀까지도 90일간은 아무 곳도 가지 않고 대원각(大圓閣)으로 우리 가람을 삼아 적멸(寂滅)이 앞에 나타나되 법에 따라 사건을 판결하듯 한다. 지난 해 피던 매화(梅花), 올 해 피어난 버들 잎새, 빛깔과 향기는 예전과 변함없도다.
할! 다만 바라거니 봄바람이여, 힘을 합해 몽땅 우리 집으로 불어라.
남의 법문을 볼 적에는 반드시 바른 눈으로 밀설(密說)인지 현설(顯說)인지 직설(直說)인지 곡설(曲說)인지를 살펴서 마치 항산(恒山)의 구름처럼 자유자재해야 한다. 반드시 같은 안목과 의견을 지녀야만이 옛분들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혼원스님의 출처에 관해서는 이미 가태(嘉泰 : 1201~1204) 연간에 간행된 「보등록(普燈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위에 서술한 몇마디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석전(石田)스님은 "보등록의 저자 수허중(受虛中)은 다만 스님들의 사적(事跡)만을 상세히 서술하였다"고 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연등록에서 이 부분을 삭제한 것은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36. 국사 진귀겸(國史 陳貴謙)이 사인 진덕수(舍人 眞德秀)에게 보낸 편지
국사 진귀겸(國史 陳貴謙)이 사인 진덕수(舍人 眞德秀)에게 보낸 답서는 다음과 같다.
"선문의 일에 대해 물어오신 것을 보고서 마음을 비워 선(善)을 즐기는 뜻을 우러러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박한 식견을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대의 물음에 답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감히 저의 좁은 의견이나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대가 말씀하신 '화두란 과연 들 만한 것이냐'는 물음에 관해 저는 화두란 애당초 정설이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한 생각이 나지 않으면 곧 삼라만상 전체가 부처이니, 어느 곳에 따로 화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생의 습기(習氣)때문에 깨달음을 등지고 번뇌에 빠져 마치 원숭이가 밤톨을 주워모으듯 끊임 없이 찰나 간에도 생각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 불조께서 부득이 임시 방편으로 아무 맛없는 화두를 씹게 하여 의식이 다른 곳으로 분산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꿀과자를 쓰디쓴 조롱박과 바꾸는 일과 같아서 그대들의 업식(業識)을 도야(陶冶)하는 데에는 실제 아무런 의의가 없는 것이며, 국가에서 부득이한 경우에 병기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예입니다.
그러나 요즘 학인들은 도리어 화두를 천착해서 심지어는 낱낱이 해설하는 것을 자기 일로 삼으니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능도자(稜道者)는 20년간 일곱 개의 좌복이 닳아지도록 좌선하는 동안에 다만 '당나귀 일이 끝나기도 전에 말 일이 닥쳐온다'라는 화두 하나만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발을 걷어올리는 순간 크게 깨달았으니, 이른바 8만 4천개의 자물쇠를 다만 하나의 열쇠로 열어 젖힌 것입니다. 어찌 많은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대가 보낸 서신에 의하면, '부처님의 말을 외우고 부처님의 마음을 지니고 부처님의 행실을 행하라. 그렇게 오래오래 하다 보면 반드시 얻은 곳이 있으리라'고 하니, 이와 같이 행한다면 진실로 일세의 어진 인물이 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선문의 이 하나[一着]는, 거기에다 자기 본바탕을 철저히 보아야만이 비로소 이 일을 마쳤다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람마다 원래 이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객진(客塵) 망상에 뒤덮혀 있으므로 만일 야무진 단련이 없다면 끝내 깨끗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원각경(圓覺經)」에 이르기를 '비유하건대 금광석을 녹이는 일과 같다. 금이란 광석을 녹이지 않는다 해도 그 속에 원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비록 원래듸 금이라도 결국 광석을 녹여야만이 순금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보내주신 서신에서 또한 '만일 도가 언어문자에 있는 게 아니라면 여러 불조들은 무슨 까닭에 그 많은 경론을 이 세상에 남겨두었는가?라고 물으셨습니다. 