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관세음보살의 현신 / 조료 원(照寮元)스님
천동사 조료 원(照寮元)스님은 원래 병이 많던 사람이다. 홍무(洪武) 병진(1376)년 날로 병이 악화되자 면(勉)장주는 그에게 관세음보살 명호를 하라고 권하였다. 조료 원스님은 그의 말을 따라 하루에도 몇만 번씩 염불하다가 다음 해 10월 17일 오시(午時)에 이젠 죽음이 멀지 않으니 아미타불로 바꾸어 염불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 갑자기 아름다운 부인 한 분이 몸에는 육수의(六銖衣)를 걸치고 손에는 맑은 물병을 들고 문 밖에서 들어와 그의 앞에 섰다. 그는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잠시 후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바로 관세음보살의 현신이었다. 조료 원스님은 눈물을 흘리며 자기 죄를 고백하고 구원해달라고 기도하였는데 보살은 잠깐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그 일이 있은 지 5일이 지나 병이 다 나았고 지금은 50여세가 되었다.
59. 무정불성(無情佛性)에 관하여 논하다 / 경산 여암(如菴)장주
경산 여암(如菴)장주는 태주(台州) 위우현(委羽縣) 사람으로, 교학을 하다가 선공부로 들어왔다. 침착하여 서둘지 않았으며, 내전(內典 : 불경)과 외전(外典)에 널리 통달하고 자기 생사문제는 더욱 치밀하고 철저하게 파고들었다.
노년에는 천동산 왼편 산기슭에 은거하였는데, 나는 지정(至正) 갑신(1344)년에 그의 은거처를 찾아갔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무정물에 불성(佛性)이 있는지 유정물에 불성이 있는지에 언급하게 되자 이리저리 따지고 묻고 하다가 여암스님이 갑자기 말하였다.
"내 기억으로는 교학하는 큰스님 한분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무정 속에 본래 불성이 있는가, 아니면 불성이 어디에나 있어서 무정에도 막히지 않기 때문에 무정 속에 불성이 있다는 것인가" 하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급히 막으면서 말했다. "불성은 텅 비어 말과 명칭을 벗어나 있으니 있다 할 수도 없고 없다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자 여암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60. 금동석가상과 관음보살상의 영검
은성(鄞城) 복취암(福聚菴)의 비구 보월(普月)스님이 받들고 있던 청동으로 만든 석가상은 오래되고 정교한 불상인데 애당초 번양(鄱陽)에 있던 것이라고 할 뿐, 처음 조성된 유래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바 없다. 송(宋) 휘종(徽宗) 정화(政和 : 1111~1117) 연간에 전감(錢監 : 쇠돈 만드는 곳의 우두머리)이 그 불상을 가져다가 풀무에 넣어 무려 3일 동안이나 녹였지만 형태와 색상이 더욱 선명하였으므로 모두들 놀라서 그 불상을 요주(饒州)의 광효사(光孝寺)에 봉안하고 '벽화금동석가보상(辟火金銅繹迦寶像)'이라 이름하였다. 광종(光宗) 소흥(紹興 : 1190~1194, 원문의 '소흥'은 잘못으로 생각됨)에 광효사의 주지 보걸(普傑)스님이 화공에게 명하여 그 불상을 그리고 또 돌에다 새겼다. 회계(會稽)의 중교(仲皎)스님이 찬(讚)을 썼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부처님께서 부처 삶는 놈을 만났네
불꽃 속에 넣어서 녹이려 했지만
삼일 동안 들판에 불똥이 튕길 뿐
큰 용광로 속에서 끄떡도 안했다네.
作家會遇殺佛手 置之列焰令銷鎔
火星迸野亘三日 巍巍不動洪爐中
그후 사씨(史氏)가 정권을 잡자 그 불상을 사씨에게 바쳐 결국 절좌(浙左) 지방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며, 금조(今朝 : 明) 홍무(洪武) 임술년(1382) 보월스님이 사씨에게 돈을 주고 산 것이다.
또한 해회사(海會寺)에 지난 날 안휘(顔輝)가 손수 그린 관음성상이 한 폭 있었는데 필력이 정묘하고 채색이 엄숙하면서도 아름다워 세상에 보기 드문 것이었다. 원 지정(元 至正 : 1341~1367) 연간에 성 안에 사는 고씨(高氏)가 양황참법(梁皇懺法)의 예를 거행하면서 삼일 동안 그 그림을 모셔다가 불단을 마련하였다. 공양을 끝마치고 모든 사람들이 흩어진 저녁 2경(二更) 무렵 그 그림에서 큰 빛이 쏟아져 집 밖으로 뚫고 나갔다. 저자 사람들은 불이 난 줄 알고 불을 끄려고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그것은 그림에서 쏟아져 내린 빛이었다. 그후 저씨(褚氏)와 장씨(張氏)가 불사를 거행한 후 공양에 청하니 처음처럼 상서로운 빛이 났었다.
