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희 태고(熙太古)스님의 학인지도
천태산 명암사(明岩寺)의 희 태고(熙太古)스님은 정자사의 동서(東嶼)스님에게
오랫동안 귀의하여 그의 법을 이었다. 지정(至正) 병술(1346)년 정월 13일 나는
자택사(紫籜寺)에서 명 성원(明性元) · 서 영중(瑞瑩中) 두 스님과 함께 한암사(寒岩寺)의 향축담(香竺曇)스님을 방문하고 그 이튿날 태고스님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두 스님이 행각에 지친 나머지 찾아뵙지 못하였는데 때마침 태고스님이 축담 스님을 찾아왔기에 우리 세사람은 객석에서 향을 올리고 예배를 드리자 태고스님은 느닷없이 우리에게 물었다.
"장주(藏主)는 오랫동안 축원(竺源)스님을 시봉하였으니, 세존께서 처음 하계에
내려오실 때 수많은 귀신을 만들어냈다는데 그 말이 어디에 떨어지는지를 아는
가?"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맛있는 음식은 배부른 사람이 먹기에는 걸맞지 않습니다.”
태고스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으로 위 아래를 가리키고 큰 걸음으로
사방을 돌아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로다.”
아! 오늘날 큰스님들은 후학을 지도할 때, 보기 쉬운 것은 감추어두고 어려운 것
만을 보여 후인을 농락하는 자가 많다. 그러나 태고스님의 그대로 보여주는 법문[直截擧話]은 걸인의 방석 밑에서 천금 되는 구슬을 찾아내는 것과 같다 하겠다.
46. 고난을 구해주시는 아미타부처님
원 지정(至正) 15년(1355) 겨울, 장사성(張士誠)이 호주(湖州) 강절(江浙) 지방을 침공하자 승상이 경산사의 말사 화성사(化城寺) 승려 혜공(慧恭)에게 그 고을 백성을 집결시켜 경계의 산마루를 방어하라고 명하였다. 어느날 적병이 경계를 침범하자 혜공스님은 향병(鄕兵)을 거느리고 격전을 치르어 적병은 패해서 도망가고 40여 명의 포로를 잡아 관가로 송치하는 도중 서호(西湖)의 조과사(鳥窠寺)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동이 텄을 때 마침, 조과사의 전 주지였던 요주(饒州) 천령사(天寧寺) 모대유(謀大猷)스님이 느린 걸음으로 행랑간을 산책하자 포로들은 스님의 우아한 모습과 쉬지 않고 염불하는 소리를 듣고서 마침내 모두가 "노스님! 우리를 구해주십시오.”라고 소리쳤다. 스님께서는, " 나는 너희들을 구해줄 수 없지만 너희들이 지극정성으로 '나무구고구난 아미타불(南無救苦救難 阿邇陀佛)'을 하면 아미타불이 너희를 구해줄 것이다”라고 하니, 포로 가운데 세 사람은 스님의 말을 믿고서 쉬지 않고 큰소리로 염불을 하였다. 이윽고 관리가 포로를 데리고 출발하려고 모두 형틀의 쇠고랑을 바꾸어 묶었는데, 우연히 이 세 사람은 형틀이 없어 새끼줄로만 묶어 놓았다. 관가에 도착하여 죄수를 심사할 때도 관리가 유별나게 이 세 사람만을 국문하였다. 그 중 한사람은 보리밭을 다듬다가 적병에게 붙잡혀 왔다고 진술하였고, 나머지 두 사람은 원래 명주(明州) 봉화현(奉化縣)의 톱(鋸)장이였는데, 이 곳에 고용되어 일하다가 사로잡혔다고 하여 이 세 사람은 풀려나게 되었다. 그들은 조과사를 찾아 대유스님에게 감사의 절을 올린 후 떠나갔다.