경은 부처님의 말씀이며 선은 부처님의 마음으로, 애초에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만 세상 사람들이 언어문자만을 쫓아 교(敎)라는 그물에 걸려 자기 자신에게 한줄기 빛과 큰 일리 있는 줄을 모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온 이후 문자를 세우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가리켜 견성성불 하도록 하였으니, 이를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르는 것입니다. 이는 교(敎)밖에 하나의 도리가 아니고 이 마음을 밝히되 교상(敎相)에 집착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만일 부처님의 말씀은 외우기만 하고 이를 자신에게 되돌릴 줄 모른다면 그것은 마치 타인의 보배만 헤아려볼 뿐 자신에게는 반푼어치도 없는 것과 같으며, 또한 헤진 헝겊으로 진주를 감싼 후 문을 나서자마자 흘려버리는 일과 같습니다. 설령 중도에서 조그마한 재미를 얻었다 하더라도 이는 오히려 본분의 일에 있어서는 법애(法愛)의 견해입니다. 이른바 황금가루가 아무리 귀하다 하지만 눈 속에 들어가면 티끌이 되는 법이니 깨끗한 것도 깡그리 닦아내야만 비로소 약간 상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껏 대장경을 열람해 보지는 못하였지만 「화엄경」, 「원각경」, 「유마경」 따위를 외워 조금은 익숙하고, 그 밖의 「전등록」, 여러 스님의 어록과 연수스님의 「종경록」을 모두 음미하며, 수십년간을 두문불출하였지만 경전의 논소를 볼 여가는 없었습니다. 「능가경」은 비록 달마스님의 심종으로서 구둣점마저 통달하기 어려워 깊이 연구할 수는 없었지만 요컨대, 우리 모두가 진실한 마음을 지녀 저 세속 사람들처럼 자신을 속이고 불경을 말재주나 돕는 것으로 생각해선 안된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잠시 일상생활에서 증험해 봅시다. 비록 큰 죄악과 허물이 없다 하더라도 모든 선악 순역(順逆)의 경계에서 과연 관조하여 경계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지, 밤의 잠자리에서 잠들었을 때나 깨어있을 때나 한결같은지, 공포에 전도되는 일은 없는지, 병들었을 때도 주인공이 될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만일 목전에 어떠한 경계가 있다면 잠들었을 때 전도를 면하지 못할 것이며, 자면서 전도가 있다면 병을 앓을 때는 반드시 주인공이 되지 못할 것이며, 병이 들어서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면 언덕에서 결코 자유자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른바 물을 마셔보아야 찬지 따뜻한지를 스스로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대제 사인(待制舍人)께서는 공명이 높을때에도 청정 수행으로 욕심이 적어 불도에 정신을 쏟으셨으니 불 속에서 피어난 연꽃이라 하겠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의하면 '이는 대장부의 일이지 장군이나 재상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하였고, 또한 '곧장 높고 높다란 봉우리 위에 올라서고 깊고 깊은 바다 밑을 걸으려 하는가. 더욱더 깊고 먼 경지에 이르려 하는가. 한번에 의심할 것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보내주신 서신에서 '착수할 곳이 없다' 하셨는데, '착수할 곳 없는' 그곳이 바로 힘을 얻은 경지[得力處]입니다. 그리고 지난번 서신에서 '고요한 곳과 시끄러운 곳에 모두 한쪽 눈을 두어라.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셨는데, 오랫동안 익어지면 자연히 고요함과 시끄러움의 구별은 스스로 없어집니다. 때로 마음이 어지럽고 온갖 망념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쉬지 않지만 하나의 공안을 들고서 그것과 끝을 본다면 기멸하던 망념은 자연히 문득 쉬고 관조의 주체와 객체가 모두 적멸(寂滅)하여 집에 도달할 것입니다. 저 또한 이러한 도리를 배우기만 했을 뿐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였습니다. 저의 생각을 되는대로 대략 토로하였으니 이를 남에게 보이지 말아 주십시오. 유도와 불도를 함께 도모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선비들이 매우 이상하게 여길 것이며, 대제사인께서도 후일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반드시 저를 비웃고 욕하게 될 것입니다."
국사 진귀겸은 선지식을 많이 뵈었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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