청정법신은 일체 만물을 포섭한다. 경에 이르기를, 삼천대천세계에 겨자씨 만한 곳이라도 보살의 신명(身命)이 계시지 않는 곳은 없다고 하였다. 중생에 응하여 모습을 나투시고 인연 따라 감응하니 어느 곳이라도 부처님이 계시는 곳 아닌 데가 없다. 이를 비유하자면 태양이 하늘에 떠서 강물 속에 그림자 비치면 보는 사람마다 각기 하나의 태양이 그 사람을 따라 다니는 것과도 같다. 불보살의 신비한 조화를 비교해 보면 어찌 그 차이가 만배에 그치겠는가?
이제 청동으로 만든 석가상과 관음의 그림을 보면 그 영검이 이와 같으니 불상과 진신을 두 가지로 생각하여 깊은 공경심을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61. 혼례식날 도망가서 출가하다 / 영 고목(榮奇木)
영 고목(榮奇木)스님은 은성(鄞城)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채식을 하고 법화경을 계속 읽어오다가 출가를 청하니 부모가 허락하지 않고 어거지로 결혼을 시키려 하였다. 혼례를 치르던 저녁, 스님은 도망가서 차가운 눈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거의 죽게 되었는데 그의 외가 형 육씨(陸氏)가 옷을 벗어 입혀준 후 부축하고 돌아와 더운 물로 몸을 녹이고서야 소생하였다.
맨처음 해회사(海會寺) 매봉 수(梅峰壽)스님을 모시다가 다음에 정자사(淨慈寺)의 동서 해(東嶼海)스님을 찾아뵙고 삭발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후엔 맑은 정신으로 참선을 하며 끊임없이 분발하여 중봉 단애(中峯斷崖) · 포납 대량(布衲大梁) · 무방 고림(無方古林) 등 여러 큰스님을 두루 찾아뵙고 예를 다해 법을 물어 그들의 가르침을 크게 받았다. 설창(雪窓)스님이 육왕사의 주지로 있을 무렵 스님의 계행이 엄숙하고 안목이 진실함을 존중하여 특별히 제2수좌로 초청하였다.
지정(至正) 정유(1357)년, 대중의 여망을 따라 해회사(海會寺)에서 개법하니 승속이 모두 그를 믿고 추앙하였고, 이에 힘입어 사찰이 흥성하게 되었다.
금조(今朝) 홍무 4년(1371)에는 서울[京師]에 가서 종산법회(鍾山法會)에 참여하였고 다음 해에 동쪽 지방으로 돌아왔다. 또 그 다음해에 은성의 거교암(車橋菴)에서 입적하였는데 널에 넣은 지 7일이 지나도록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향년 73세이다.
62. 계율을 경시하는 말세의 풍조를 개탄하다
명주(明州) 오대산(五臺山)의 계단(戒壇)은 영지(靈芝)율사가 중창한 것이다. 축조를 마치고 법을 강론하는데 한 노인이 나타났다. 신비한 기가 뛰어나고 눈썹과 수염이 하얀 그가 앞으로 나와 말하였다.
"저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세 알의 구슬을 바쳐 오늘의 계단 조성을 축하합니다.”
말이 끝나자 그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계단 중심에 세 알 구슬을 안치하였는데 여러 차례 빛이 나왔다.
황조(皇朝 : 明) 홍무 11년(1378) 4월 17일, 단주(壇主) 덕옹(德顒)이 열 명의 율사를 모시고 계법회(戒法會)를 크게 열었는데 그후 이틀이 지난 밤에 자계사(慈溪寺)의 스님 자무(子懋)가 단에 오르려는 찰나에 갑자기 구슬에서 광채가 밖으로 뻗어나오는 것이 보이고 그 속에서 선재동자가 나타났다. 자무는 깜짝 놀라 소리쳤고 온 대중이 돌아가면서 예배하였다. 슬픔과 기쁨이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그 후로 밤마다 대중들은 더욱 경건하고 간절히 기도하니, 황금부처로 나타나기도 하고 팔이 여섯 달린 관음상, 또는 붉은 대 푸른 버들 위에 빈가새[頻伽鳥]가 좌우로 춤을 추며 날아다니기도 하고, 또는 월개(月蓋)를 쓰거나 손에 화로를 든 부처로 나타나기도 하고, 용신이 구슬을 바치는 등 신기한 변화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흔히 볼 수 없는 일들이었다.
아! 내 들어보니 세존께서 계단의 축조를 마치시자 범천왕(梵天王)이 귀한 구슬을 올렸고 제석천왕도 여의주로 비를 내려 세존을 도왔다고 한 세존께서 돌아가실 때 비구들에게 '계율로 스승을 삼으라'고 부촉하셨고, 또한 '만일 나의 법이 무너진다면 그것은 계율에서 비롯된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불교와 계율의 관계는 실로 크다. 오대산의 계단에 구슬을 올린 사실은 본디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상법시대(말세)에 계법을 거행하자 신비한 감응이 이처럼 빛날 줄을 생각이나 했었겠는가! 천룡(天龍)이 계법을 보호하는 마음을 또렷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스님들이 계율을 쓸모없는 형식이라 생각하고 조금치도 마음에 두지 않음을 어찌하랴. 가슴아픈 일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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