내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 아미타불은 서원(誓願)이 깊으셔서 염불하는 자는 임종 때 영험을 얻을 뿐 아니라 현세에서 처형되려는 죄수까지도 그의 가호로 풀려나게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47. 머리를 깎다가 사리를 얻다 / 서천축 판적달(板的達)스님
서천축국(西天竺國)의 큰스님 판적달(板的達)은 선정(禪定)을 굳게 닦으시고 아울러 계율까지 잘 지켰다. 세 벌 옷과 바리때 하나만을 몸에 지닐 뿐이었고, 시주를 얻으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세상살이에는 그저 담담하였다. 홍무(洪武) 7년(1374) 남경(南京)에 도착할 즈음, 황제는 관리에게 명하여 천계사(天界寺), 장산사(蔣山寺)의 주지와 함께 남경 여러사찰의 승려를 인솔하여 교외에 나아가 맞이하고 깃발과 향과 꽃으로 그를 인도하여 대궐로 모셔 오도록 하였다. 황제를 알현하자 황제는 기뻐하시고 깊은 총애와 후한 하사품을 전하였으며 장산사에 유숙하게 하고 사신을 보내 자주 문안을 드렸다. 그해 겨울, 황제는 친히 고명(誥命)을 지어 도장을 새겨주고 그에게 선세선사(善世禪師)라는 법호를 내렸다.
당시 나는 천계사에 머물렀는데, 어느 날 금단(金壇)의 이발사 장생(蔣生)이 스님의 머리를 깎아 머리털을 쟁반에다 받아놓았다. 처음 머리를 깎아 쟁반에 놓자 낭랑한 소리가 울리니 시자승이 재빠르게 덥쳐갔다. 다음번에 깎은 머리털은 장생 스스로 가져갔는데 그 속에 둥글고 깨끗한, 콩알 만한 사리 한 알이 있었다. 나머지 머리카락은 구경하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모두 가져갔는데 사리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였다. 당시 모두 세 알의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장생이 얻은 사리만을 보았으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선세스님의 시자승이 나에게 말하기를,
이런 일은 우리 스승에게 항상 있는 일이지만 세상에 자랑거리가 될까 두려워 머리를 잘 깎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홍무(洪武) 9년(1376) 가을, 선세스님은 황제의 명으로 절강좌성(浙江左省)으로 내려와 육왕사의 사리탑과 보타관세음(寶陀觀世音)의 시현(示現)을 위해 예배하였다. 두 곳에서 매우 특이한 상서로운 빛과 모습이 나타났으며 스님은 두 곳에서 모두 게송을 읊었는데 다 범자(梵字)로 씌어있다 한다.
48. 쇠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맹세
원대(元代)에 복건 도운사(都運司) 모(某)씨의 생일날, 서리(胥吏)인 주청(周淸)이
생일 잔치를 마련했는데 상 위에 쇠고기가 있었다. 이에 도운사는 급히 쇠고기를
치우게 한 후 여러 손님에게 천천히 설명하였다.
"내 젊은 시절 외가의 아우 아무개와 함께 한 백정집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막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에, 그 백정은 왼손에는 칼을 들고 오른손에는 송아지가 있는 암소 한 마리를 끌고와 처마 기둥에 묶고서 그 앞에 칼을 놓고 떠나가자 송아지가 갑자기 칼을 입에 물고 채소밭으로 달려가 발로 땅을 파헤치고 칼을 묻어버렸습니다. 백정이 돌아와 칼이 보이지 않자 화를 내기에 그 까닭을 말해 주었더니, 그는 칼을 찾은 후 문턱에 걸터앉아 한참 동안 탄식을 하다가 그 칼로 자기의 머리를 깎고 처자를 버린 채 출가하여 불법을 배웠는데, 지금 그가 어디에서 세상을 마쳤는지 알수 없습니다.
그후 외가 동생이 벼슬차 강서지방으로 부임하는 길에 배를 타고 황하를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황량한 강기슭에서 쉬게 되었는데, 건너편에 어슴프레하게 큰 집이 한 채 보였습니다. 그 저택은 높고 넓었으며 엄숙하고 반듯하게 정돈되어 마치 제왕의 거실 같았습니다. 이에 강기슭을 올라가 저택으로 다가가 문지기에게 이곳이 뭐하는 곳이냐고 공손히 묻자, 이곳은 관청인데 구경하고 싶다면 들어와도 막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문안으로 들어가 보니, 큰 의관에 긴 허리띠로 단장한 사람이 정청(正廳)에 반듯이 앉아 있기에 그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습니다.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기에 서울에서 왔다 하고, 이 곳이 무슨 관아냐고 물으니 이 곳은 천하태을뢰산(天下太乙牢山)으로 여기서는 소 백정만 전문적으로 다스리는 곳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웃집에 살던 백정 황씨네 넷째 아들이 죽은 지 열흘이 넘었는데 아직도 이곳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있다 하기에 그를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황씨네 넷째는 목칼을 덮어 쓰고 쇠고랑에 묶인채 끌려오다가 우리 외동생
을 보자 깜짝 놀라서 그대가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냐고 묻기에 임지로 부임하던중
우연찮게 이곳에 들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면 그대의 죄를 벗겨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죄가 너무 무거워 벗어날 길이 없지만 관리께서 부임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권하여 120마리의 소를 죽이지 않으면 죄를 면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말이 끝나자 고개를 돌려보니 그 저택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외가동생은 이때부터 사람들에게 소를 잡지 말도록 권했는데 그가 말한 수효를 모두 채우던 날 밤 황씨네 넷째가 외가동생을 찾아와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저는 관리께서 소를 죽이지 말도록 권한 은덕으로 이미 죄값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만일 집에 전하실 서신이 있으시면 제가 가져다 드리겠으나 다만 문 안에 던져 줄
수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외동생은 그가 집으로 가는 길에 우리집을 들러 내 옷을 빨리 보내라고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였는데 두 달이 지나자 과연 임지에 옷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당시 많은 손님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모두 쇠고기를 먹지않겠노라 다짐하였다.
49. 정토종의 말폐, 백련칠불교(白蓮七佛敎)
정토교(淨土敎)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은 많은 경전에 자세히 실려 있다. 그러나 정토교가 중국에 유행한 것은 동림 혜원(東林慧遠 : 晋代)법사부터 비롯된 것이다. 법사는 유 · 뢰(劉雷) 등 제현을 모아 연루(蓮漏 : 물시계) 위에 이름을 새기고 하루 여섯 때 예불을 올리며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였는데, 정성이 간절하여 임종 때 각각 그들의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전조(원대)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의 근기가 얕고 거짓 마음이 나날이 돋아 '백련사'라는 이름을 빌어 밥과 옷을 구하는 자가 종종 있었다. 연우(延祐 : 1314~1320) 연간에 우담 도(優曇度)법사가 대궐에 나아가 상소를 올려 그 폐단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물러나와서는 「여산보감(廬山寶鑑)」 몇 권을 저술하여 정교(正敎)를 밝히고 이단을 배척하여 동림사(東林寺)의 옛 일을 일신하였다. 그러나 우담법사가 입적한 지 백 년이 채 못되어 용렬한 자들이 그의 이름을 도용하여 이른바 백련칠불교(白蓮七佛敎)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그 폐단은 극심하였다. 어떤 이는 자칭 도사(導師)니, 사장(師長)이니 하면서 방등무애(方等無礙)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여 신도를 규합하여 정법을 훼손하고 마군이 일을 널리 행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교를 전파하고 온갖 광채를 나타냈다. 귀중한 음식을 불전에 올리지도 않고 내놓거나 시식(施食)까지 모두 끊고서 스스로 부처라 하며 또한 삼보(三寶)란 불(佛) · 법(法) · 사(師)라 하여 함부로 도사(導師)를 삼보 속에 넣고 승려는 아니라 하였다. 우매한 속인을 선동하고 그것을 풍속화하여 막을 수 없는 세태에 이르니 결국 조정에서는 백련칠불교를 엄단하는 조처를 내렸다. 그러므로 선비들이 동림사의 수행을 더럽게 여기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 어떻게 하면 우담법사와 같은 분이 다시 세상에 태어나 폐단을 바로잡아 줄 수 있을까.
50.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시주들을 대하다 / 서설 애(瑞雪崖)스님
서설 애(瑞雪崖)스님은 황암(黃岩)의 사람이다. 어릴 때 추강 담(秋江湛)스님에게 출가하여 신성산(新城山) 유경원(留慶院)에 살았다.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고 금강반야경을 일과로 삼았으며 더욱이 유가법사(瑜伽法事)에 능하였다. 승속의 청을 받으면 가서 지성껏 불사를 했을 뿐 시주가 많고 적음은 헤아리지 않았으며, 더러는 한푼을 받지 못하여도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다시 부르면 가서 처음이나 다름없이 해주었다.
홍무(洪武) 신해(1371)년 5월 가벼운 병을 앓자 더운물을 찾아 목욕한 후 옷을 갈아입고 게를 써놓고 가부좌한 채 열반하였다. 다비할 때 큰 별이 백호광에 섞이듯 빛이 흩어졌는데 연기와 불꽃은 전혀 없었으며 단단한 사리가 많이 나왔다. 세수 8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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